십자가와 지혜
고린도전서1:18-20
이 땅에서의 지혜란 어떤 것일까요? 왜 사람들은 지혜를 원할까요? 우리는 이 땅에서 지혜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어리석은 자가 되기를 원합니까? 질문하는 제가 바보지요.
어느 누가 이 땅에서 지혜 없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겠습니까?
사람은 아담 안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을 그대로 쏙 빼닮았습니다. 신과 같이 되리라는 뱀의 속삭임을 지금도 여전히 듣고 있어요.
예레미아 7장1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하늘의 여왕을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그들의 또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나의 노를 일으키느니라”
유다가 진노 받으려고 이런 짓을 했을까요? 아니지요. 복 받으려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자신들의 지혜로는 이렇게 하면 축복을 받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믿음은 어디에서 출발할까요? 옆집을 보니 그렇게 하니 잘 되더라 입니다.
레우기 26장14절 이하를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가 청종하지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내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내 법도를 싫어하여 내 모든 계명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배반할진대 내가 이 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은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너희가 파종한 것은 헛되리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며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의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또 만일 너희가 그렇게까지 되어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일곱 배나 더 징벌하리라 (14-18)”
여러분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어떻게 처신하겠습니까? 우린 당연히 하나님 말씀을 들을 것이라 생각하시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징벌하신다는데, 망한다는데, 병 걸린다는데, 축복받는다는데 무슨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스라엘은 이런 마음을 먹지 않았을까요? 당연히 결심했겠지요. 어느 누가 망하는 것 좋아하겠습니까? 어느 누가 병들어 죽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몸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나요?
이스라엘이 머리가 나빠서, 결심이 약해서 여호와의 언약을 배반했을까요?
우리는 무슨 문제가 생기면 항상 결심이 약해서, 의지가 약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의지와 상관없이 몸은 몸대로 움직여 버립니다.
생각은 분명 말씀을 지켜 저주를 받지 않아야지. 그것이 오히려 이 땅에서 복을 받는 길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넣어주신 약속의 땅이라는 곳은, 이전에 살던 애굽이라는 곳은 오히려 말씀에 순종하는 여건이 더 좋은 환경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수 없는 환경입니다.
고개 들어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의 신이 더 멋져 보이고, 효과가 있어 보여요. 실제로 그렇게 느껴져요.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 받는다는 말씀은 알지만 몸이 가나안 종교를 더 사랑해요. 몸이 자꾸 끌려갑니다.
사사기 17장7-12절을 보면 에브라임 지파에 미가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레위인을 자기 집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자신을 위한 단독 제사장이지요. 다르게 표현하면 자신이 가정과 회사를 위해 기도해 주고, 죄용서도 해주고, 축복받게 해주는 목사를 고용한 겁니다. 목사에겐 월급도 꼬박꼬박 지불합니다.
레위인도 마찬가지지요. 자신이 부여받은 역할을 하고 말씀대로 나머지 열두 지파의 십일조를 통해 생활을 해야 하지만 몸이 그렇게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요. 십일조 나오지 않는데 어디서 거주하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이 어떠하다는 것은 알아요. 그런데 몸이 내 마음대로 됩니까? 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축복받는 것 보다 더 현실적인 것을 원합니다. 다른 몸들이 했던 대로, 익숙한 대로 살기를 원하지요.
여러분 가정에 이런 목사 하나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좋지 않을까요? 죄를 범하면 속죄제 드려주고, 하나님께 가족의 건강과 자녀 공부 잘하는 것과, 사업이 번창되게 기도해주면 어떨까요? 그저 좋아요.
목사님 저는 그게 별로인데요 하시는 분 있습니까? 그런데 몸이 그것을 좋아해요. 목사님이 여러분 가정을 위해 늘 기도해 주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축복을 많이 받도록 기도해준다는데 싫어할 사람 있을까요?
왜 교인들이 목사 말을 잘 들을까요? 어차피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말씀이라는 것도 지키기 쉽지 않고, 목사는 눈에 보이고, 예수님처럼 자신을 위해 뭔가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목사를 믿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몸이 그것을 좋아하고 따라요.
몸이 원하는 것대로 하는 것이 이 땅에서는 지혜입니다. 미가가 이렇게 한 것을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까요 부러워하지 않을까요? 너무너무 부러워합니다. 그래서 단 지파가 이 제사장을 스카웃 해 갑니다. 한번 물어 보니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고, 또 그대로 되었거든요.
그 제사장은 한 집안의 제사장 보다 한 지파의 제사장되는 것이 훨씬 좋아 보였지요. 그러니 얼른 단 지파와 함께합니다. 아무리도 돈이 더 많이 나오겠지요. 돈 많이 준다는데 어느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지금보다 더 큰 힘이 생긴다는데 왜 거절하겠습니까? 가나안 땅의 지혜, 애굽 땅의 지혜가 이런 겁니다.
몸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 이것이 지혜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보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어느 누가 순순히 보내 주겠습니까? 권력을 사용할 수 있는 재료가 되고, 돈이 되는데 누가 그것을 포기하겠습니까? 바로 왕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누가 봤습니까? 모세 외에는 아무도 만나보지 못했어요. 바로왕 입장에서는 듣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10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이 말씀을 들어보니 어떤 생각이 듭니까? 말씀이야 주님 말씀이니 동의합니다라고 하겠지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일 뿐만 아니라 이것을 땀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났다고 하잖아요. 많은 근심으로 자살했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우린 돈을 사랑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돈을 사랑하고 싶지 않습니까?
당연히 돈을 사랑하고 싶지 않지요. 그런데 그게 됩니까? 이 세상에 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나오라고 해 보세요. 돈이 없으니 그런 말 하지요. 당신 가진 돈 다 나 주세요 해 보세요. 버럭 화를 낼 겁니다.
예수님 믿는다면서요. 그러면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하지요? 네. 그러면 당신 가진 집을 내게 주세요라고 해 보세요. 그러면 미친놈 취급당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지혜라는 것은 몸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사야29장13-14절을 보겠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
어느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겠습니까? 그럴 사람 없어요. 그런데 마음이, 즉 몸이 말을 듣지 않아요. 몸이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대로인 몸은 자신이 선악과를 따먹은 티를 내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즉 자신이 하나님처럼 행세하는 겁니다.
물론 이렇게 된 것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저들에게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사29:10).
그러면 입술로만 존경하는 선지자들과 선견자들이 무엇을 했을까요?
가장 대표적인 선지자가 역대하18장에 나옵니다.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 선지자입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연합군을 결성해 길르앗 라못을 치려고 합니다.
남유다 여호사밧왕과 북이스라엘 왕 아합왕의 연합군입니다.
남유다 여호사밧왕이 전쟁하기전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한지를 묻자고 합니다.
그러자 아합왕이 선지자 사백 명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사백 명이 한 목소리로 올라가소서, 하나님이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붙이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하나님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힘 있는 왕에게 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큰 세력을 가지고 왕 옆에서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식으로 예언을 해서 왕에게 먹혀 들어갔습니다. 그러니 아합왕이 당장 이들을 불러 묻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고 미가야 선지가 같은 자들이었다면 부르지도 않았을 겁니다.
지혜자, 총명자들의 특징은 힘이 되는 쪽에 붙어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지혜가 그렇습니다. 힘이 되고, 자기 자신의 이름을 높여주는 것이야 말로 지혜요 총명입니다.
그러나 미가야 선지자는 자신이 본 천상회의를 말해 줍니다.
여호와께서 거짓말 하는 영을 이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재앙을 말씀하셨다고 아합왕과 여호사밧 왕에게 고합니다. 우리 같으면 천상회의를 본 미가야 선지자의 말이니 들을 것이라 하지요. 그러나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아합왕이 안 들어요. 여호와의 계획대로 재앙을 입는 자리로 가죠. 왜 그렇습니까? 미가야 말을 듣는 것인 이 세상 지혜가 아니에요. 미가야 선지자는 총명한 자가 아니에요.
누가 봐도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데 미가야 같은 어리석은 자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는 겁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이 구절을 읽으면 십자가의 도를 어떤 식으로 해석하겠습니까?
틀림없이 아합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자신을 구원받는 쪽에 두고, 그 다음 이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삼으려고 하지요.
멸망하는 자들이나 미련하다는 말에는 조금도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은 멸망 받으면 안돼요. 자신은 구원받아야 돼요. 자신은 미련하면 안돼요. 자신은 지혜로워야 돼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 말씀을 읽으면서 그래 난 멸망 받아야 돼. 그래 난 미련한 자야라고 할 사람 있을까요?
그래 맞아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했으니 십자가의 도를 믿어야지라고 하겠지요.
여기에 나오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에 우리 속에 자신을 꼭 집어 넣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십자가의 도를 챙긴 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버리지요. 미련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제대로 보시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과 구원을 가른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도 자체에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 받을 자들에게는 어리석게 작용을 하고,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능력으로 활동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멸망 받을 자들이고 어리석은 자들인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누가 구원받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어요.
로마서 3장23절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구원받은 자들은 오히려 자신이 멸망 받을 자이고 어리석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들입니다.
우린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아요. 당신 구원받았습니까? 당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까? 이런 질문 받아 보셨지요?
그러면 우린 당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는 자들에게 나는 멸망 받아 마땅합니다. 나는 어리석은 자입니다라고 해 보세요. 저들이 뭐라고 할까요? 아니 그런 것 말고 당신 하나님 사랑 받았느냐고 또 묻지요.
그렇습니다. 저들은 주님 사랑 받아 본 적이 없어요. 십자가의 도라는 것이 자기 구원을 위해 있다고 생각해요.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라고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을 몰라요.
그러니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니 덥석 이 말씀을 낚아 채 버립니다. 자기 소유화 시켜 버리지요. 그래서 자신이 살았다는 것을 자꾸 이야기 하는 겁니다.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자꾸 이야기 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분명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고 하셨는데도 여전히 자신은 지혜 있고 총명한 자라 우기는 겁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면 이 땅에는 어느 한명의 지혜자도, 총명자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도를 자기가 믿는다고 자신은 이제 지혜자가 되었답니다. 어리석은 자가 아니랍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미가야 선지자의 뺨을 칠자들이지요.
예수님을 믿는다면, 성령 받았다면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질문도 하시고 이런 질문 받으시지요.
어떻게 살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근거하면 멸망 받아 마땅한 자임을 십자가 앞에서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서 나는 어리석은 자임이 늘 발각되면서 살아갑니다. 이런 자들이 십자가의 능력을 제대로 입은 자요 구원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십자가가 지혜가 되었고, 십자가가 총명이 되었어요. 그러니 교회에서 권력을 휘두릅니다. 누가 누가 잘났나 대회 하는 장소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누가 더 큰 교회 다니는가? 누가 교인수 더 많이 끌어 모으는가? 누가 더 비싼 예배당 짓나? 누가 더 전도 많이 하나? 누가 더 헌금 많이 하나?
많이 모으고, 많이 하고, 비싸게 지으면 지혜 있는 자가 되어 버립니다. 노아처럼 자기 가족, 자기까지 포함에 여덟 명만 전도한 사람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스데반처럼 설교한번 제대로 하고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창기와 세리는 설자리도 없습니다. 돈 없으면 실패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의 지혜나 총명을 폐해 버립니다. 이 세상의 지혜와 총명을 폐했다는 말은 이 세상의 지혜와 총명으로는 지옥 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몸이 늘 이 세상의 지혜를 요구하고, 이 세상의 총명을 요구해 끌고 가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자가 저입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십자가의 피가 아니면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자살해서 지옥가야 하는 그런 인생임을 고백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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