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린도전서1장10-12
말씀은 항상 우리의 본능을 자극합니다.
제발 우리 가정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했으면 좋겠다. 우리 교회가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했으면 좋겠다는 욕구를 자극하여 그렇게 되고 싶어 합니다.
칼빈은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자신을 지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화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역시 우리를 자극하지요.
만일 우리가 이렇게 듣고 해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석할까요?
분쟁을 일으킵시다라고 해석해야 할까요?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말씀을 듣는 태도가 항상 이러합니다.
자기 자신이 말씀에 대해 주도권을 행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도 자신이 부른다고 생각합니다.
분쟁이라는 것의 출발점이 여기입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반드시 자신을 위해 모든 것들이 존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에 대한 사건이 나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를 여호와께서 제공하셨습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만일 아벨과 그의 제물도 받지 않으셨다면 가인이 몹시 분낼 이유가 없지요.
여러분이 가인이라면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똑같이 첫째 아담 안에서 태어났는데 저 사람은 천국가고 나는 지옥 간다. 그러면 여러분 기분이 좋겠습니까?
지금 가인이 그것을 경험합니다.
창세기6장8절을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라고 나오지요.
노아와 그의 가족이 구원을 받은 이유가 오직 이 이유 하나 때문입니다.
당대의 의인이라는 것도 그 후 그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었다는 말씀이 나오지요.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세리와 창기인데 예수님이 찾아 구원을 베풀어 주신 겁니다.
그렇다면 그 주변에 살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어떤 반응을 일으킬까요?
최근에 나온 노아라는 영화를 보면 그 당시 노아외의 사람들은 완전히 폭력 군들로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당시를 보면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강도나 악행을 일삼는 자들이 아닙니다. 물론 그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율법을 지키는 자들 성전 중심으로 생활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아무리 비교해서 자신들의 행실이 노아보다 못하지는 않는데, 물로 심판 받는다. 이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분쟁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값어치가 있다고 여길 때 나옵니다.
가인이나 아벨의 경우 둘 다 첫째 아담 안에 있기 때문에 지옥가야 마땅합니다. 생명나무와는 영원히 단절된 상태로, 저주받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결정에 대해 기립박수를 보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여호와 하나님의 결정은 정말 지당하십니다. 전 마땅히 지옥가야 합니다. 아벨을 영생으로 인도하신 것은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이렇게 나와야 정상 아닙니까?
물론 이 땅에 정상인은 없기 때문에 이럴 인간 없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나오면 정신 나간 사람취급 받겠지요.
고린도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 발생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누구에게 소속되었다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이 그렇게 잘났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목사들끼리 만나면 묻는 것이 어느 신학교 나왔습니까? 어느 교단입니까?
교인들끼리 만나면 어느 교회 출석합니까?
이런 질문을 하지요.
십자가만 자랑합니까? 오늘도 주님의 피공로로 살아갑니까? 이런 질문하지 않지요. 이런 질문하면 큰 실례입니다.
그 소속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자기 잘남을 말해 주지요. 자기 잘났다는 것이 아니면 왜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고 할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실 때 꼭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일을 하십니다.
민수기16장을 봅시다.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서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1,2)”
왜 고라가 당을 만들었습니까?
기분 나쁩니다.
똑 같이 레위의 자손들인데 자신들이 하는 일은 폼이 나지 않아요.
9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고라당이 볼 때에는 자신들이 하는 일이 작은 일이에요.
천국 가는 것 별거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영생 얻는 것이 아주 사소한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십자가의 피로 죄용서해 주시어 주님 증인으로 삼았다는 것이 얼마나 시시해 보입니까?
실제 우리 몸이 살아가는 현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는 주장을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네 인물 모두가 무엇을 전하는 사람들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전했지요?
그런데 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라고 주장하면서 당을 지을까요?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 모두 보통 인물들이 아니지요.
이들은 오직 십자가 피만 증거한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도 나오잖아요. 이렇게 자신들이 이런 인물들에 소속되었다고 하면서 노리는 바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정통이다. 이걸까요? 정통이라 주장해서 노리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어도 난 너한테 밀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는 이목사에게 배웠다. 난 김목사에게 배웠다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십자가에 피 흘리심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할까요?
절대 아닙니다.
나는 누구에게 소속되었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이 소속된 것을 자랑하는 겁니다.
즉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 분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 사도바울이 말하는 주장이 고린도 교회에 들어가게 되면 또 다른 파가 하나 생기지 않겠습니까?
사도바울의 말을 듣자는 파, 그리고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이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겉으로 보게 되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것은 분명 하나의 당으로, 파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안디옥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해 버리잖아요.
분쟁하지 말라고 해 놓고 지금 사도바울이 분쟁을 더 일으키고 있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논리가 바로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논리이지요.
그러나 지금 바울은 분쟁을 일으키면서 십자가의 피를 전하고 있습니다.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는 말은 곧 분쟁을 일으키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들이 갖는 것은 분쟁 없는 교회, 싸움 없는 교회, 조용한 교회, 단합 잘되는 교회,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교회를 꿈꿉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분쟁을 일으키라는 말씀은 절대로 들리지 않습니다.
물론 분쟁을 누가 일으키겠습니까? 오늘 본문처럼 주님이 일으킵니다.
마태복음10장34-39절을 봅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분쟁은 주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 분쟁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일으키는 분쟁은 자기 목숨을 얻기 위한, 자기 이름을 위한 분쟁입니다.
가족끼리 분쟁하는 이유가 자기 목숨을 주님을 위해 잃어버리기 위해 분쟁합니까 아니면 자기 이름을 위해 분쟁합니까?
내 이름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싸우잖아요. 왜 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말을 할까요?
이 이름 속에 자신이 숨어 있어요. 이 이름 뒤에 숨어서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자기 생명을 얻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고린도교회에서의 분쟁도 주님께서 일으키셨습니다.
주님께서 분쟁을 일으키셔서 도대체 무엇을 얻으시려고 하실까요?
그것은 오직 주님의 피만을 높이기 위해 분쟁을 일으키시는 겁니다.
우린 본능적으로 누구에게 속하고 싶어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위해 당을 짓는 자에게 주님의 이름이 시속 일천 킬로미터로 와서 쾅 부딪칩니다. 이 자리에 주님의 피가 드러납니다.
아무리 하나 되었다 우겨도 하나 될 수가 없어요. 한마음 되려고 해도 될 수가 없어요. 몸이 있는 한 몸의 본능이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몸이 하나가 아니도 둘이고 셋인데 어떻게 하나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가 되네요. 어디에서?
십자가에서 하나가 됩니다. 이것은 마치 한 여름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번개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섬광이 번쩍하는 그 순간만 하나가 되네요.
돌아서면 또 자기 이름을 위해 발광하는 자들이 우리들입니다.
사도바울을 통해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한다고 하십니다.
우린 자꾸 나의 이름으로 살려고 해요. 성도에겐 자신의 이름이 없어요. 주 예수의 이름만 있어요.
성도가 살아가는 것은 주님의 이름이 살려주는 삶을 사는 겁니다. 그 삶은 다름 아닌 분쟁가운데 피만 증거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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