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2

푸른 섬 2014. 8. 17. 19:33

항상 하나님께 감사의 대상이 되는 교회

고린도전서14-9

메슬로우라는 심리학자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인간의 욕구는 5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단계가 생존의 욕구이며 둘째 욕구가 안전의 욕구입니다. 그 다음은 소속의 욕구이고 그 다음이 자아존중, 그리고 마지막엔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다고 합니다.

 

들어보면 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내용이지요.

 

재미있는 사실은 인간들이 자아실현의 욕구를 가장 상위층에 두고 그것을 위해 살아간다고 하지만 하위에 있는 4단계의 욕구는 항상 결핍상태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었어도 이 욕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요.

 

나의 생존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신은 신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대표적으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려고 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우선시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광야로 내몰린 상황에서도 그들에게서 있어서 여호와는 생존케 해 주실 때 만 믿을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한 단계 올라가게 되면 안전성을 요구합니다. 생존에 급급한 것이 아니라 늘 물이 공급되고, 늘 양식이 공급되고, 늘 고기와 마늘이 공급되며, 적들이 없는 광야를 원했습니다.

 

변화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생존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라면 싫어 할 겁니다.

 

그런데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을 생존으로 본다면 생존된 상황이 안전한 상태, 더 이상 불안함이 없는, 고정된 상태를 원합니다.

 

사람들이 구원파를 왜 좋아합니까?

왜 그곳을 따라갈까요?

그것은 구원에 대해 안전성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기존교회를 다니면 구원이 왔다갔다 해요. 그런데 구원파는 더 이상 죄와 상관없다고 해 버립니다.

의인으로 산다는 겁니다.

매력 있지 않습니까?

 

기존교회는 늘상 죄인이라 했다고 의인이라 했다가 도무지 일관성이 없이 설교합니다.

앉아 듣는 자는 고정성을 원하는데. 확보된 구원을 원하는데.

 

그래서 교회에서 확보된 구원을 제공하기 위해 행위를 주장합니다.

십일조하면, 주일성수하면, 전도하면, 새벽기도하면 등등으로 구원이 확보된 상태로 미혹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문제는 어느 순간 자신이 이것들을 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립니다.

 

구원에 대한 확실성이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너무나 중히 여깁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천국백성이라 확신했습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러했습니까?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당연히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혈통 만으로만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도 지켰기 때문에 더더욱 자신들은 이 땅에서 복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들을 보면 꼭 구원파 같아요.

이들보다 더 구원에 대해 확신한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 확실성을 단번이 부정합니다. 바리새인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들의 영생에 있었습니다.

물론 이 땅에서의 축복도 구약율법대로 당연히 따라 온다고 생각했고요.

 

그들은 여호와께서 말씀을 주신 이유가 자신들을 축복하고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축복과 영생에 대한 확실성을 메시아가 오면 이런 자신들을 당연히 인정해 주고 지지해 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기름부음받은 자가 오셔서 이들의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안전성을 결코 포기 하지 않습니다. 그 안전성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립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고린도 전서를 읽어 보신 분이 있으시지요. 읽어 보신 분이라면 고린도 성도들에 대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표현이 나올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고린도 성도들에 대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해 놓고 그 말이 끝나자 말자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잖아요. 분쟁이 있다고 지적질 하잖아요.

 

우린 어떨 때 감사합니까?

자식이 다쳤을 때 감사합니까? 돈 많이 벌었을 때. 사업이 망했을 때, 갑자가 내 주변에 아주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자녀가 상을 받아왔을 때.

 

어떨 때 감사합니까? 출장 갖다 무사히 돌아 왔을 때 감사하지요. 제가 너무 수준을 낮게 보았습니까?

 

고린도교회 상황을 보게 되면 도무지 이들에 대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 내용이 없어요.

조금, 아니 가끔 감사한다고 하면 그럭저럭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고린도 전서 내용을 모른다고 치면 고린도 교회에 대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을 때 그 다음 내용이 어떤 내용일까요?

여러분이 편지를 쓴다면 어떻게 쓸까요?

 

서로 분쟁이 없고, 오직 말씀대로만 살아가는 자들, 술취하는 자도 없고, 은사를 받았다고 자랑하지도 않고,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는 성도들을 칭찬하는 내용들로 가득차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잘못 말했습니까?

 

예를 들면 부모님께 감사한 내용을 적어라고 하면 어떤 내용을 적습니까? 키워주셔서, 아니면 잘못 갈 때 혼내 주셔서 바른길로 가게 하셔서 감사하다라고 적잖아요.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그들이 잘못된 길에서 돌아왔다는 내용이 없어요. 분쟁을 그쳤다는 내용도 없어요.

그들이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 증거했다는 말도 없어요.

그들이 사도바울의 말을 듣고 오직 주안에서 자랑했다는 말이 없어요.

 

그러니 4절에서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씀은 뭔가 문제가 있는 말씀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사도바울이 쓴 편지를 읽고 그들이 다 회개할 것이라는 확신 속에 편지를 그렇게 썼다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제가 오늘 설교를 통해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은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를 읽고 들으면서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려고 해요.

 

자신은 고린도 교회처럼 분파 만들지 않고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으로 살려고 결심합니다.

자신을 고린도 교회와 다르게 만물의 찌끼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자기 마음 먹은 대로 됩니까? 자기 몸을 자신이 조절할 수 없어요.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늘 자신이 왕 노릇해야 합니다. 그러니 만물의 찌꺼기처럼 대우 받는 것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만물의 찌끼처럼 되어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자리로 올라가 버립니다.

 

안전성이라는 것을 찾을 수가 없어요.

 

차라리 구원파처럼 노골적으로 구원은 이미 확보 했으니 이 땅에서 돈이나 맘껏 벌자하면 속편하지 않겠습니까?

죄가 되는 것이 없으니, 사기를 치든, 어떻게 하든 문제 되는 것이 없어요.

사람을 죽여도 문제 될 것이 없어요. 자살해도 문제가 안돼요. 오히려 이게 안전성을 주는 교리잖아요.

 

항상 감사하는 이유를 한번 볼까요?

5-7절입니다.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그런데 고린도 전서를 읽어보면 고린도교회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도 바울이 거짓말하는 겁니까?

 

8절을 보면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아마 안전성을 꿈꾸는 자들은 이 본문을 이렇게 해석할 겁니다.

성화론 자들이 주장하듯이 주님께서 비록 지금은 개판이지만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워주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지금은 엉망이지만 사도바울의 편지를 받고 회개해서 심판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워주실 것이라 생각할 겁니다. 물론 주님이 하신다고 하지요.

 

그래야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씀과 논리적으로 맞아떨어지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기대한 우리들에게 그렇게 되었다는 성경말씀이 없어요. 고린도교회가 사도바울의 말을 듣고 회개한 자들은 정말 심판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섰다라는 말씀이 없어요.

 

그러니 목사들이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이미 본인의 결론을 갖고 하나님 말씀을 대합니다.

 

그러니 외치는 것이 우리에 대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가 넘치는 교회가 됩시다라고 외치지요.

 

그러나 사도바울을 통해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은, 감사는 항상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대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한 말은 사도바울은 교회를 주님이 세우신 교회를 두고 말하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는 겁니다.

주님의 피로 세운 교회는 예수님이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을 봅니까? 자꾸 사람을 봐요. 사람을 보니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지 않아요. 그러니 보충해야 되는 것이 많아요.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도 바울이 보기에는 주님의 몸된 교회로 보입니다.

 

7절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너희가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너희를 창조 하신 분은 십자가 지신 주님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주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눈에 보이는 고린도 교회는 이와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씀과 눈에 보이는 고린도 교회가 어떻게 일치되는 말씀이 될까요?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 모든 은사는 오직 십자가의 피만을 증거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모든 것, 즉 주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통해 고린도 교회는 십자가의 피만을 드러내는 자로 살아가는 자들임이 드러나지요. 다르게 표현하면 성령 받은 자들은 오직 십자가 지신 주님만을 증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증거라는 것은 우리들 생각에는 방언한다. 병 고친다. 성경 잘 가르친다. 한마음 한 뜻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증거란 십자가의 피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의 심판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선다는 말씀은 십자가의 피만 전한다는 말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십자가에 피 흘리신 분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전했습니까?

제대로 개판 치면서 전했다는 겁니다.

 

누가복음512-1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병 들린 사람, 즉 문둥병환자를 고치신 내용이 나옵니다.

문둥병환자는 구약성경을 보면 죄인입니다. 부정한 자입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십자가의 피능력을 제대로 증거할 자로 이런 죄인을 선택하셨습니다.

 

죄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증거나 나올 수 가 없습니다.

9절을 봅시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우린 주님과 교제한다고 했을 때 무슨 생각을 합니까?

이제 안전권에 들었다. 주님과 교제하니 주님과 대등한 관계에 올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과의 교제는 십자가의 피와 만나는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람과의 교제는 대등한 관계가 될 때 이루어지지요.

그러나 주님과의 교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흘리신 피의 흔적을 듬뿍 담고 있는 자와의 교제입니다.

그 피를 제대로 증거하는 자들이 주님과 교제하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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