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와 십자가
고린도전서1장13-17
세례라는 것이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않습니까?
만일 중요하다고 한다면 세례는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만일 중요하지 않다면 세례는 받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28장19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분명 예수님은 세례를 베풀어라고 하지요.
이 말씀에 근거하면 세례는 반드시 베풀어야 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문제는 사도바울이 세례를 모든 사람에게 베풀었느냐입니다.
목사들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세례라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세례를 반드시 베풀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법에 세례를 꼭 베풀어야 한다고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도바울은 세례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라고 합니다.
17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라고 합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는데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명령을 위반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어요.
분명 세례를 베풀라와 세례를 베풀게 하심이 아니요는 반대개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이 잘못되었든지 사도바울이 잘못되었든지 둘 중 하나는 문제가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 편에 서서 사도바울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 하고 싶어 하겠지요.
성경을 문자대로 풀려고 하는 자들은 다 이런 결과에 빠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고린도 전서 1장의 말씀은 무시하고 오로지 세례 베풀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지키는데 목숨을 겁니다.
만일 이렇게 되면 고린도 전서 이 본문은 계시에서 탈락이 되어 버립니다.
저들 눈에는 마이너스 백, 땡, 탈락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도 이와 똑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민수기10장35-36절을 봅시다.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서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희생 피가 뿌려진 언약궤의 앞장섬은 곧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다주는 공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본문을 읽을 때 어떻습니까?
이것은 단순히 모세의 기도에 불과할까요?
실제로 여호수아 3장을 보면 언약궤를 앞장세워 나갈 때 요단강물이 끊어져서 요단강을 마른땅으로 건넜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리고성도 언약궤를 앞장세웠을 때 무너뜨렸습니다.
사무엘4장을 보면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이 나옵니다.
블레셋은 팔레스타인입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패했습니다. 죽임당한 군사가 사천 명 정도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장로들이 묘안을 떠올렸습니다.
언약궤를 떠올린 겁니다.
3절을 봅시다.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언약궤를 앞장세우면 원수들을 패하게 할 것이라는 모세의 기도가 떠올랐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언약궤를 앞장세워 블레셋과 전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승리하기는커녕, 원수를 패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언약궤까지 빼앗겨 버립니다.
여기에서 우린 이스라엘 장로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 말씀대로 언약궤를 앞장세웠는데 왜 전쟁에 패했을까요?
만일 우리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면 이스라엘 장로들의 생각에 동의했을까요 하지 않았을까요?
이스라엘 장로였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요?
동일한 결정을 내렸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인간들이 지어낸 말이 아니잖아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잖아요. 그렇다면 약속하신말씀대로 했으면 그 말씀대로 원수를 패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왜 언약궤마저 빼앗겨 버립니까?
사람들의 생각은 항상 이런 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면 그 말씀을 이용해 먹으려고 덤벼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용당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이익을 위해서 이용해 먹으려고 합니다.
언약궤는 언약궤의 일을 하지요. 만일 자신들이 블레셋에 패했다면 자신들이 지금 누구의 원수가 됩니까?
언약궤의 원수가 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블레셋이 언약궤 편에 섰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도 심판하시지요.
이스라엘 장로들은 언약궤는 여호와 하나님 편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언약궤가 자신들 수중에 있으니 자신들이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례는 분명 예수님께서 명하신 형식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명하신 세례를 주기만 하면 됩니까?
분명 주님의 영을 받은 사도바울은 자신을 보내신 것은 세례를 베풀게 하심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이미 알고 계시지요.
우리에게 사무엘상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용해 먹을 인간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세례를 이용해서 자기 자신을 섬기게 만드는 자들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앞당겨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겁니다.
자신이 누구에게 세례 받았느냐를 이용해서 자신의 잘남을 자랑하겠다는 겁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자신이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느냐를 가지고 자신이 세례 베푼 자들을 자신의 종으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표현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세례, 복음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말의 지혜,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단어를 집어넣습니다.
세례라는 것은 말의 지혜에 해당되고,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왜 세례를 말의 지혜로 표현할까요?
만일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명하신 세례를 베풀라는 말씀이 말의 지혜에 해당됩니다. 그런 느낌 들지 않습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말의 지혜에 해당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상관없는 것이 됩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압니다.
세례라는 형식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내용이었던데 인간들은 이 세례라는 형식을 말의 지혜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말의 지혜로 바꾸었다는 말은 성령을 받지 않아도 얼마든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고 수용이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세례 받으면 구원얻습니다라고 하면 사람들이 구원받기 위해 세례 받지 않겠습니까?
구원받기 얼마나 쉽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얻습니다라고 하면 사람들은 그래 내가 예수님을 믿지. 믿으면 되지. 세례 받으라고 하면 세례 받으면 되지. 기도하라고 하면 기도하면 되지.
십일조하라면 십일조 하지. 감사하라고 하면 감사하지.
얼마든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즉 말의 지혜로 구원 얻는 길을 제시해 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당신은 세례를 베풀지 말라는 말이냐라고 반문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사도바울이 세례 베풀지 말라고 하는 겁니까?
아니지요. 말의 지혜로 하지 말라는 겁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라는 겁니다.
말의 지혜로 세례를 이해하게 되면 반드시 그 세례의 주체가 세례 베푸는 자나 세례 받는 자로 귀결됩니다.
이렇게 되면 누구를 자랑하게 될까요?
세례 베푸는 자나 세례 받는 자가 주체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항상 세례 베푸는 자나 세례 받는 자를 자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이용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언약궤가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주체가 되어 언약궤를 이용해 먹겠다는 겁니다.
세례를 이용해 구원 얻고, 세례를 이용해 이름을 날리고, 세례를 이용해 돈을 벌겠다는 것이 말의 지혜를 세례를 베푼 자들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만드는 겁니다.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분명 세례라는 것은 주님이 명하셨는데 그 세례 베푸는 것이, 받는 것이 말의 지혜에 해당된다는 말에 우린 충격입니다.
그렇데 놀라지 마십시오.
사도바울처럼 십자가, 십자가 이야기 하면서 그 십자가를 말의 지혜로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말의 지혜의 결정적 증거물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지요.
바로 조직 만들기입니다.
나는 누구누구를 중심으로 한 조직, 즉 교회를 만들겠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처음부터 말의 지혜를 원했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말의 지혜라는 것은 나를 인정해주고 나를 지지해 주고, 나를 높여주고, 내가 꿈꾸는 것을 제공해 줍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용당할 생각은 하지 않고 십자가 복음이라는 것을 이용해 힘을 만들고, 조직을 만들고, 권력을 만들고, 결국 돈벌이에 나서게 됩니다.
종교놀이에 들어가게 되지요.
기원전 1500년 경 인도에 브라만교가 시작되었는데 지금은 불교나, 힌두교나 지나교로 나누어졌습니다.
브라만계급 즉 브라만(사제), 크샤트리아(무사), 바이샤(상인), 수드라(노동자) 계급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주목할 것은 브라만 계급인데 이들은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독특한 것은 신들이 브라만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이용해, 십자가를 이용해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꿈을 이루어주는 것으로 사용할 뿐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열심히 전하면 마지막에 사람들이 하는 질문은 이런 겁니다. 당신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신앙생활을 어떻게 합니까?
다르게 표현하면 삶의 모범이 됩니까라는 질문이지요.
십자가지신 주님만 높이려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고 전해도 그들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본성을 여지없이 발휘합니다.
선악과 따먹은 자들은 항상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면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효과가 미친다고 생각해요.
세례라는 것을 이용해서 세례와 다른 노선인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을 행하심을 전합니다. 그런데 세례 받으면 그것인 구원받은 증거물이라고 우기고, 세례를 이용해서 자신의 값어치를 높이는 이용물로 사용합니다.
성도는 세례가 되었든 그 무엇이 되었든 모든 것이 말의 지혜로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지 않도록 우리에게 주신 형식들, 보이는 구체적인 것들임을 믿으면 사는 자들입니다.
구체적인 형식이나 물질 등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십자가의 피 능력을 헛되지 않게 전하는 자가 주님의 백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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