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니다
고린도전서3:4-7
주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때 우리를 존중하며 사용하실까요 아니면 그렇지 않을까요? 인간은 하나님은 적어도 내 마음 같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상당히 컸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왜 컸을까요? 여러분은 어떨 때 큰 기대를 가집니까? 대기업, 그것도 남들도 다 가고 싶은 곳에 인턴까지 했다면 최종합격을 기대하는 것이 욕심일까요? 학벌이 떨어집니까 아니면 스펙이 떨어집니까? 물론 낙하산도 있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바가 없다면 사는 재미가 있을까요?
인간에게 소망하는 것이 없다면 아마 모두 자살하고 말 겁니다. 산 속에 들어가는 것도 뭔가 기대하는 것이 있는 것이고, 목사가 되는 이유도 뭔가 기대하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과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갈라집니다. 물론 중간 중간에 합류하는 것도 나타나지만 합류했다가 갈라졌다가 합류했다가 갈라졌다가를 반복하면서 처음 상태인 갈라짐 상태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제자들을 찾아 오셨지요.
주님께서 제자들을 일방적으로 부르셔서 제자를 삼았는데 제자들은 그 부르심이 자신들을 위한 부르심으로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희한한 상황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부르셨다면 제자들의 마음도 예수님의 마음과 일치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우리의 마음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지만 제자들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 좀처럼 하나 되지 못합니다. 아니 종국적으로 하나가 아니라 영원히 갈라져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르지요.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각자의 먹고 사는 터전에서 살았듯이 말입니다.
마태복음18장1절을 보게 되면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천국에서 누가 크냐고 묻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국에서 어느 대학이 제일 좋은 대학이며 어느 학과가 제일 좋은 학과입니까? 어느 회사가 제일 좋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솔직히 그 대학 가고 싶고 그 학과 가고 싶고, 그 회가 입사하고 싶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물론 실력, 돈, 빽이 없어 못가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제자들의 이 질문 속에는 이미 제자들 자신들이 답을 갖고 있어요. 예수님께 질문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갖고 있는 대답을 해 달라는 겁니다. 제자들은 어떤 대답을 원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같은 제자가 천국에서는 커지요라는 질문을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라는 질문으로 바꾼 겁니다.
천국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이렇게 열심히 따라 다니고 배우고, 시키는 대로 했는 우리가 천국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입장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 의견에 반대할 수 있을까요?
명문대학을 졸업했고, 성적도 우수하고, 스펙도 뛰어나고, 외국어도 영어, 독어, 일어, 중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이 그 회사에 합격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그곳에 들어가 회사에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준다면 그 사람이 진급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지요.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되지요.
예수님을 그 정도로 따라다녔으면 천주교처럼 베드로를 아주 높이 끌어 올려 주듯이 주님도 그렇게 하시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닐까요? 심지어 주님을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기까지 했다면 이런 사람이야 말로 천국에서는 아주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하는 것이 우리의 정서로는 맞아요.
제자들이 질문하는 의도가 그런 겁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높은 자리 차지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런데 어느 정도 높은 자리를 차지 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는 겁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이런 기대가 없었다면 벌써 예수님을 떠났을 겁니다. 물론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지 않게 하셨지요. 그래야만 제자들이 마귀와 한 통속임을 제대로 보여주는 역할을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제자들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먹었지요. 왜 팔아먹었습니까? 예수님을 실컷 따라 다녀 봤는데 은 삼십 냥 가치밖에 안 되는 그런 인간이더라는 겁니다. 예수라는 자와 결별을 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따라 다닌 것이 억울한 겁니다. 그러니 은 삼십 냥이라도 챙기고 예수를 떠나겠다는 겁니다.
그 정도의 값은 받을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는 겁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목숨이 중요하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은 아무런 값어치가 없어요. 이런 꼴 당하려고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 아니라 말입니다.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 보세요.
욥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욥이 아주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야고보서에서 욥의 인내에 대해서 아주 극찬을 합니다.
욥은 자신의 자식과 재산을 한꺼번에 잃었을 때에도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신다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고 말입니다. 참으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만일 이런 일을 당한다면 하나님을 저주하고 자살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재산이 조금 있는 것도 아니고 동방의 거부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온 몸에 종기가 났습니다. 가려서와 기왓장이 아니면 도무니 그 가려움을 해결할 길이 없는 지경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욥은 자신이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이유를 모른다고 합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와서
욥의 죄로 인해 벌을 받으니 회개하라고 말할 때에도 욥은 여전히 자신은 의롭다고 말을 합니다.
욥에게 있어서 재산을 잃거나 자식이 죽는 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감사함으로 넘어갈 수 있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몸에 일어난 문제에 대해서는 감사가 나오지 않고 오히려 의문만 쌓입니다. 친구들은 욥을 더욱더 자극하고, 욥의 끊임없이 입에서 말을 쏟아 냅니다.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쏟아냅니다.
욥이 왜 이런 식으로 말을 할까요? 문제는 자신의 몸에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온 몸에 종기가 나지 않았다면 결코 이런 소리가 나오지 않겠지요. 다르게 표현하면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라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입니다.
욥이 엄청난 말을 쏟아 내지요. 자극하면 할수록 말을 쏟아냅니다. 아마 엘리후가 말했을 때에도 하나님이 그때 나타나시지 않았다면 또 말을 쏟아 냈을 겁니다. 나름 지혜롭다고 하는 지혜자들이 자신의 지혜를 모두 동원해 욥이 고난당하는 원인에 대해 지적합니다. 그러나 욥도 여기에 지지 않습니다. 나는 너희들의 지적한 그런 죄인이 아니라 의인인데 왜 이런 고난을 당하는가라는 입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입니다. 마태복음15장11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셨을 때 욥이 취한 태도는 어떤 태도입니까? 하나님께 따집니까?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하는 것들을 입으로 쏟아 냅니까? 그렇지 않지요.
손으로 입을 가릴 뿐입니다. 회개할 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욥에게 지적하신 것은 네가 내가 하는 일을 아느냐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네가 심판주가 될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질문이 좀 유치하지 않습니까? 타조가 알을 땅에 버려 모래에서 더워지게 할 때 알이 발에 밟혀 깨어질 수 있고 들짐승에게 밟히는 것을 생각지 못하고, 새끼에게 무정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여 구로한 것이 헛되게 되어도 관심 없는 이유를 아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타조를 어리석게 만들고 지혜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릴 때는 또 다르다고 하신다.
그 이유를 욥이 알까요? 모르죠.
이 땅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그 일이 왜 일어나는가를 아는 인간 있을까요? 그런데 인간들은 안다고 생각하지요. 나름 지혜롭고, 나름 똑똑하고, 나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욥이 그러했고,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도 그러했습니다. 욥이 하는 말을 들어 보거나 아니면 욥의 세 친구나, 젊은 지혜자 엘리후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들은 나름 자신이 가치 있는, 의미 있는 존재라 생각합니다.
제사 제대로 드리면, 가정에 저주에 내리면 안 된다 생각합니다.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의로운 일을 하게 되면 문제가 발생하면 안 된다 생각해요. 왜 이런 생각을 할까요? 그것은 자신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이 땅에서 말하는 그러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대가를 기대하는 것이지요.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아담이기 때문에 선악 기준에서 축복과 저주를 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선한 자에 속한다면 반드시 축복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지요. 엘리후가 오히려 욥에게 네가 그런 고난당하는 것이 축복이다라고 했으면 어떨까요?
욥기에 나타나는 땅의 인물들은 욥 자신을 포함에 욥이 축복의 기능을 함유한 자인지를 그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늘에서 의논된 상황이 땅에 그대로 적용될 때 땅에 사는 인간들은 그 의논을 전혀 모릅니다. 물론 동물들, 식물들, 별들은 알아요. 모르는 자는 오직 인간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을 불렀는지 제자들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가치 있는 존재라 생각했고 그에 걸맞은 대우를 생각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다고 하니 하나는 팔아 버리고 하나는 모른다고 저주 맹세까지 한 겁니다.
자신의 가치가 추락하게 된다면 삼년이 아니라 삼십년을 예수님을 따라 다녀도 얼마든지 팔수 있고, 모른다고 하며 저주할 수 있는 겁니다.
욥이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고난 받는 자가 곧 중보자가 되신다는 겁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고난이 새로운 고난으로 진입되는 것도 보여 줍니다.
이렇게 고난 받는 자가 자신을 비난한, 자신을 죽인 자들을 위해 중보기도 하셔서 그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심을 보여주는 역할을 욥이 하는 겁니다.
욥의 가치는 이것을 보여 주는 역할을 부여 받았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철저하게 가치 없는 자로 드러나야 하는 겁니다. 심지어 그가 아무리 의인이라고 불려도, 하나님이 의롭다 해도, 누가 보아도 축복받은 자라 평가를 하더라도 가치 없는 존재임을 제대로 부여 주면서 정말 가치 있는 분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3장7절을 보면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고 합니다.
이 말씀을 그냥 읽으면 우리가 얼마든지 아멘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심는 자가 누굽니까? 물주는 자가 누굽니까?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베드로입니다. 욥입니다. 엘리야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얼마나 가치 있는 인물들입니까?
여러분이 보기에 이런 사람들 어떻습니까? 대단합니까 대단하지 않습니까? 대단하지요. 그러면 이들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큰 자일까요 작은 자일까요?
대부분 사람들은 큰 자가 아닐 것이라 생각하면서 큰자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자신을 그 자리에 넣어 봅시다. 돈 많이 벌고, 자식 잘 키우고, 큰 집 사고, 비싼 자동차 굴립니다. 만일 이러한 사람이면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길까요 아닐까요?
아니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그냥 겸손을 떠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모든 것이 헛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반드시 욥처럼, 예수님의 제자처럼, 바울처럼 하는 자로서 아무것도 아닌 자로 드러나야 하는 겁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 사마리아 사막에 가서 도를 닦고 있었다면 아무것도 아니요라는 말이 어떤 의미로 와 닿습니까?
그야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자기 백성을 반드시 바울과 같은 자리로 몰아 갑니다.
욥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회개 했지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무것도 아닌 자로 주님을 만났을 때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특한 것은 나름 의롭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가치 있다는 상황에서 주님을 만난 겁니다. 욥의 세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반드시 이것에 대해 신이 축복된 결과를 주어야 진짜 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린 이 땅에서 수고하여 돈 버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나의 것이라 생각해요. 그런데 주님이 묻습니다.
“내가 돈 벌게 하는 이유를 아느냐?” , “내가 돈 벌지 못하게 하는 이유를 아느냐?” 여기에 대해 우린 뭐라고 답변할 거
니까?
나름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돈 벌게 하시고, 돈을 못 벌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욥의 세 친구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이야깁니다. 그런데 그들이 못하는 말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회개하는 것을 못합니다.
돈 벌면서, 돈 못 벌면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데, 돈 벌고 못 벌면서 십자가 지신 주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 버립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자기 자신을 만납니다. 그러니 얼마나 할 말이 많겠습니까?
감사한 마음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나와야 하는데, 십자가 앞에서 헛되고 헛되다가 나와야 하는데 끊임없이 헛되지 않아, 헛되지 않아라고 우깁니다.
교회에 가면 사람들이 많은 말을 합니다. 무슨 말을 할까요? 나도 이렇게 가치가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내 뱉는 겁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직장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시부모님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시댁과 관련 없이 살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재택크를 잘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취직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사람관계를 문안하게 할 수 있는지 이런 이야기로 가득 채워집니다.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지? 인간의 지혜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면 이들에게 물어 봅시다.
왜 좋은 직장을 찾으려는 마음을 주셨는지를 아느냐? 왜 가난을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하는지 아느냐? 왜 건강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하는지 아느냐?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은 모릅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지혜에 지혜를 더할 뿐입니다.
그런데 성령 받은 자들은 땅의 지혜에 지혜를 더하면서 십자가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합니다.
죄인중의 괴수입니다라고 터져 나옵니다.
성도는 이미 천상회의를 아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천상회의를 알더라도 여전이 우린 관성을 갖고 평소에 사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주님의 영이 천상회의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십자가만 눈앞에 보이게 하십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만나도 감사함이 터져 나오게 하십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감사함이 터져 나온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늘 감사하는 줄 아는데, 그렇게 산다면 그 사람이 메시아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일들을 주님께서 자꾸 일으키시면서 주님은 자기 백성을 주님의 몸으로서 십자가만 증거하는 자로 창조하십니다.
이 새로운 창조 속에 성도가 담겨 있습니다.
새 창조 속에 들어 있는 성도는 무슨 일을 하든지 아무것도 아니요가 터져 나옵니다. 열심히 성경공부하면서, 기도하면서, 돈 벌면서, 자식 키우면서, 운전하면서, 승진하면서, 많은 돈을 벌면서 아무것도 아님을 오히려 감사하는 자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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