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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3장9
모든 것이 주님으로 인하고,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고, 모든 것이 결국 주님께로 돌아가게 위해 세상이 만들어 졌습니다. 이 땅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주님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욥이 몰랐던 것이 이 부분인 것들, 전혀 나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그 일이 그 자신과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모든 것이 주님을 위해 만들어졌다면 타조가 이런 반항을 할 수 있겠지요. 나는 왜 슬기롭지 못하게 만들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타조라면 이런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타조는 이런 소리를 하지 않고 주님의 뜻을 따라 묵묵히 자기 길을 갈 뿐이지요. 문제는 인간입니다. 인간은 만들어진 대로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가인의 가장 큰 불만은 내 곁에 왜 아벨 같은 인간을 배치해 두셨는가입니다. 만일 아벨만 가인 옆에 배치해 두시지 않았다면 아벨을 죽이는 일을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만을 없애는 방식으로 아벨을 죽였습니다.
아벨이 없어지니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지만 이제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것쯤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견딜 수 없는 것은 땅에서 떠돌 때 남들이 나를 죽이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합니다.
가인이 처음 살인을 저질렀지요. 그런데 아벨을 죽인 가인은 자신 만큼은 아벨 같은 죽음을 경험하기 싫어합니다.
땅에서는 이미 가인 같은 자들이 쫙 깔렸다는 것은 가인의 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신이 죽인 아벨의 죽음처럼 그 죽음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싫습니다.
가인의 말에 대해 하나님의 응답은 어느 누구도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한 가인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어주어야 우리 속이 시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도 가인을 죽인지 못하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성도들이 받는 것과 같은 표식을 가인에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인은 에덴동편 놋 땅에 자신의 아들이름의 에녹성을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엔 도무지 이해가 도지 않는 처사입니다. 회사를 이용해 회사에 손해를 끼친 자는 회사에서 잘라 버리고, 회사에 유익을 가져다 준 사람은 차장으로 승진시키는 것이 누가 보아야 기분 좋은 일이잖아요.
만일 회사에 이익을 준 사람이 회사에서 잘렸다고 해 보세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 제사를 제대로 드린 아벨은 죽었고, 아벨을 죽인 가인은 우리가 동경하는 멋진 성을 만들었습니다.
이게 남 이야기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되지요.
여러분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 보세요. 여러분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요?
세상은 실제로 우리가 바라는 대로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통령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어요. 내가 바라는 팀이 우승할 수도 있고 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내가 원하는 사람, 내가 원하는 팀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못하면 우린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대한민국국가대표팀에 박주영이라는 사람이 뽑혔습니다. 과거엔 축구천재로 불렸고 엄청난 인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좀 못하니 인터넷에 글쓰기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박주영을 뽑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슈텔리키 감독이라는 사람이 중동 평가전에 뽑았어요.
박주영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그 뽑힌 것이 그리 기분 나쁠 겁니다. 반대로 좋아한 사람이라면 기분이 너무 좋을거에요. 거기에도 한 골을 넣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인간들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가 좋아하는 사람은 무조건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무조건 싫어요. 이건 조건이 없어요.
문제는 좋고 싫음이 내 스스로 통제가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하는 상황이 꼭 이런 식으로 돌아갑니다.
여러분은 어떨 때 기분이 나빠집니까? 내가 뭔가 부족한 것도 없는데 나보다 못한 사람이 돈 많이 벌었다든지 아니면 자녀가 나보다 좋은 대학을 갔을 때 기분 나쁘지요.
그런데 더 기분 나쁜 것은 주님이 그런 식으로 배치했다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우린 또 우리 자신이 주님이 되려고 덤빕니다.
그럴 것 같으면 공부하지 말고 주님이 배치하신 대학으로 곧장 가면 되겠네요라고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공부하지 않았으니 대학을 떨어지게 하는 배치를 해 버립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주님이 되려고 하지 마세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누구나 욥처럼 그런 상황을 맞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스데반집사님과 베드로, 바울 모두 달라요. 우리도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지만 생김새도 다르고 남편도, 아내도 다 달라요. 자식들 생김새도 달라요.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타인이 나보다 나아 보이기 시작할 때입니다. 타인이 나보다 나아보이는 순간 불평불만이 터져 나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모든 일들을 주님께서 배치하신 것이라고 한다면 더욱더 기분 나쁘겠지요. 나를 이런 식으로 살아라고 주님 당신이 만들었습니까라고 따질 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다고 하니까 예수님께 막 달라 들면서 절대로 고난 받고 죽으시면 안됩니다라고 막아섰지요. 기껏 예수님 죽는 꼴 보려고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가지각색입니다. 천국가고 싶어서, 병 낫고 싶어서, 공부 잘하고 싶어서, 성공하고 싶어서, 시집, 장가 잘 가려고. 백 명이 모이면 백가지 이유가 나올 겁니다. 이런 자들에겐 공부 못하는 것, 성공 못한 것, 장가 못가는 것, 시집 못가는 것 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다고 하면 돌을 던질 겁니다.
자기 자신 원하는 것을 제공해 주지 않는 예수는 얼마든지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도는 예수님이 믿게 해 주셨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친히 부르셨듯이 그 방식은 비록 사람이 초대하고 소개하는 방식이었지만 주님이 초대하게 하셨고 주님이 소개하게 하셨고 주님이 믿게 하셨지요.
주님이 믿게 하셨다면 성도는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른 대우를 해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다른 대우를 하십니다.
욥을 보면 하나님께서 욥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모릅니다.
실제로 주님은 성도를 너무나 자랑스러워 하십니다. 주님은 성도를 너무너무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그 자랑 때문에 성도는 어떤 대우를 받을까요?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은 대우를 받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주님의 자랑거리로 부르셨다면 뭔가 특별한 대우를 해 주셔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특별대우가 아니라 오히려 이건 누가 보아도 사람을 차별합니다. 어떻게 차별합니까? 부르심 받은 대로 살아라는 겁니다.
요한복음4장을 보면 사마리아여인이 나옵니다. 그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었고 지금은 여섯 번째 남자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여인은 자신의 과거를 살게 하신 주님을 원망했을까요 아니면 감사했을까요? 당연히 감사했겠지요. 주님께서 그런 인생을 살게 하지 않았다면 영과 진리의 예배의 의미를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누가 보아도 나쁜 여자인 사마리아여인이었기에 메시아가 하실 일을 가장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을 한 겁니다.
이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마리아 여인처럼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더라도 재벌 집안에, 교양 있고, 누가 보아야 구원받을 만한 고넬로 같은 사람처럼 되기를 원하지요.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었더라도 그 역할을 베드로나 바울 같은 역할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동일하게 부르셨지만 그 역할을 모두 다르게 하셨습니다.
교회 안을 예로 들면, 여러분들은 교회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있으나 마나한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당연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싶겠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역할을 다 다르게 맡깁니다. 역할을 다르게 맡길 때 주목받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당연히 목사, 장로, 집사나 헌금 많이 하는 사람들을 주목하겠지요. 교회재정에 있으나 마나한 사람은 주목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잘 가르치는 목사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목사도 있어요. 그러면 사람들은 당연히 말씀을 잘 가르치는 사람을 주목하겠지요. 오늘 본문의 상황이 이런 상황입니다. 물론 각 목사들의 팬클럽이 있어서 각 팬클럽들이 자기가 지지하는 목사가 최고라고 합니다.
어떤 역량을 쏟아내는냐에 따라 그 목사, 그 장로, 그 집사, 그 성도는 사람들로부터 인기가 많고, 그 사람처럼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처럼 존재감 없는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지 무시합니다.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차별의 모습이 부르심을 입은 자들 만에게라도 없어지면 좋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우리를 발작하게 만듭니다.
본성상 남과 비교할 수밖에 없고, 그 비교에서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타인이 가졌다면 그 타인의 것이 나의 또 다른 소망이 되어버리는 상황에서 주님은 왜 이런 마음이 애초에 생기기 않도록 우리를 부르시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는 자들의 모임을 보아도 뭔가 차별이 느껴져요.
좋은 대학 나온 사람, 좋은 집에 사는 사람, 좋은 자동차 타는 사람, 공부 잘하는 자녀 둔 사람, 대학 나오지 못한 사람, 월세 사는 사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 공부 못하는 자녀를 둔 사람 등등.
세상에서 통용되는 차별을 동일하게 두어야만 교회라는 것이 무엇이 다른가가 드러나게 됩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주님의 피로 사는 자들입니다. 부르심을 입지 못한 자들은 자신이 가진 것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주님이 흘리신 피를 증거하기 위해서 주님은 끊임없이 죄가 나오는 상황을 조장합니다.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나의 상황에 대해 불만을 갖는다는 것은 그분의 피 흘리심을 조롱하는 겁니다. 타인이 가진 것을 부러워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조를 보면서 한수 배웁시다. 주님은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에게 기뻐할 만인 이유가 있어서 일까요?
그건 기쁨을 제공하는 분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온 것도 잊어버리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이런 기쁨이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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