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강해 18

푸른 섬 2014. 12. 20. 15:44

헛것

고린도전서 3:18-20

하와가 뱀의 꾀임에 빠져 선악과를 딱 먹을 때 자기를 속인 일이라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그 일이 아주 지혜로운 행위라고 생각했을까요?

 

물어보는 제가 잘못이지요. 지극히 지혜로운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후 인간들의 모든 행동은 항상 자신이 하는 일이 지혜로운 행위로 생각합니다.

 

노아 홍수 심판때 심판받은 이유가 궁금하지요? 지금처럼 돈 벌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다가 심판받았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런 반박이 생길 겁니다.

 

목사님 이 땅에 살면서 먹과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파는 것 빼면 뭐가 남습니까?

이런 행위를 하지 않으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갑니까? 이 땅에서 살아가려면 반드시 돈도 벌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고, 결혼도 하고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 땅에서 지혜롭다는 것이 이런 것 아닙니까?

 

어느 누가 돈 벌면서, 시집가면서, 장가가면서 나는 나를 속이고 있어, 이건 가짜야, 이건 그림자야라고 할까요?

이 돈이 나를 살려 주지 못해. 결혼이 나의 기쁨이 되지 못해 라고 하는 사람 있을까요?

 

이 땅에서 사는 사람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 살고 있어요. 이게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다르게 표현하면 어떤 사람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속이면서 삽니다.

 

그런데 경찰 아저씨에게 한번 물어 봅시다. 경찰관 아저씨 아저씨는 아저씨를 속이면서 살고 있어요라고 해보세요.

선생님께 물어 보면 어떨까요? 선생님은 선생님 자신을 속이면서 살고 있어요 라고 하면 뭐라고 할까요?

 

나름대로 지혜롭게 살아가고 있어. 난 적어도 나 자신을 속이면서는 살지 않아라고 할 겁니다. 나름 지혜롭고 나름 정당하기 때문에 말을 하고 행동을 하지요.

 

자신이 하는 말이 바보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말이라면 바보가 아니고서야 어느 누가 그런 말을 내 뱉겠습니까?

 

 

민수기1124절 이하를 보면 모세에게 임한 영이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여 그들도 예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불린 자 중에 진영에 머물며 장막으로 나아가지 아니한 엘닷과 메닷도 예언을 했어요.

한 소년이 모세에게 이 사실을 고했습니다. 그러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그들을 금지하라는 명을 내리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 생각에는 호명을 받았으면 당연히 회막 앞으로 나아와야 하며 그곳에서 예언하는 것이 정상적이라 생각했습니다.

 

모세 혼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감당하기 힘들다고 하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한 칠십 명을 모아 회막에 서게 하라고 명했습니다.

 

여호와의 명입니다. 그런데 칠십 명 속에 이름은 올린 엘닷과 메닷은 회막으로 나아가지 않고 자기 진영에 머물렀습니다. 이건 누가 봐도 잘못된 행동이지요. 여호와께서 명하셨는데 거역한 겁니다. 모세의 명도 거역한 거지요.

 

그런데 이들에게도 모세에게 임한 영이 임했어요. 이럴 때 누가 가장 화가 날까요?

 

가장가까이서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가장 화가 나겠지요. 뭔가 원칙에 어긋나잖아요. 그런데 모세가 뭐라고 말합니까?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내가 뭔데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이 말입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데, 그림자에 불과한데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모세를 붙들고 있어요.

 

모세는 오히려 여호와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했어요.

실제로 모세의 기도가 이루어졌지요.

성도들이 모두 다 성령을 받아 선지자 되었잖아요.

 

물론 주님의 기도이지요. 모세가 주님의 역할을 보여주는 겁니다.

 

여호수아는 나름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어느 누구도 여호수아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같아도 그러지 않겠습니까?

 

주일날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돈 벌면서 십자가의 사랑을 더 깊이 알아 갑니다라고 해 보세요.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엄청 짜증납니다. 열 받지요. 그런데 주님은 꼭 그런 식으로 일을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주일날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이겠지만 주님은 오히려 주일날 모임에 참석한 사람에게도 죄를 깨닫게 해 주시지요. 자신의 행위가 은혜를 받는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는 그 죄를 깨닫게 해 주시는 겁니다. 주님은 이처럼 자기 백성을 사랑합니다.

 

여호수아가 툭 튀어 나옴으로 말미암아 칠십 명의 위상이 잘난 자의 위상이 아님을 분명히 알려 주십니다. 지도자로, 장로로 뽑혔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특별나게 다르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백성이 선지자 되는 과정에 칠십 명이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뭔가 백성들과 다르고 특별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모세와 동일한 영을 부어 주셨다는 증거물을 무효로 돌리는 겁니다.

 

애굽적인 생각이야 말로 가장 지혜로운 생각이라 여겼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생각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생각임을 알게 됩니다.

 

사무엘상28장에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렸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묻습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했습니다. 이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울왕은 신접한 여인을 찾았습니다. 무당을 찾은 겁니다.

 

사무엘이 죽었을 때 사울왕은 신접한 자, 박수를 이스라엘 땅에서 멸절시켰던 장본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말씀대로 살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씀대로 사는 환경이 조성이 안 됩니다.

 

여호와를 믿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기도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자신이 원하는 답을 여호와께서 주시지 않는 겁니다.

 

사울 왕이 왜 여호와를 찾을까요? 블레셋이 두려워서죠. 두렵지 않다면 여호와의 응답을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요? 무당을 찾을 이유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니 사울왕은 그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스스로 말씀의 위반자가 됩니다. 그렇게 해 봤자 여호와께는 그 상황을 그대로 이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사울 왕과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길 것을 말씀하십니다.

 

무당을 찾아 받은 응답이란 다름 아닌 멸망입니다. 멸망당할까 두려워 해 여호와를 찾았고, 응답이 없으니 다 답답히 무당을 찾았지만 그 대답은 역시 죽음입니다.

 

나름대로 지혜롭게 꾀를 내어 현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 보았자 그 결과는 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이런 식입니다. 늘 우린 지혜롭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나를 살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울왕은 자신의 그런 행동이 자신을 속이는 행동임을 몰랐습니다. 그것이 어리석은 행위임을 알지 못했어요. 그것이 지혜로운 행동이라 생각했어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헤롯왕은 유대인의 왕을 죽이려고 베들레헴과 그 지경의 두 살 아래 아이들을 몰살 했습니다. 헤롯은 나름대로 완벽한 방법을 실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헤롯위에 누가 계십니까? 주님이 계시지요. 땅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하늘 세계를 몰라요.

 

그러니 자신의 방식만이 가장 지혜로운 방식이라 생각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나름 지혜로운 자들이라 여기는 유대인들을 속이기 위해 예수님은 나사렛 동네에 가서 사십니다.

 

주님은 지혜롭다고 하는 인간들의 지혜를 이렇게 어리석게 만드십니다.

 

갈라디아서 1장을 보면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이 복음은 사람을 좋게 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사람을 좋게 하는 복음 이라면 이것은 사람의 뜻을 따라 사람에게 배운 복음이겠지요. 그러나 이 복음은 하나님을 좋게 하는 복음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겐 도무지 좋게 들릴 수 없는 복음입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짜증나는 복음, 들으면 들을수록 기분 나쁜 복음, 이런 복음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입니다. 그러니 인간들의 상식에 안 맞아요.

 

사람을 기쁘게 하는 복음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도 좀 그런 복음 듣고 싶지 않나요. 자신 잘되는, 승진하는 복음, 좋은 대학 가는 복음, 부자 되는 복음, 건강해 지는 복음, 이런 유의 복음을 듣고 싶잖아요.

 

맨날 죄인이라 하니 왕 짜증 납니다.

 

마태복음16장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알려 주셨습니다.

 

이 소리를 듣자마자 베드로고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왜 이렇게 베드로가 이 발악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죽어버리면 자신은 뭐가 됩니까? 자기 좋아라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는다면 어떻게 됩니다.

 

인간이 사탄임이 비로소 발각되는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기껏해야 살겠다는 것 외에 나오지 않습니다. 죽음 속에서 꽃피는 생명을 볼 수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것만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귀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사울 왕처럼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 되었든 부처가 되었던 상관없습니다. 나에게 좋은 응답만 주신다면.

 

그런데 이미 우린 사망이라는 것이 확정된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 너무 절망적입니까? 어린 아이들에게 너무 한 이야기입니까? 그러면 사망이 확정안 되었다고 말할까요?

 

그렇게 말한들 무슨 소용 있습니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졌고 그 후엔 심판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잖아요.

이미 사망이 왕 노릇 하고 있는 것을 눈으로 늘 목격하고 있잖아요. 물론 그 사망도 그림자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우린 그림자인 사망을 수시로 목격하잖아요.

 

이것을 목격하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결코 지혜로운 생각과 행동이 아님을 알게 해 주는 겁니다.

 

모든 사람은 스스로 속이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어느 누구도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이 말씀은 어느 인간치고 스스로 속이지 않는 인간 없다는 말입니다.

 

성도라고 해서 스스로 속이지 않을까요? 스스로 속이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일을 할 때 그 일이 나를 먹여 살린다고 생각하지 주님의 피가 나를 먹이고 살린다고 생각합니까? 하지 않잖아요.

 

공부하는 내가 열심히 해야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하지 주님의 피 능력으로 공부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니 시험 잘 보면 자기 공로라 생각하지 주님의 피는 자랑하지 않잖아요.

 

피아노 연주 잘하고, 바이올린 잘키는 것이 내 땀의 결과지 주님의 피 공로가 아니잖아요. 그러니 인간치고 스스로 속이지 않는 인간 없어요. 자신을 항상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라고 말입니다.

 

사람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는 이렇게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하는 자신이 보기에 정말 어리석은 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사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늘 어리석은 자가 되려고 애쓰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우린 우리가 하는 짓이 헛짓임을 늘 확인하며 헛짓을 하시기 바랍니다. 나름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헛짓이 아니라고 우깁니다. 십자가가 없는 그들에겐 그들이 하는 일이 결코 헛짓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모든 나름 지혜로운 행위는 헛짓입니다.

'고린도전서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린도전서강해 20  (0) 2015.01.04
고린도전서 강해 19   (0) 2015.01.04
고린도전서강해 16  (0) 2014.11.30
고린도전서강해 15  (0) 2014.11.24
고린도전서 강해 13  (0) 2014.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