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19

푸른 섬 2015. 1. 4. 12:30

사람 자랑

고린도전서321-23

창세기 11장에 보면 바벨탑 사건이 나옵니다. 인간들이 하늘에 닿는 성을 쌓겠다는 이유는 자기들 이름 때문입니다. 자기들 이름이라고 하면 별로 와 닿지 않지요. 내 이름입니다. 여러분 각자의 이름 때문에 하늘에 닿는 성을 쌓겠다는 겁니다. 우리가 보기에 공연한 짓이잖아요. 아무리 높은 성을 쌓아 본다고 한들 어떻게 하늘에 닿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마음가짐이 이러합니다. 하나님과 겨루어도 결코 자신들이 뒤지지 않는 수준에 올라와 있다는 겁니다.

 

우린 바벨탑을 쌓는 인간들을 보면서 비웃을 겁니다. 왜 말도 안 되는 헛짓을 하고 있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각자를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우리들이 돈을 벌고 자식 공부 시키고, 건강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겁니다. 주님의 이름입니까 아니면 나의 이름입니까?

 

사람에겐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어요. 누구든지 자존심을 건드리면 버럭 화를 내지요. 자기 이름이 손상을 받았다는 겁니다. 요즘 많은 일을 겪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그 이름입니다. 각자가 가진 이름들이 있어요.

 

물론 그 이름엔 자신의 직위가 있어요. 그 이름을 존중하지 않으면 상대에 대해 어떻게 나올까요?

큰 소리를 치든지 그에 대한 보복을 감행하겠지요.

 

가인이 성을 쌓고 난 뒤에 그 성 이름을 에녹성이라고 지었습니다. 왜 아들 이름으로 지었을까요? 누구든지 내 아들 건드리면 죽이겠다는 것 아닙니까? 아들을 건드린다는 것은 곧 자신을 건드리는 것이 되잖아요.

 

교회에서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나요. 평소엔 목사님을 존중하다가 자기 자식을 건드리면 그 상대가 목사가 되었든 누가 되었던 가만있지 않지요. 그래서 목사가 설교할 때 교인들 자녀들을 언급하는 것은 상당히 조심해야 되요.

 

교회 오는 이유가 자신의 이름을 챙기기 위해서 오기 때문에 그래요. 말씀을 듣게 되면 자신의 이름이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데, 말씀을 들을수록 자신의 이름이 더욱더 높아지는 사건이 일어나니 복음 위에 자기 자녀가 있습니다.

 

자녀뿐만 아니라 가정도 마찬가지고 남편도 마찬가지고 아내도 마찬가지에요. 본인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데 자꾸 팔짱끼고 구경만 하고 있으니 복음은 한 겨울에 따뜻한 커피보다 못해요.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나옵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소리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를 너무 질러 대니 많은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꾸짖었습니다. 조용해!

 

그러자 바디매오는 더욱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이시니 주님께 제가 구할 것은 불쌍히 여겨달라는 외침 외에 없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듣고 보고 있지만 예수님을 왕으로 보는 사람이 없어요.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기 위해 오신 왕입니다. 이것을 알아 본 사람은 소경 거지 바디매오입니다.

 

그러니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 지를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자신이 죄용서 받아야 할 죄인임을 모르는 자는 체면을 차려야 합니다. 예의를 지켜야 하지요. 자기 이름이 무시당하면 안돼요. 그래서 여러 사람과 대화를 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대화를 해야 하지요. 난데없이 십자가 복음 꺼내면 곤란합니다.

 

그들에겐 그들의 이름이 중요해요. 물론 돼지에겐 진주를 던질 이유가 없지요. 문제는 항상, 언제나 너무 젠틀맨입니다. 그러니 사탄이 발악을 하지 않아요.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외침은 오히려 거지도 아니요 소경이 아닌 그들의 본성을 자극합니다. 너 입 다물어. 시끄러워. 다윗의 자손이라는 소리가 도대체 무슨 소리야.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외침은 어느 누구의 시선을 끌지 못했습니다. 단지 시끄러운 소리로만 들렸을 뿐입니다.

 

제거해야 하는 소리로 들릴 뿐입니다. 소경 바디메오에겐 자기 이름이 없어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그렇지요. 거지지요. 게다가 소경이지요. 그러니 그에겐 가진 것이 뭐가 있어요. 무슨 자손심이 있겠어요.

여러분 거지에게도 자손심이 있습니다. 소경에게도 자손심이 있어요.

 

소경거지 바디매오의 외침을 일반적인 거지의 외침으로 본다면 그건 큰 착각입니다. 일반적인 거지는 다윗의 자손을 모릅니다. 자신이 왕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할 자임을 몰라요. 왕이 자신을 대신해 대속물이 되어야 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왕의 자녀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왕이시오, 그 왕은 대속물이 되신다는 사실을 알아요. 그래서 그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 밖에 없어요. 왕이 불쌍히 여겨주지 않으면 그 혜택을 입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아요.

 

그러니 타인이 무슨 소리를 하든지 그런 소리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거지니 그렇게 거지처럼 예의가 없니라고 해도 그런 말은 귀에 들어오지가 않아요.

 

오직 그에겐 다윗의 자손만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에겐 자신의 이름이 없어요.

 

그런데 독특하게 성경엔 바디매오라는 이름이 있고, 바디매오에게 조용하라고 한 자들의 이름은 없어요. 참으로 특이하지요.

 

주님은 이렇게 일을 하세요. 자기 이름을 부인하는 자의 이름은 기억하시지만 자기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 자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하지 않으십니다.

 

소경거지 바대매오는 자신의 소속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 소속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소속이 그들 자신들의 사회공동체라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왕은 그들 자신입니다. 왕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모든 소유가 왕의 것이지요. 소경거지 바디매오에게 시끄럽다고 하면서 조용히 해라고 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왕이라 생각한 겁니다. 자신들에 비해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왕의 자리를 점유한 자신들의 말을 들어야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소경거지 바디매오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를 알고 있어요.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고 하시니 사람들은 소경 거지 바디매오에게 믿음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다윗의 자손이란 말 속에 왕이 전적 주권을 다 갖고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요. 그러니 네 믿음 이라는 표현조차도 왕권 속에 담겨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부자인 한 사람은 예수님께 이런 식으로 다가 왔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역시 마가복음10장에 나옵니다.

이미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다르지요.

 

왕으로 대하는 것과 한수 배우겠다고 다가가는 것 말입니다.

만일 이 사람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예수님 말씀대로 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그야 뻔 하지요.

자기 자랑 외에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자에겐 도무지 영생을 얻지 못할 방법을 제시합니다. 십계명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자신 만만해 하는 그에게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에겐 절대로 예수님을 왕으로 믿지 못하도록 도무지 넘어 오지 못할 벽을 만들어 버립니다.

 

이게 다윗의 자손의 위력입니다. 어려서부터 왕 행세한 이런 자들이 천국에 들어오게 되면 자기가 왕노릇하려고 할 뿐이지요.

 

그 모습을 그 다음 구절에서 보여 줍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있는 것을 다 팔고 주님을 좇았다고 하지요. 그러니 뭔가 받을 게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주 친절하게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못할 자가 없느니라(10:29,30)”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여기에 한 말씀 더 덧붙입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10:31)”

 

물론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성령 받은 후에 자신들의 이런 발언과 행동이 무슨 짓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지요.

 

여전히 천국에서도 왕노릇 하려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백배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비록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더라도 왕노릇을 포기 못하는 자가 있다면 그런 자는 탈락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물이 다 너희의 것이기 때문에 자랑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만물이 다 나의 것이면 얼마든지 자랑할 만하잖아요. 바울이나 아볼로, 게바, 세계, 생명, 사망 지금 것, 장래 것 모든 것이 다 너희의 것이라고 합니다.

 

어깨가 얼마나 우쭐해지겠습니까?

이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니 내가 얼마나 자랑거리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거꾸로 말씀합니다. 그러니 사람을 자랑치 말라는 겁니다.

23절을 보면 그 이유가 비로소 밝혀집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들을 위해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그러합니다.

이순신도, 진시황제도, 어떤 것 하나 성도들을 위하여 있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즉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소유권을 확실히 합니다.

소유권이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하나님께 있어요.

 

달리 표현하면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성도들을 위해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직장도, 돈도, 자녀도, 남편도, 아내도, 텔레비전도, 어느 것 하나 성도들을 통해 왕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한 소품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소품들 좀 갖고 있다고 자기 자랑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의 소경도 아니고 거지도 아닙니다.

집도 있고, 통장에 돈도 있어요. 자식들이 나중에 먹고 살 만큼 재산이 있어요.

 

그러니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외침이 듣기 싫습니다. 짜증납니다.

왜 그럴까요?

 

나름대로 왕노릇 제대로 하는데 왕노릇이 죄라고 지적하고 들어오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니 짜증나지 않을 수 없지요.

 

사람을 자랑치 말라는 말은 사람이 가진 어떤 것도 자랑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사는 인간 치고 사람이 가진 것을 자랑하지 않는 인간 어디에 있습니까?

없어요.

 

자녀가 전국 일등하고 자랑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자녀가 서울대 의대 가면 자랑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이제 갖 애를 낳아 일 년도 안됐는데 걸음마 하니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거든요.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치 말라는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어떤 인간들이라도 사람을 자랑하는 인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단지 돈, 권력, 미모, 건강 만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전하는 자기를 자랑합니다. 게바, 바울, 아볼로를 자랑한다는 말이 그런 의미입니다.

나르시즘입니다. 자기에게 도취되었어요.

 

그러니 십자가 믿는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겁니다.

 

만일 게바나 아볼로나 바울이 다른 복음을 전했다면 우린 할 말이 많을 겁니다.

그러나 게바나 아볼로나 바울은 십자가 복음을 전했어요.

 

그런데 듣는 자들은 십자가 복음을 듣고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게바를 자랑거리로, 아볼로를 자랑거리로, 바울을 자랑 거리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불쌍히 여기소서가 안 나와요. 왕이신 예수님이 눈에 들어오지가 않아요. 자신이 왕 행세하는 겁니다.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치 말라는 말씀은 우리를 다시 십자가 피 속으로 떠 밀어 넣습니다. 왕이 따로 있습니다. 우리는 왕이신 그분에게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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