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과 칭찬
고린도전서4장3-5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이 땅에서 ‘나’라는 존재는 내가 만들어 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만들어 냅니까?
내 자녀가 왜 공부를 잘해야 된다고 생각합니까? 타인이 없다면 이런 생각이 만들어 질까요?
얼굴이 예쁜 것도 그래요. 주변 사람들이 예쁘다 못 생겼다고 말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마음가짐이 달라지죠.
제가 한 번은 외투를 입고 어떤 모임에 나갔는데 거기 있던 친구들이 너 그 옷 안 어울린다고 말해요. 내 생각에는 괜찮은데. 친구들이 그렇게 말해도 그 옷을 입고 다닐 수 있어요.
그런데 만일 제 아내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면 입고 다닐 수 있을까요? 다시는 입고 다닐 수 없을 겁니다.
옷 하나도 내 마음대로 입지 못하는 세대입니다.
누가복음7장 3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대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신 비유가 나옵니다.
아이들이 장터에서 놀이를 합니다. 놀이를 할 때 피리를 불면 춤을 추어야 하는데 춤을 추지 않아요. 곡을 하면, 사람이 죽으면 곡을 하잖아요. 곡을 해도 울지 않습니다. 박자가 맞지 않지요.
세례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 이 세대 사람들의 판단이 세례요한 귀신 들렸다고 합니다. 세례요한에게 박자를 맞추어야 하는데 이 세대 사람들은 미친놈이라는 평가를 내려 버립니다.
이와 달리 인자는 와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놀립니다.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라고 비웃습니다.
이미 이 세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놀고 있는 틀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와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쳐도 그들 눈에는 미친놈으로밖에 비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구원을 베풀어 주시니 그런 더러운 구원은 우리가 원하는 구원이 아니라고 해 버립니다.
자신들은 절대로 그런 더러운 자리에 함께 끼어 놀 수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자들은 이미 이 세대가 내리는 평가에는 곱표라는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마치 살육당하는 돼지나 소처럼 말입니다.
이 세대는 결코 주님의 놀이에 장단을 맞추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놀림거리요 비웃음거리일 뿐입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그들에겐 조롱거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님의 놀이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들 공동체가 내리는 판단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2장42절을 보면 예수님 당시 관리들 중에도 예수님을 믿는 자가 많았다고 하지요. 그런데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교회에서 나가라고 하면 옆에 있는 교회로 가버리면 되지요. 아니면 절간으로 가든지.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출교는 자신의 자리가 날아가 버립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자신의 피와 땀을 쏟은 자리라면 쉽게 옮기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돈이 나오고, 명예가 있는 자리라면 쉽게 나올 수 없겠지요.
이런 것이 없다면 쉽게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산헤드린 공의회 소속이라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국회의원이 되기 쉽나요? 어렵지요. 그런데 예수님 믿기 때문에 국회의원 그만 두라고 하면 어느 누가 그만 두겠습니까?
여기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평가를 내렸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이 세대에 속한 자들은 사람의 영광, 이 판단이 너무나 소중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평가를 내리는가가 제일 중요합니다.
목사가 되어도 교인 두 명이라고 하면 비웃습니다. 천명이라고 하면 대단하네라고 하지요. 이것은 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도 예수님께 뭐라고 합니까?
요한복음7장에 나옵니다. 스스로 나타내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왕 일을 할 것 같으면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돋보이는 자리에서 일을 하라는 겁니다.
사람의 영광에서 인간은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부딪히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사람의 영광 외에 무엇이 있습니까?
옷을 어떻게 입을까? 어떤 식당에 가서 먹을까? 머리 모양은 어떻게 할까? 휴대폰은 어떤 것을 들고 다닐까? 텔레비전은, 자동차는, 신발은, 머리핀은, 장갑은, 마스크는, 안경은, 시계는, 벨트는, 신발은 어느 것 하나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
물론 거지도 타인을 의식하지요. 거지가 거지 옷차림이 아니면 어느 누가 도와주겠습니까? 거지의 영광이 따로 있어요. 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신호등이 있는 도로에서 돈을 달라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떻게 한결같이 한 다리를 절뚝거리며 구걸을 하는지.
이것도 유행인가? 위에서 지시가 내렸는지 통일성을 갖고 구걸을 해요. 그래야 많은 돈을 얻을 수 있는 모양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자체가 사람의 영광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영광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잖아요. 수억 원이 들더라도 성형수술하고 말입니다. 예쁘면 최고잖아요. 사람의 영광이 없다면 어느 누가 그 많은 돈을 그런 곳에 사용하겠습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모세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어요.
출애굽기32장을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증거판을 갖고 내려왔을 때 아론을 중심으로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여호와절기축제가 벌어졌지요.
이런 행위에 대해 여호와께서 이들에게 진노하여 이들을 진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너 즉, 모세를 큰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십니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그러니 진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말라고 기도를 합니다.
물론 이 기도 내용 때문에 여호와께 당장 화를 내리시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 뒤에 나오는 언약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에게 하신 언약으로 인해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타국의 평가 때문에 진멸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민수기를 읽는 애굽이 뭐라고 조롱하겠습니까? 여호와께서 광야에서 몰살시키려고 그런 요란을 떨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진멸시킴으로 애굽이 그런 조롱을 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는 겁니다.
모세는 지금 정신이 없지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잖아요. 그러니 여호와께서 모세를 큰 나라가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가 않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큰 나라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큰 나라가 되면 예수님이 오실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나 모세를 살짝 건드리면서 모세는 예수님이 큰 나라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가 애굽의 평가를 거론하는 겁니다. 모세가 애굽의 평가를 거론해야만 그가 메시아가 아님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 세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모세가 조금 전에 언급한 상황에서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자리에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라고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변화산상에서 나타난 모세는 오히려 예수님의 죽으심에만 관심을 쏟고 있지요. 그래서 모세는 오히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야만 하는 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예수님을 모욕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갖고 조롱하지요. 너부터 구원하라는 겁니다. 남은 구원했는데 자기는 구원 못한다고 조롱합니다. 십자가에서 멀쩡하게 내려오면 우리가 믿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으니 하나님이 너를 구원해야 하지 않느냐고 조롱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에 무슨 영광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보입니까? 사람의 영광이 보입니까?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요. 예수님에겐 사람의 영광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이나 못 박히는 자들이나 구경꾼이나 지나가든 모든 자들이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보입니까?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의 영광 밖에 모르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몰라요. 모르니 자꾸 사람의 판단 평가가 중요하게 와 닿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고 합니다. 즉 자신의 설교를 들은 자들이 사도바울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어떻게 평가하는 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매우 작은 일이라고 표현하니 또 어떤 인간들은 그래도 매우 작은 일이지만 사람들의 평가가 중요하다고 우길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사도바울이 죽어버리면 어떤 평가를 내릴까요?
사도바울 자기 자신도 자기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왜 이런 말을 할까요? 심지어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하잖아요.
모순이죠?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한 말은 뭡니까? 구원파들이 주장하듯이 과거 이야기입니까?
디모데전서 1장15절을 보면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현재 지금 내가 능동적인 죄인 중의 괴수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임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 상충되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상충되지 않습니다.
심판자는 주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자신은 주님의 심판에 의하면 칭찬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칭찬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인중의 괴수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만 증거했기 때문에 칭찬을 받는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자신이 자신을 자책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코 이것이 자신을 의롭다 하는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평가하겠습니까?
그래 너 잘났다 하겠지요. 이런 소리 들으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바울에겐 주님이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평가에 관심 있는 자들에겐 주님이 안 보여요. 심판하실 분이 주님이 아닙니다. 그러니 지금, 살아 있는 자들의 평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성도는 주님께서 오시기까지는 아무 것도 판단하면 안돼요. 무슨 말인고 하면 성도는 심판자가 아닙니다. 달리 말하면 바울이 대단하네, 아볼로가 주님 종답네 이런 소리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의 영광이 우선인 자들에겐 꼭 이런 판단을 하고 싶어 해요. 다르게 말하면 이런 판단을 듣고 싶어 하지요. 그래서 교인들은 목사의 칭찬을 그렇게 좋아합니다. 목사가 칭찬해 주지 않으면 괜히 기분이 안 좋아요.
주님을 잘 섬기시니 복받겠습니다라는 말을 해 주면 너무 좋아하지요.
그저께 어떤 분을 만났는데 다니엘 금식을 한데요. 다니엘 금식은 다니엘처럼 왕이 내려준 진미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는 금식이랍니다. 21일간 곡식류는 먹지 말고 감자 고구마 견과류, 채소, 과일 같은 것만 먹을 수 있는 모양입니다.
이거 누구 영광위해 하는 겁니까? 만일 그들에게 질문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다고 할 겁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입니까라고 물으면 뭐라도 답하겠습니까? 목사님 말씀 잘 들었잖아요라고 할 겁니다.
성경에 다니엘 금식이 나오지 않아요. 목사가 조작해 낸 금식을 했기에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십자가의 복음엔 관심이 없어요.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 내리는가가 중요해요. 금식한 내가 대단한 겁니다. 주변 사람이 특히 목사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가 중요해요.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내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평가 내려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자들에겐 심판하실 주님이 눈에 들어오지가 않습니다.
어둠에 감추인 것을 드러내고 사람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는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는 말씀이 들어오지가 않습니다.
어둠에 감추인 것, 마음의 뜻을 다 나타내신다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속이는 겁니다.
그때에 각 사람에게 칭찬을 하시는 이유가 십자가지신 주님 때문인데 인간들은 자기가 칭찬받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여러분, 심판하실 분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사람의 판단이나 자기 자신의 판단은 판단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는 겁니다. 칭찬은 주님의 칭찬만으로 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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