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고린도전서4:6-9
본을 보인다고 했을 때 좋은 의미입니까 아니면 나쁜 의미입니까? 제가 어릴 때 들었던 기도 내용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부모들이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난 예수님을 믿는 사람엔 관심 없고 이 땅에서 공부잘하고 돈이나 실컷 벌면 된다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부모들은 자녀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요. 물론 자신도 그렇게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본이 되게 해달라고 했을 때 어떤 모습을 상상할까요?
사기치기, 싸움꾼, 술주정뱅이, 공부꼴찌하기 이런 겁니까? 어느누가 이런 본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까?
남에게 선한 일 하는 사람, 화목케 하는 사람, 늘 정신이 건강한 사람, 반듯한 사람, 공부 일등하는 사람이 되어야 본이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자녀와 건널목을 건널 때 빨간신호등일 때 길을 건너면 자녀가 뭐라고 합니까? 엄마는 왜 약속 지키지 않아라고 하지요. 본을 보이라는 겁니다.
부모님은 텔레비전을 보는데 자식에서 넌 공부해라고 하면 자녀들이 뭐라고 해요? 엄마아빠는 텔레비전보고 왜 나만 공부해라고 하는거야라고 대들지요. 사실 공부하기 싫다는 말인데 겉으로 포장하면 본을 보여 달라는 거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도 본을 보였다는 말을 해요. 이 말을 들으면 우린 당장 자신을 체크 합니다. 나는 본받았느냐? 아니면 나는 본을 보였느냐?
성경에서 본을 보였다고 하니 이 세상 통용되는 본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본을 보이는 것이나 본받는 것이 인간 자신들 손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목사들이 설교를 할 때 소리칩니다.
부모들아 자녀들의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라고 말입니다.
지난번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교회에서는 유치원 아이들부터 헌금하는 것, 십일조 하는 것을 가리키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용돈을 주면 먼저 십일조를 떼어 놓게 하고, 헌금도 미리 준비해서 주일날 하게 하는 모양입니다.
그 때 그 아빠가 하는 말이 너 십일조 정확하게 하니라고 물었어요. 딸은 제대로 계산해서 하는 것 같은데 아들은 대충 계산해서 하는 모양이에요.
제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말을 하는 아버지는 십일조를 정확하게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가 본을 보이니 자녀들이 그 아버지의 말을 잘 듣겠지요.
부모가 교회에 봉사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들은 교회에 봉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렇고요. 그래서 목사들은 또 말합니다.
교회에 충성봉사하세요. 그 충성봉사가 자녀들에게 본이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귀히 쓰시고 축복하실 겁니다라고 하지요.
헌금이나 십일조나 충성봉사 이 모든 것들이 노력하면 얼마든지 할수 있는 사람의 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문제가 생기면 자기 탓을 하지요. 아니면 주변 환경탓을 하든지.
그러면 반대로 부모가 헌금이나 성경 읽는 것이나 기도하는 모습이나, 봉사하는 모습을 안보여주면 자녀들은 어떨까요? 역시 부모의 본대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성경 읽지 않고요. 헌금하지 않고 봉사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주일날 예배에 빠져 버리면 자녀들도 빠져도 되는 줄 알아요. 제가 어릴때에 어머니는 어떤 일이 있어요 주일 예배를 빠지지 않았어요. 물론 저도 빠지지 않았고 출석상도 많이 받았어요. 새벽기도 가자면 싫지만 따라 가는 겁니다.
분명 사람은 본을 보여주고 본을 받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내가 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결국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은 안 보이잖아요. 성령을 통해 일을 하시잖아요. 성령을 통해 일을 하시니 결과물만 있습니다. 성경에 성령의 결과물들이 나와 있잖아요. 그러니 그 결과물에 부합되게 성령의 일을 흉내내려고 하는 겁니다.
어차피 주님이 일하신다는 것은 모르니까 일하신다 치고 그 결과물만 나온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결과물이 결국 돈 바치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돈 바치는 사람이나 돈을 내라는 목사나 모두 한 통속이기 때문에 그 일을 주님의 일로 믿어 버리지요. 물론 목사가 한수 더 높기 때문에 교인들을 이용할 뿐입니다.
주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본을 보일 사람만 눈에 보이지요. 그러니 말씀에도 본을 보이라는 말씀이 나오니 본이 되는 내용을 모아 모아 본이 되는 삶이 어떤 삶인지, 본이 되는 말이 어떤 말인지, 본이되는 행동은 어떤 행동인지 모두 꺼집어 내어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지요.
그래서 과거나 오늘이나 교회에는 명령, 즉 율법만 가득하고 사랑은 없습니다. 그러니 경쟁만이 가득하고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볼로와 사도바울 자신이 본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들이 보여준 본이 어떤 모습일까요? 과연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그런 본일까요?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도무지 흉내 낼수 없는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9절에 보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 합니다.
사도들이 사는 것은 사형수가 사형을 당할 날만을 기다리면서 사람이나 천사들에게 구경거리로 삽니다.
참으로 너무나 이상한 본입니다. 이런 본을 보였으니 어느 누가 본받고 싶겠습니까?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 인간세상은 본이 정해졌습니다. 그것은 본받지 말라고 해도 붕어빵 찍어내듯이 똑 같은 아담이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멸망시키기까지 아담세상의 유일한 관심은 한가지였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겁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치고 여기에 관심없이 살아가는 사람있습니까? 없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 빼버리면 사는 낙이 없잖아요. 다르게 표현하면 주님이 하시는 일에는 난 관심 없소라는 말입니다.
내 몸이 원하는 것은 주님의 일이 아니라 내 몸이 원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누가 본을 보여주지 않아도 찍힌 붕어빵이기 때문에 자동입니다.
헌금을 하면서 본을 보여 주거나 아니면 헌금을 하지 않으면서 본을 보여주는 것 모두가 다 여기에 속해 있습니다.
자기의 즐거움을 위한 본입니다. 구경거리 되기 위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구경거리가 되려면 헌금 하면서 주님이 하셨습니다가 나와야 하지요. 그렇게 되면 자신은 죄인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헌금하지 않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저는 죄인중의 괴수입니다가 나와야 하지요.
그런데 헌금하는 사람이나 하지 않는 사람이나 아담을 닮아서 주님이 하셨습니다가 나오지가 않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원망하는 것을 보면 마치 자신들이 원해서, 자신들의 능력으로 애굽에서 탈출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기분이 안좋다 싶으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겁니다. 물론 아무리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해도 돌아 갈수 없습니다. 주님을 이들을 모두 광야에서 진멸시켜야만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증거하는 재료가 됩니다.
실상 성도가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어디 이스라엘 백성과 다릅니까?
전혀 다르지 않잖아요.
지금까지 살게 하시는 이유는 구경거리 만들기 위해 살게 하시는데 우린 구경거리가 되기 싫어해요. 헌금을 해도, 기도를 해도, 전도를 해도, 봉사를 해도 꼭 자랑하고 싶어해요. 자신이 잘났고, 얼마나 훌륭한가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해요.
헌금을 하지 않아도, 기도를 안해도 자신이 얼마나 믿음 좋은가를 뽐내고 싶어해요. 이런 모습을 본으로 보여주고 싶어해요.
그런데 주님은 이스라엘을 구경거리로 만들기 위해 광야에서 진멸시켰습니다.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 큰 권능과 능력으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탈출 시켰다면 호강하게 해 주셔야 하는 것이 정상이잖아요.
신적인 능력으로 불과 구름기등으로 인도해 주셨다면 적어도 이집트에서의 삶보다는 더 질적으로 높은 삶을 제공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여호와께서 이들을 모두 광야에서 진멸시켰습니다.
이게 무슨 본이 되겠습니까?
히브리서에서 이들이 본을 보였다고 합니다. 어떤 본을 보였습니까?
히브리서3장8절을 보면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지옥가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출애굽세대들이 지옥갔다는 말은 아닙니다. 단지 그 역할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상상도 못하는 본을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서 바로의 군대가 몰살 당하는 것을 현장 목격을 했지요. 물론 상당히 기뻤다는 표현이 나옵니다마는 그와 동시에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두려워 했을 겁니다. 눈앞에서 땅이 갈라시는 것을 목격했고 눈앞에서 불뱀에 물려 죽는 것을 목격했으니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들은 그 두려움이 지나면 잊어버리지요. 히브리서에서 두려워하라고 하니 목사들은 또 이 본문을 이용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살면 안된다고 외칩니다.
이런 소리는 광야이스라엘 백성들도 들은 소리고 예수님당시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들이 입이 닳도록 외친 소리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두려워했으면 말씀을 어릴때부터 다 지켜버리겠습니까?
어릴때부터 율법을 다 지키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어릴때부터 그 분위기 속에서 자라면 된다고 반박하시겠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요.
광야 이스라엘을 보세요. 분위기는 완벽하잖아요. 구름기도 불기둥,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잖아요. 이보다 더 확실한 환경이 어디 있나요?
여러분 같으면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런데 분위기가 아담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아담은 본능적으로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두려워한다면 광야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순간이 지나가 버리면 두려움도 같이 지나가 버려요.
제가 여기에서 운전을 처음할 때 마음이 급했어요. 이곳 운전자들의 습관을 몰랐기 때문에 제 살던 곳의 운전자들의 습관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 앞에 있던 차는 뒷차와 상관없이 시속 십킬로로 가는 겁니다. 아침에 바쁜데 제 마음이 얼마나 급했을까요?
조금만 더 가면 속도를 내겠지 생각했지만 한 참을 가도, 제가 느끼는 시간으로, 그 속도입니다. 비켜 주지도 않고요. 그래서 제가 속도를 확 내면서 추월하는 순간 앞쪽에서 빠른 속도로 자동차가 달려오는 겁니다.
급히 왼쪽으로 꺾었는데 감사하게도 그곳에 차량이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어요. 운전을 조심해야 되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며칠 갑니까?
주님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도 언제나 추억으로만 기억될 뿐입니다. 두려움이 실제가 되어야 하는데 실제가 안되지요. 그래서 목사들이 자꾸 겁을 줍니다. 세뇌시키는 겁니다.
본래 갖고 있던 막연한 두려움에 집어 넣지요.
그래서 그 두려움은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두려워 하라고 합니다. 문제는 두려워하라고 한다고 해서 두려워집니까?
여러분 두려움은 밀려오지요. 갑자기 난데없이, 그렇지 않나요.
주님을 두려워하라고 했을 때 내가 두려워해야지라고 해서 두려워 한다면 그게 두려워하는 겁니까? 아니잖아요.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미 두려움을 해소했다는 말이 되잖아요. 알아서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두려움을 내가 극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헌금하지 않고, 봉사하지 않고, 전도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겁니다.
아볼로와 사도바울이 보인 본이라는 것은 구경거리 되기입니다. 여러분 우린 구경거리로 부름받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경거리가 되려고 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경거리 되기 싫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아볼로와 바울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구경거리로 확정되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자기 백성을 십자가의 피로 구원하셔서 사형선고 받은 자처럼 구경거리 되도록 확정하셨습니다.
그러니 자기 행위를 통해 본을 보이려고 하는 자들이나 자기 행위를 통해 자신의 믿음 좋음을 자랑하는 자들이나 모두 자신은 구경거리가 되기 싫다는 말입니다.
천사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기 싫다는 말은 자신을 자랑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높이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나는 살아야 돼. 맛있는 것을 먹어야 돼. 건강해야 돼. 인기 많아야 돼. 공부잘해야 돼. 부자 되어야 돼.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린 붕어빵으로 찍혔습니다. 그러니 천사와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경거리로 드러납니까? 그것은 십자가만 자랑하는 모습으로 구경거리가 됩니다.
십자가만 자랑하니 얼마나 없어 보입니까? 십자가 믿는 내가 얼마나 말씀대로 살았는가를 자랑한다면 있어 보이잖아요.
그저께 어떤 분이 저에게 메일을 보냈는데 그 곳에 제가 좀 아는 분의 간증이 있었습니다.
강 모씨라는 사람인데 자신 스스로 십자가 복음을 믿는 사람이랍니다. 그런데 글을 읽다가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에 덮어 버렸어요. 결국 자신이 얼마나 믿음 좋은 사람인가를 자랑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십자가복음으로 위장한 자랑이지요.
사람을 자랑한다는 것은 구경거리가 되기 싫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가치 있음을 그런 식으로 교묘하게 감추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피만 전하는 복음이 얼마나 싫겠습니까? 인간의 어떤 행위도 죄가 된다는 말이 얼마나 짜증나겠습니까?
사형선고 받은 구경거리로 살아가는 즐거움이 그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여러분, 성도는 사형선고받은 구경거리로 사는 즐거움에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자신은 날마다 부인되며 주님의 십자가만 더욱더 높이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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