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강해 84

푸른 섬 2016. 8. 2. 16:22
온전한 것과 부분적으로 하는 것
고린도전서13장9-13
복음을 전해 보면 복음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늘 하는 말 중에 꼭 들어가는 말이 있습니다.
‘네가 성경을 다 아냐?’
사실 이 말을 하는 이유가 있지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우주에 지구와 같은 행성이 수천 개가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우주가 얼마나 광대하고 넓습니까? 얼마 전에는 우주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빨리 팽창한다고 합니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이 과학과 지식의 발전으로 점점 더 많이 알아가게 되는 것이 몸을 가진 인간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세계사 책을 들여다 보면 처음 인류는 물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수렵 채취로, 그리고 제대로 된 집도 없이 떠돌아 다니면서 굴 같은 곳에서 생활했다고 하지요. 그러다가 경험이 쌓여지니 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알고, 홍수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를 알게 되잖아요.

정글의 법칙을 보면 하는 일이 뭡니까? 사냥하고 채취하고 먹고 자고 사냥하고 열매 구하고 먹고 자고.
이것이 농사를 짓지 못할 때, 가축을 기르지 못할 때 했던 인간의 모습입니다.

병만족이야 이미 지식을 다 갖고 있잖아요. 불을 어떻게 피워야 하는지, 그리고 비가 올 땐 무엇을 이용해 집을 지어야 하는지, 사냥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론 엄청나게 많은 도구들을 갖고 생활하잖아요. 그런데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사냥을 했는데 라면 스프를 좀 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입맛이 사냥해서 그냥 먹을 수 있는 입맛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만일 오십년 전만 해도 라면 맛을 알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라면을 맛 없어서 안 먹는다고 했습니다마는.

이처럼 우리의 몸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식도 쌓이고 입맛도 쌓입니다. 그래서 늘 과거보다는 현재, 현재 보다는 미래가 더 많을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도 이런 생각을 가집니다.
‘내가 과거 복음을 모를 때 예수 믿으면 내가 잘 되고 내 가족이 축복 받고 내가 속한 국가가 잘 될 것이라는 믿었다. 그런데 이제 복음을 알고 보니 그렇지 않다. 예수 믿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의를 증거하기 위한 믿음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 높이기 위한 주님이 주신 믿음이다.’ 라고 할 때 과거와 현재의 변화가 일어 났잖아요.

그러면 좀 스마트한 사람은 이런 생각을 갖겠지요. ‘그렇지. 그렇다면 만일 시간이 흘러 내 생각이 또 바뀐다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믿음도 바뀔 수 있지 않는가?’

이 쪽 동네를 돌아 다녔을 때 많은 전도사들이나 목사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보면 그들의 한결같은 대답이 이런 대답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이 하도 많다 보니 오는 선생들마다 다 다른 이야기를 하더라는 겁니다.

신학교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단만 해도 150개가 넘어요. 중요한 것은 신학도 각자 강조하는 것이 달라요.
무슨 말인고 하면 십자가 복음으로 통일되지 않고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가르칩니다. 이들은 십자가로 하나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종교적 욕망이든 다른 욕망을 채워주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목사들의 설교가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설교합니다. 물론 어떤 인간도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설교하지 않을 인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을 봐도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설교하잖아요. 이것이 우리 인간이 보는 한계지요.
우린 십자가의 영 없이 성경을 인간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설교하는 것과 같이 봐 버립니다.

십자가만 자랑하는 인생으로 살아야 된다고 복음을 전하면 항상 하는 말이 성경에는 십자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도 있고 헌금도 있고 방언도 있고 예언도 있다고 합니다.
성경이 얼마나 두꺼운데 십자가로 통일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언약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하시는 말씀을 믿어지면 되는데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러니 꼭 자기 몸에 적합하게 믿음을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영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보기에는 모든 것이 상대적으로 보이고 모든 것이 늘 부족한 것으로 보입니다.
달리 말하면 십자가 복음이 온전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인간들 입장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입장을 정말 대변해 주는 듯한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는 말은 지식이라는 것, 예언이라는 것이 온전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말씀인 것 같잖아요.
이건 제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 몸이 느끼잖아요.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말씀하시니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잖아요.
‘죽어서 보자. 예수님 앞에 서서 누구의 말이 맞는지 보자.’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온전한 것이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인간 어느 누구도 온전한 것을 알 수 없다는 말이지요. 이 말은 성경 말씀대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곧 우린 인간들은 진리를 모른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진리라는 것이 늘 새롭게 생성된다고 하잖아요. 우리의 인식자체가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부분적으로 안다는 말씀과 온전한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히브리서11장에 보면 믿음의 선진들이 나옵니다.
여기엔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등이 나옵니다.
아벨의 행적과 에녹의 행적, 그리고 노아의 행적은 아브라함에 비하면 아주 미흡합니다.
그래서 우린 이들의 믿음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는 고 하면 이들은 부분적으로 알았던 것이 아니라 전부를 알았다고 간주해 버립니다.

아니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전체를 그런식으로 이해해 버립니다. 특히 사도 바울의 경우는 부분을 안 것이 아니라 온전한 것을 다 알았다고 상상의 날개를 확 펴 버립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사도바울 조차 부분적으로 알 뿐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부분이 부분일 뿐이라면 어떻게 온전한 것을 전할 수 있습니까?

부분이 온전을 말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지금이야 똑똑한 사람들이 부분이 전체보다 크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그 말도 결국 시간의 흐름을 품고 하는 말이거든요. 이 말은 진리라는 것이 바뀐다는 말입니다. 진리가 시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진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시간조차 영원한 언약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언약은 불변합니다. 그러니 오히려 변하는 인간은 영원한 언약, 새언약을 증거하기 위한 시간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그의 믿음이 부분입니까 온전한 것입니까?
히브리서 11장8절을 봅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이 말씀을 보면 누가 봐도 아브라함은 부분적인 믿음을 가졌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장면도 있고 이스마엘을 낳는 장면도 있고 이삭을 바치는 장면도 있잖아요.
시간이 흐를수록 부분적인 것들이 더 많아지잖아요. 그런데 결국 죽었습니다.
믿음으로 죽었습니다.

믿음으로 죽었는데 그는 헷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땅에 묻혔습니다.
이 땅은 사대만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전쟁으로 차지하잖아요.

그러면 이것도 역시 미진합니다. 그 땅이 약속의 땅이 아니었잖아요.
성령이 약속의 땅이 됩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부분적일 뿐이요 미진하다는 느낌을 성경을 보면서 지울 수가 없는데 히브리서에서는 이 믿음을 부분적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분명 부분적인 것인데 그 믿음을 온전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요한복음8장56절을 보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고 하십니다.
이 말씀도 어렵지요.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은 분명 부분적으로 알았을 뿐인데 그 부분이 진짜 예수님을 보게 된 온전한 부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지금 예수님을 상상해 보면 상상이 안되잖아요. 단지 부분적으로 예수님을 알 뿐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부분이 부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이 부분을 주님 쪽에서 부분으로 보게 하시기 때문에 이 부분적인 것이 온전한 것이 됩니다.

시간의식을 갖고 있는 인간들이 부분적인 것에서 온전한 것을 상상해 봤자 여전히 그 온전한 것은 부분적인 것 뿐입니다.
그런데 시간조차 언약을 증거하기 위한 바탕으로 사용하시는 주님은 부분적인 것이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온전한 것을 충분히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적용해 버립니다. 이것은 주님의 일방적 조치입니다.

그러면 왜 갑자기 부분적인 것과 온전한 것을 언급합니까?
그 앞 구절에서 예언과 방언과 지식이 폐한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반드시 어떤 사람들이 등장할까요?
예언, 방언, 지식이 필요 없다고 하는 자들이 등장할 것이란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영원한 사랑만 주장하는 자들이 나올 거란 말이지요.

사랑이 최고라고 말하는 사람 한 둘이 아니잖아요. 이런 자들이 나올 것을 아시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부분이 충분히 온전한 것이라는 말귀를 못 알아 듣습니다.

아브라함을 봐도, 이삭을 봐도, 야곱을 봐도 늘 미흡할 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8장 끝부분에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숨어서 성전에서 도망갑니다.

유대인들 눈에는 예수님의 일부분만 보입니다. 그건 부분일 뿐이지요. 그러니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9장을 보면 날때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뜬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이 소경은 이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경이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부분적입니까 아니면 다 알았습니까?
부분적일 뿐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눈만 떴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인자를 믿게 해 주십니다.

그러자 38절에서 눈뜬 소경이 믿는다고 하지요.
눈 뜬 소경이 예수님을 다 알았습니까?
몰랐습니다.
사도바울조차 부분적으로 알았을 뿐인데 소경이 어떻게 온전하게 할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 부분적인 것을 온전한 것에 합류시켜버립니다. 즉 그 부분적인 것이 전혀 부족한 부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욥기를 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엔 욥이 여호와를 제대로 몰라요.
그런데 욥기1장8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이미 욥에 대한 평가는 끝났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욥을 치게 되니 여호와의 이런 평가가 무색해 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욥이 여호와를 어떻게 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욥의 부분적인 것들이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것으로 적용시켜 버립니다. 그를 중보자를 증거하는 자로 사용합니다.
그가 사단의 시험을 받기 전이나 받을 때나 그 후나 여호와께서는 욥을 온전한 사람으로 간주해 버립니다.

욥이 여호와 하나님을 얼마나 오해 했습니까? 그 오해 투성이인 부분적인 지식조차 온전했다는 것을 여호와께서는 보여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여전히 부분적으로 여호와를 알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12절에 보면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 합니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주께서는 나를 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온전히 알고 계십니다. 욥기를 보면 알 수 있잖아요.
우린 언제 온전히 주님을 알지 그런 기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신다는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린 부분적으로 아는 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분적으로 알면서 살아야 십자가를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게 하신 이유를 욥을 통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늘 죄인중의 괴수라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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