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강해 85

푸른 섬 2016. 8. 2. 16:23

방언
고린도 전서 14장1-19
방언은 외국말이며 알아듣지 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 모임에서 방언을 할 경우에는 반드시 통역을 하라고 합니다. 만일 통역이 없다면 교회에선 잠잠하라고 합니다.

우린 이미 세뇌를 받아서 방언이라고 말하면 뭔가 특별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집단에서는 방언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아마 12절에 나오는 “그러므로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는 말씀에 근거하여서 방언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12절에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그것의 풍성함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방언이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습니까?

방언 자체로는 절대로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없습니다. 방언은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통역이 없는 방언은 교회에서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은 죽어도 안 들어요. 물론 그 방언도 가짜입니다. 진짜 흉내를 내려면 말씀대로 순종하든지 하면 되는데 말씀대로 순종하지도 않으면서 진짜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 좋아하기 때문이지요. 예언의 은사는 이미 우리의 인식으로는 좀 부담스럽잖아요. 그리고 복음 이야기 하는 것이 무슨 대수 입니까? 누구나 다 할 수 있잖아요. 이와 달리 방언은 뭔가 특별해 보이잖아요. 그래서 사기꾼 목사들이 방언을 마치 대단한 은사를 받은 것 인양 가르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있어서 확신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요. 구원파가 묻는 것이 ‘너 구원 받았어?’ 아닙니까?
아마 이런 질문 받으면 나름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모두가 당황해 합니다.
확신은 있는데 대답하기가 좀 그렇잖아요.

그런데 구원받았다고 하면 언제 받았느냐고 물어요. 왜 이렇게 묻겠습니까?
구원이라는 것이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천국과 지옥을 결정짓는 문제잖아요. 이런 큰 사건의 경험을 사도 바울처럼 기억하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아주 명확히 기억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자신이 예수 믿는 증거물로 방언을 내세웁니다. 나에게도 그런 증거물이 있어. 그러니 나 천국 가는 것은 확실하다는 것이지요.

자신이 예수님 만난 날을 정확히 기억하면 천국 가는 줄 알아요. 자신이 믿으면 천국 가는 줄 알아요.

인간들은 불안합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뭔가 자신의 몸이 체험한 것을 갖고 그 불안을 해소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방언은 분명 어떤 내용을 담게 됩니까? 기도의 내용이나 축복이나 감사 등 반드시 복음의 내용을 담습니다. 복음 외엔 없어요. 마치 방언이 사적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말씀을 하잖아요.

자기와 하나님께만 말하는 것이 방언기도라고 하니까 마치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일을 위한 용도의 방언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성경 어디를 보세요. 어느 누구의 기도가 개인적인, 사적인 기도가 나옵니까?

에베소서3장14절 이하를 보면 기도가 나옵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시기를 구하노라”

방언기도의 내용이 이런 내용입니다. 동의할 수 없다고요.

마태복음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가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 전에 먼저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다고 하는 자들의 기도 태도입니다.

이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서서 기도합니다.
마치 오늘날 방언한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는 것 같습니다.

왜 남들 앞에서 기도합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살고 있어요. 나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크신 은사를 받았어요. 그러니 여러분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시오.’ 이런 태도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면 기도 들어 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공격하시는 내용은 기도라는 것은 남에게 내세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준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새벽기도 빠지지 않고 다니는 사람들 특징이 있습니다. 새벽기도 빠지지 않았다는 자랑을 꼭 하잖아요. 은밀한 중에 계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지 않는 태도입니다.

기도를 해도 꼭 남들 앞에서 자랑질 해야 속이 후련한 자들입니다.

또 한 가지는 기도할 때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방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자신의 기도를 들어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면 40일 금식기도, 일천 번제 기도 이런 열심을 내면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면 간절하게 기도하면 신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 줄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아들도 재물로 바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자신의 정성이 이 정도이면 신도 응답해 주셔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23장10절을 보면 요시아 왕의 행적이 나옵니다.
“왕이 또 힌놈의 골짜기의 도벳을 더럽게 하여 어떤 사람도 몰록에게 드리기 위하여 자기의 자녀를 불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솔로몬 왕이 몰록을 위해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는데 그 추억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모양입니다.
도벳사당에서 아들을 불에 살랐습니다(렘7:31).
이 정도의 신앙심을 갖고 신에게 기도 했습니다. 말을 많이 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립니까?

자신의 정성을 투자한 만큼 신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 줄 것이라는 것이 이방인들의 기도 태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오래 기도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참 희한하지요.
예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하니 말입니다.

말을 많이 하여야 들어 줄 것이라 생각하니 말입니다. 물론 자신이 무슨 말 하는지도 모르면서 오래 기도한 자신이 대견스러울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기도입니다.
독특한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안에 나 개인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나 개인을 위한 기도는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기도의 내용이 너무 짧아요.

마태복음6장25절 이하를 보면 이방인들이 구하는 기도의 내용이 나옵니다.
이방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여 기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인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십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노리고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주님의 피로 사신 자들이 구하는 것은 늘 우선되고 가장 시급한 것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아는 것이 돈이 됩니까 밥이 됩니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알아간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시면 그의 인생이 어떠했습니까?

그야 말로 거지처럼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까?

과학이 발달하게 되니 사람들이 따지는 것은 효용성, 효율성 밖에 없습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따지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얼마나 나에게 이익이 될까 계산해서 믿습니다.
물론 이 과정을 거쳐야 하겠지요. 문제는 늘 이 계산에 몰두해서 인생 끝낸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에 왜 나옵니까?
돈의 가치를 계산해 봅니다. 오늘 차비를 들여서 모임에 갔을 때 나에게 어떤 유익이 있을까?
차라리 말씀 듣는 것 보다 집에서 자는 게 더 효율적이야. 꼴랑 한 시간 말씀 들으려고 내가 먼 곳까지 가야해?

시간 낭비 할 필요 없어. 요즘은 인터넷도 발달했으니 저비용으로 고효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런 생각을 했지요. 예수님만 따라 간다면 나의 인생은 활짝 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죽음으로 초대하셨지요.

죽음 속에서 그들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진짜 생명인 분은 예수님이심을 증거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화끈한 체험을 한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랑할 것은 십자가 밖에 없다는 말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킵니까? 자랑할 것은 받은 재산도 있고, 건강도 있고, 자식도 있고, 사업도 있고, 명예도 있고, 권력도 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 내 자랑 하지 못하게 하느냐고 말입니다.

방언을 주신 이유는 자기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근거하면 방언을 주신 이유가 아주 독특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방언을 주셔서 하나님의 큰일, 즉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게 하셔서 알아들을 자들만 알아듣게 하셨지요. 물론 각국 언어로 말했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는 누구나 다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지를 못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와 좀 다릅니다.
방언의 은사를 주신 이유가 마치 테스트 하는 것 같습니다.

혼자 방언을 하는지 아니면 교회에 나와서 하는지, 만일 교회에 나와서 한다면 통역을 반드시 동반하고 하는지 한번 보겠다는 인상을 줍니다.

우린 방언 은사를 주님이 주셨으니 무조건 좋은 것이라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방언의 내용도 문제가 되지만 방언 하는 자체도 방언의 내용에 부합되지 않으면 여전히 문제라는 것입니다.

방언의 내용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십자가 복음입니다. 성경어디에도 십자가 복음 외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방언 하는 자체도 십자가 내용이 부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자기 자랑하기 위한 방언은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지 말라고 한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고린도 교회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교회라는 곳엔 반드시 이런 사건이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왜 방언을 주셨습니까?

십자가 복음 전하라고 방언을 주셨습니다.

사랑을 증거하라고 방언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1절에서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린 근본적으로 교회의 덕 즉, 주님의 몸엔 관심이 없는 자들입니다.
늘 우리 자신의 유익에만 관심이 있는 자들이지요.
나에게 이익이 되면 좋은 것이고 이익이 되지 못하면 나쁜 것이 됩니다.

교회에 와도 나에게 얼마나 이익이 되느냐 아니면 나에게 손해를 끼치느냐에 관심을 둡니다.
그래서 나에게 유익되는 사람들은 귀하게 여기고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무시합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가 소원하는 것과 다른 것들을 우리에게 배치하십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십자가만 자랑하라고 그렇게 하십니다.

방언의 은사를 왜 우리가 기대하는 식으로 주시지 않은 이유는 주님의 관심은 방언 받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인 교회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피를 증거 하지 않는 모임은 주님의 몸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신 각양 은사를 통해 십자가의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알아가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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