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강해 86
푸른 섬
2016. 8. 2. 16:23
지혜와 악
고린도전서14장20-25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고 합니다.
이 본문에서 지혜라는 단어는 소피아(sofiva)라는 단어가 아니라 프헤렌( frhvn )이란 단어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 인간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이용합니다. 이 단어는 마음으로 지각하고 판단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방언과 예언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왜 이런 곳에 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느냐는 말입니다. 악이라고 하면 지옥과 관련되어 있는 단어잖아요.
이미 예수님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 고린도 교회인데, 그 뿐만 아니라 은사를 받은 사람들인데 이들에게 이런 기분 나쁜 용어를 사용한다는 자체가 너무 무례한 것이 아닙니까?
방언에 대한 용도를 잘 모르는 것을 두고 악이라고 한다면 이건 너무 심하잖아요. 뭐 좀 모를 수 있지 모르는 게 죄냐라고 따질 수 있잖아요.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보는 방식은 다 이런 식입니다.
피조물인 주제에, 죄인인 주제에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아멘하면 되는데 이런 말씀들이 주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나도 나름대로 말씀을 해석할 수 있고 지킬 수 있다는 입장이지요. 잘못 알았으면 교정해 나가면 되지 좀 모른다고 악이라고 해 버리면 어느 누가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니까 갑자기 이슬람교가 생각납니다.
그 사람들은 코란 즉 반드시 읽어야 할 것을 알라신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겐 코란에 대한 해석을 용납하지 않는답니다. 이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은 인간이 어떤 말을 듣는 순간 해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내 네 명까지 된다고 했는데 그러면 어떤 종류의 아내인지는 자기가 해석해서 결정을 내리는 겁니다.
키는 몇 센티미터, 몸무게는 얼마, 당은 얼마, 혈압은 얼마, 머리카락 수는 몇 개, 점은 몇 개 있는지, 발의 크기는 몇 인치 인지 이런 것들은 자기가 편리한 대로 해석해서 적용합니다.
앞서 제가 말씀에 아멘하면 된다는 말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지 말라는 겁니다.
말씀에 아멘하면 된다는 말은 말씀은 무조건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본성은 십자가 증거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기 자신도 나름 주인행세 할 수 있는데 왜 내가 죄인이냐는 것이지요.
특히 이미 세례 받았고 예수님을 믿는 본인, 헌금도 할 만큼 했고, 봉사도 할 만큼 했고, 기도도 할 만큼 했는데 이런 나에게 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목사들에게 당신 지옥갈 죄인이야라고 해 보세요.
아마 펄쩍 뛸 겁니다.
그저께 대학원 동기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 목사님이 아주 훌륭한 말씀을 하셨어요.
제가 대학원 다닐 때 좀 별났습니다.
삼년 내내 논쟁하다 시간을 다 보냈거든요.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늘 상대를 공격했으니 동기들을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이건 제 생각이 아니고 동기들이 그렇게 말을 해요.
그런데 이것이 중요한 포인터가 아닙니다.
동기들 나이가 벌써 오십 넘은 사람들도 있고 대부분 오십이 다 되었어요.
그래서 하는 말이 오랫동안 지나 와 보니까 다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이 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동기 모임에 저를 한번 오라는 겁니다.
벌써 목회를 이십년 가까이 한 사람들이잖아요.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인간들을 만났을까요?
그러다 보니 성불이 된 모양입니다.
그런데 성불된 이들에게도 복음을 이야기 하면 안색이 바뀝니다.
아무리 십자가 이야기해도 그 십자가는 성경에서 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라는 겁니다.
그들은 이미 구원 속에 들어 와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니 이제 구원 이야기를 그만 하고, 달리 말하면 복음, 십자가 이야기는 하지 말고 같은 학교 졸업했으니 좋은 일 있으면 함께 좋아해 주고, 슬픈 일 당하면 함께 위로해 주면 얼마나 좋은가라는 것이지요.
이들에겐 영적 싸움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나에게 네가 싸우는 싸움을 보여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갈라디아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십자가의 원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더 잘 믿기 위해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이 십자가의 원수라고 말입니다.
지금 교회에 이런 이야기가 통하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지금 교회는 예수님도 믿고 십일조도 말라기에 나오는 말씀처럼 세금공제 없이 십분의 일을 드리고, 주일날 새벽부터 저녁까지 말씀 읽고, 예배 참석하고, 성도들을 돌아보고, 교회 봉사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자들을 칭찬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십자가의 원수들이 오늘날 교회의 교인들이라면 목사들은 두 손 들고 환영할 것입니다.
영적 싸움이라는 것이 사람 눈에 보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피가 전파되는 곳에서 벌어지는 것이 영적 싸움입니다.
중요한 것은 열심히 안식일 지키고, 할례 행한 자들에겐 사도 바울의 영적 싸움은 말 뿐이 싸움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악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생각하듯이 살인하고 강도질 하는 그런 것을 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이었습니다 .
마가복음2장16절을 보면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라고 비난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당당합니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기도할 수 있을 정도로 말씀대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이들 눈에는 세금을 왕창 때려 자기 입에 넣고 또 다른 사람 입에도 넣어주는 세리들은 악한 자들 중 악한 자들이지요. 15절에 보면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죄인들이라고 했을 때 누가 볼 때 죄인들 이라는 말입니까?
바리새인들이 볼 때 죄인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볼 때에는 이들은 모두 악한 자들, 곧 지옥 불에 들어가야 하는 자들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눈에는 어떻습니까?
모든 자들이 죄인입니다. 문제는 말씀을 지키는 자들은 절대로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15장11절 이하를 보면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 데 그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아들 중 문제를 누가 일으킵니까?
둘째 아들입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재산을 자신에게 미리 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큰 아들 작은 아들에게 각각 나누어 주었습니다.
며칠 후 둘째 아들은 재산을 몽땅 들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 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날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이 들면 사람들 마음이 완악해 지잖아요. 비로소 궁핍했습니다.
그래서 돼지 치는 일을 하면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지만 그것마저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아버지의 품꾼의 하나로 봐달라는 심정으로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버지는 재산 다 날린 둘째를 위해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좋은 옷을 입히고 손 가라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기우고 살진 송아지도 잡았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로 인해 즐거워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맏아들은 밭에서 일하다고 돌아와서 이 상황을 목격했습니다.
여러분이 큰 아들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아버지 말씀을 잘 들어 지금도 밭에 나가서 종들을 관리 했던지 어떻게 했든지 일을 열심히 하고 왔습니다.
화가 날까요 화가 나지 않을까요?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벌인 동생을 받아들인 아버지가 어떻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동생이 재산 들고 멋대로 살다 재산을 다 날렸을 때 자신은 그동안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없이 살아 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자신을 위해서는 아버지가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아 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지금 이 심정이 누구심정인고 하면 바로 바리새인들 심정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미워요.
예수님을 죽이지 않고는 살수 없습니다.
천국이라는 곳은 이렇습니다. 아버지의 긍휼을 가장 제대로 보여주는 곳이 천국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잘났는가를 자랑하는 곳이 천국이 아닙니다.
이런 자들에게 적합한 곳은 지옥입니다.
주님이 세운 교회는 십자가 사랑을 증거하는 곳이지 인간 자랑하는 곳이 아닙니다.
오늘본문 21,22절을 봅시다.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아니 방언 주실 때 미리 교육해서 방언을 은사로 주시지 왜 이렇게 한 박자 뒤에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방언 은사 주실 때 이것까지 완벽하게 한 세트로 넣어 주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왜 따로 국밥으로 주셨습니까?
그 이유는 교회가 교회 자랑하지 말고 주님의 피 자랑하기 위해 세웠기 때문입니다.
교회 십 주년, 이십 주년, 백 주년 행사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자랑할게 있다는 겁니다. 그 자랑하는 것이 십자가 입니까? 아닙니다. 년수를 자랑하지요. 수에 칠 가치도 없는 년수를 자랑질 하고 있으니 얼마나 마귀적입니까?
목회 오십년 한게 뭔 자랑입니까?
살지 않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면 먼지가 가득 쌓여 있듯이 죄만 가득 쌓여 있을 뿐입니다.
심판의 기능을 하는 방언의 기능은 방언하는 자에게도 예외 없이 심판의 기능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고린도 교인들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복음 전하게 해서 얼마든지 지옥 보낼 수 있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복음 전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여기는 자들은 반드시 지옥 갑니다.
그러나 지혜에 있어서 완성된 자들은 이들과 다릅니다.
어떤 자들이 완성된 지혜를 받은 자들일까요?
23을 봅시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 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13절에 보면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니 조롱하여 말합니다. 새 술에 취한 자들이라고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미쳤다는 말이지요.
문제는 이들이 방언을 무슨 용도로 사용한다는 말입니까?
자기 자랑 용도로 사용하니 오히려 방언하는 교회가 미친 자들이라고 조롱받는 다는 말씀입니다.
방언 하는 자들은 책망 받을 마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24절을 보면 예언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 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책망, 판단,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이것이 예언의 기능이지요.
바로 복음입니다.
달리 말하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인간들은 책망 듣는 것, 판단 받는 것, 마음속에 숨긴 것들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거부합니까?
방언은 좋아하지만 통역을 거부합니다.
예언을 싫어합니다. 복음을 싫어합니다. 자신은 책망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마음속에 시커멓게 쌓인 죄들이 바람을 타고 펄펄 날아오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한 일이 무화가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었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 일입니다.
드러나는 것이 싫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로 드러나는 것이 싫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거부합니다.
복음을 전하면 발작합니다.
사무엘상18장6-9절을 봅시다.
“무리가 돌아 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 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이렇게 주님께서 사울왕의 본성을 드러나게 하셨으면 다윗을 죽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처럼 죄 중에 태어난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될 터인데 인간은 결코 자신 스스로 그런 결심을 내릴 수 없습니다.
지혜를 이야기하고 악을 이야기해도 이 말을 듣고 스스로 지혜로워질 인간 없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는 여전히 악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님의 교회를 친히 새롭게 만드십니다. 그 방식은 오늘 본문처럼 부수시면서 만드시는 방식입니다.
그 부수시는 작업 속에 들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주님이 세우시는 주님의 증인입니다.
고린도전서14장20-25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고 합니다.
이 본문에서 지혜라는 단어는 소피아(sofiva)라는 단어가 아니라 프헤렌( frhvn )이란 단어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 인간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이용합니다. 이 단어는 마음으로 지각하고 판단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방언과 예언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왜 이런 곳에 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느냐는 말입니다. 악이라고 하면 지옥과 관련되어 있는 단어잖아요.
이미 예수님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 고린도 교회인데, 그 뿐만 아니라 은사를 받은 사람들인데 이들에게 이런 기분 나쁜 용어를 사용한다는 자체가 너무 무례한 것이 아닙니까?
방언에 대한 용도를 잘 모르는 것을 두고 악이라고 한다면 이건 너무 심하잖아요. 뭐 좀 모를 수 있지 모르는 게 죄냐라고 따질 수 있잖아요.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보는 방식은 다 이런 식입니다.
피조물인 주제에, 죄인인 주제에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아멘하면 되는데 이런 말씀들이 주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나도 나름대로 말씀을 해석할 수 있고 지킬 수 있다는 입장이지요. 잘못 알았으면 교정해 나가면 되지 좀 모른다고 악이라고 해 버리면 어느 누가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니까 갑자기 이슬람교가 생각납니다.
그 사람들은 코란 즉 반드시 읽어야 할 것을 알라신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겐 코란에 대한 해석을 용납하지 않는답니다. 이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은 인간이 어떤 말을 듣는 순간 해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내 네 명까지 된다고 했는데 그러면 어떤 종류의 아내인지는 자기가 해석해서 결정을 내리는 겁니다.
키는 몇 센티미터, 몸무게는 얼마, 당은 얼마, 혈압은 얼마, 머리카락 수는 몇 개, 점은 몇 개 있는지, 발의 크기는 몇 인치 인지 이런 것들은 자기가 편리한 대로 해석해서 적용합니다.
앞서 제가 말씀에 아멘하면 된다는 말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지 말라는 겁니다.
말씀에 아멘하면 된다는 말은 말씀은 무조건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본성은 십자가 증거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기 자신도 나름 주인행세 할 수 있는데 왜 내가 죄인이냐는 것이지요.
특히 이미 세례 받았고 예수님을 믿는 본인, 헌금도 할 만큼 했고, 봉사도 할 만큼 했고, 기도도 할 만큼 했는데 이런 나에게 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목사들에게 당신 지옥갈 죄인이야라고 해 보세요.
아마 펄쩍 뛸 겁니다.
그저께 대학원 동기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 목사님이 아주 훌륭한 말씀을 하셨어요.
제가 대학원 다닐 때 좀 별났습니다.
삼년 내내 논쟁하다 시간을 다 보냈거든요.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늘 상대를 공격했으니 동기들을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이건 제 생각이 아니고 동기들이 그렇게 말을 해요.
그런데 이것이 중요한 포인터가 아닙니다.
동기들 나이가 벌써 오십 넘은 사람들도 있고 대부분 오십이 다 되었어요.
그래서 하는 말이 오랫동안 지나 와 보니까 다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이 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동기 모임에 저를 한번 오라는 겁니다.
벌써 목회를 이십년 가까이 한 사람들이잖아요.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인간들을 만났을까요?
그러다 보니 성불이 된 모양입니다.
그런데 성불된 이들에게도 복음을 이야기 하면 안색이 바뀝니다.
아무리 십자가 이야기해도 그 십자가는 성경에서 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라는 겁니다.
그들은 이미 구원 속에 들어 와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니 이제 구원 이야기를 그만 하고, 달리 말하면 복음, 십자가 이야기는 하지 말고 같은 학교 졸업했으니 좋은 일 있으면 함께 좋아해 주고, 슬픈 일 당하면 함께 위로해 주면 얼마나 좋은가라는 것이지요.
이들에겐 영적 싸움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나에게 네가 싸우는 싸움을 보여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갈라디아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십자가의 원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더 잘 믿기 위해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이 십자가의 원수라고 말입니다.
지금 교회에 이런 이야기가 통하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지금 교회는 예수님도 믿고 십일조도 말라기에 나오는 말씀처럼 세금공제 없이 십분의 일을 드리고, 주일날 새벽부터 저녁까지 말씀 읽고, 예배 참석하고, 성도들을 돌아보고, 교회 봉사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자들을 칭찬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십자가의 원수들이 오늘날 교회의 교인들이라면 목사들은 두 손 들고 환영할 것입니다.
영적 싸움이라는 것이 사람 눈에 보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피가 전파되는 곳에서 벌어지는 것이 영적 싸움입니다.
중요한 것은 열심히 안식일 지키고, 할례 행한 자들에겐 사도 바울의 영적 싸움은 말 뿐이 싸움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악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생각하듯이 살인하고 강도질 하는 그런 것을 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이었습니다 .
마가복음2장16절을 보면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라고 비난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당당합니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기도할 수 있을 정도로 말씀대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이들 눈에는 세금을 왕창 때려 자기 입에 넣고 또 다른 사람 입에도 넣어주는 세리들은 악한 자들 중 악한 자들이지요. 15절에 보면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죄인들이라고 했을 때 누가 볼 때 죄인들 이라는 말입니까?
바리새인들이 볼 때 죄인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볼 때에는 이들은 모두 악한 자들, 곧 지옥 불에 들어가야 하는 자들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눈에는 어떻습니까?
모든 자들이 죄인입니다. 문제는 말씀을 지키는 자들은 절대로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15장11절 이하를 보면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 데 그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아들 중 문제를 누가 일으킵니까?
둘째 아들입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재산을 자신에게 미리 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큰 아들 작은 아들에게 각각 나누어 주었습니다.
며칠 후 둘째 아들은 재산을 몽땅 들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 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날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이 들면 사람들 마음이 완악해 지잖아요. 비로소 궁핍했습니다.
그래서 돼지 치는 일을 하면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지만 그것마저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아버지의 품꾼의 하나로 봐달라는 심정으로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버지는 재산 다 날린 둘째를 위해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좋은 옷을 입히고 손 가라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기우고 살진 송아지도 잡았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로 인해 즐거워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맏아들은 밭에서 일하다고 돌아와서 이 상황을 목격했습니다.
여러분이 큰 아들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아버지 말씀을 잘 들어 지금도 밭에 나가서 종들을 관리 했던지 어떻게 했든지 일을 열심히 하고 왔습니다.
화가 날까요 화가 나지 않을까요?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벌인 동생을 받아들인 아버지가 어떻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동생이 재산 들고 멋대로 살다 재산을 다 날렸을 때 자신은 그동안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없이 살아 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자신을 위해서는 아버지가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아 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지금 이 심정이 누구심정인고 하면 바로 바리새인들 심정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미워요.
예수님을 죽이지 않고는 살수 없습니다.
천국이라는 곳은 이렇습니다. 아버지의 긍휼을 가장 제대로 보여주는 곳이 천국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잘났는가를 자랑하는 곳이 천국이 아닙니다.
이런 자들에게 적합한 곳은 지옥입니다.
주님이 세운 교회는 십자가 사랑을 증거하는 곳이지 인간 자랑하는 곳이 아닙니다.
오늘본문 21,22절을 봅시다.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아니 방언 주실 때 미리 교육해서 방언을 은사로 주시지 왜 이렇게 한 박자 뒤에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방언 은사 주실 때 이것까지 완벽하게 한 세트로 넣어 주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왜 따로 국밥으로 주셨습니까?
그 이유는 교회가 교회 자랑하지 말고 주님의 피 자랑하기 위해 세웠기 때문입니다.
교회 십 주년, 이십 주년, 백 주년 행사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자랑할게 있다는 겁니다. 그 자랑하는 것이 십자가 입니까? 아닙니다. 년수를 자랑하지요. 수에 칠 가치도 없는 년수를 자랑질 하고 있으니 얼마나 마귀적입니까?
목회 오십년 한게 뭔 자랑입니까?
살지 않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면 먼지가 가득 쌓여 있듯이 죄만 가득 쌓여 있을 뿐입니다.
심판의 기능을 하는 방언의 기능은 방언하는 자에게도 예외 없이 심판의 기능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고린도 교인들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복음 전하게 해서 얼마든지 지옥 보낼 수 있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복음 전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여기는 자들은 반드시 지옥 갑니다.
그러나 지혜에 있어서 완성된 자들은 이들과 다릅니다.
어떤 자들이 완성된 지혜를 받은 자들일까요?
23을 봅시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 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13절에 보면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니 조롱하여 말합니다. 새 술에 취한 자들이라고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미쳤다는 말이지요.
문제는 이들이 방언을 무슨 용도로 사용한다는 말입니까?
자기 자랑 용도로 사용하니 오히려 방언하는 교회가 미친 자들이라고 조롱받는 다는 말씀입니다.
방언 하는 자들은 책망 받을 마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24절을 보면 예언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 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책망, 판단,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이것이 예언의 기능이지요.
바로 복음입니다.
달리 말하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인간들은 책망 듣는 것, 판단 받는 것, 마음속에 숨긴 것들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거부합니까?
방언은 좋아하지만 통역을 거부합니다.
예언을 싫어합니다. 복음을 싫어합니다. 자신은 책망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마음속에 시커멓게 쌓인 죄들이 바람을 타고 펄펄 날아오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한 일이 무화가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었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 일입니다.
드러나는 것이 싫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로 드러나는 것이 싫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거부합니다.
복음을 전하면 발작합니다.
사무엘상18장6-9절을 봅시다.
“무리가 돌아 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 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이렇게 주님께서 사울왕의 본성을 드러나게 하셨으면 다윗을 죽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처럼 죄 중에 태어난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될 터인데 인간은 결코 자신 스스로 그런 결심을 내릴 수 없습니다.
지혜를 이야기하고 악을 이야기해도 이 말을 듣고 스스로 지혜로워질 인간 없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는 여전히 악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님의 교회를 친히 새롭게 만드십니다. 그 방식은 오늘 본문처럼 부수시면서 만드시는 방식입니다.
그 부수시는 작업 속에 들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주님이 세우시는 주님의 증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