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강해 87

푸른 섬 2016. 8. 2. 16:24
어지러움과 화평의 하나님
고린도전서14장 26-33
복음을 전하게 되면 요란해 집니다. 가족 모임이 되었든지 아니면 교회가 되었든지.
그러면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이 꼭 한 마디 합니다.
하나님의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화평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입을 다물게 되지요. 왜 그렇습니까?
성경말씀을 말했으니 들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 사람이 분명 고린도 전서 14장33절을 인용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그 말이 말씀이 될까요? 복음은 세상을 부정합니다. 세상을 부정하는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복음은 그렇게 비판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꼭 인용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태복음 7장 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그러면 이 말씀을 인용했다고 해서 이 말이 말씀이 될까요?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유대 땅에 오셨을 때 살았던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율법을 지켰습니다. 제사도 말씀대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믿은 여호와 하나님, 그들이 지킨 율법, 그들이 드린 제사가 무슨 짓을 했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이 믿은 여호와하나님은 우상이었습니다. 그들이 지켰다는 율법은 그들 자신들을 위한 율법이었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드린 제사는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분명 단어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분명 신명기 말씀대로 율법을 지켰습니다. 확실히 레위기 말씀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그렇게 미워합니까?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속이 시원 합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비판하지 말라’라는 말씀과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화평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분명 성경에 있는 말씀인데 사람들은 이 말씀을 말로 바꾸어 버립니다.

말씀이 되면 말씀은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말이 되어 버리면 말이라는 것은 항상 인간 자신들을 위해 사용하거든요.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말로 바꾸어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식으로 사용합니다.

고대의 천문학이라고 해야 할까요?
점성술이지요. 별을 보고 이름도 짓고 별을 보고 운명도 보고 예언도 하잖아요.
요즘 우리는 별자리 점 이라는 것을 얼마나 쉽게 볼 수 있습니까?

물병자리, 물고기 자리, 양자리, 황소자리, 쌍둥이 자리, 게자리, 사자자리, 처녀자리, 천칭자리, 전갈 자리, 사수자리, 산양자리 별점이 있습니다.
매월20일에서 다음달 19일까지 속한 생일 날짜별로 운세를 보는 겁니다.
제가 9월생이니 천칭자리가 됩니다.
‘그대보다 불행한 이들이 있음을 깨달으라, 오늘 이들을 발견하게 되리니 줄 수 있는 한 도움을 주도록 하여라’
2월생이면 ‘당신의 일에 관심을 갖는 듯한 사람을 경계하라. 당신을 이용하려는 흑심을 품고 있다.’
뭐 이런 식으로 별 점을 보는 겁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모든 점들이 다 누구를 위한 것인고 하면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지금 별점 논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별을 보면서 사람들이 기껏 생각해 낸 것이 저 별이 나에게 무슨 도움을 줄까라는 겁니다.

지금은 천문학이 발달해 지구 같은 행성을 수천 개를 발견했지요. 이런 과학자들이 별점을 보겠습니까? 별점을 안보죠. 그러면 무슨 생각할 까요?
어떻게 하면 다른 지구 같은 행성에 가서 살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잖아요.

별들을 연구하면서 십자가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를 생각하지요.
도움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채워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살아가면 되는데 꼭 알고 싶어 해요. 선악을 아는 지식이 들어간 인간들은 지식의 확보가 선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정보를 많이 아는 자가 많은 돈을 벌잖아요. 결국 선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나 잘되는 것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말씀을 외워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시켰지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많이 아는 것, 그리고 많이 알 뿐만 아니라 말씀을 지키는 것이야 말로 자신에게 가장 큰 힘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땅에서는 축복을, 죽어서는 영생을 보장해 주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힘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등장하셔서 그들이 힘이 된다고 생각한 것들을 허물어 버립니다.
마태복음 5장11절에 보면 모든 말씀을 누구에게 적용해 버립니까?
“나를 위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심령이 가난한 것도, 애통하는 것도, 온유한 것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도, 긍휼히 여기는 것도, 마음이 청결한 것도, 화평케 하는 것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도 다 예수님께 수렴됩니다.

이미 말씀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면서 나름대로 질서를 제대로 잡고 있는 사두개인들이나 바리새인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모든 것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건 해도 너무 하잖아요.
예수님으로 인하여 욕 얻어먹고 핍박 받는 일이 구약 선지자들이 당했던 바로 그 일이라고 하시잖아요.
이게 말이 안 되는 이야기거든요.

선지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핍박받았습니까?
예레미아가 예수님 때문에 미움 받았습니까?
요나 선지자가 예수님 때문에 고난당했습니까?
아무리 살펴 봐도 예수님 때문에 고난당한 이야기가 없어요. 단지 여호와 하나님 말씀 때문에 고난당하고 미움 당하고 핍박당하는 것은 나오지요.

우리가 구약 성경을 읽어도 그렇잖아요. 유대인들이 바보가 아니잖아요. 구약 성경을 얼마나 열심히 연구 했겠습니까?
선지자들이 왜 핍박당하고 고난당했는지 얼마나 잘 알 고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이 다시는 자신들 조상들처럼 선지자들을 핍박하는 일이 없도록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말씀대로 살고 있잖아요.

이게 뭔고 하면 말씀을 말로 바꾼 겁니다. 이들 눈에는 예수님이 안 보여요.

복음 전하면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화평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자들의 행태도 바로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행한 행태와 똑 같습니다.

어지럽다는 말은 시끄럽다는 말이지요. 싸운다는 말입니다. 싸움의 반대말이 화평이잖아요.
분명 오늘 본문에서는 찬송시,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 통역함 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라고 합니다.

달리 말하면 싸우지 말고 화평하게, 질서 있게 하라는 거지요. 그 이야기가 27절부터 나오잖아요.
“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더불어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서 말할 것이요”
29절 봅시다.
“예언 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교회를 어지럽게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언의 경우도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는다고 하잖아요.

분명 교회란 질서 있는 모임이고 화평한 모임이지 시끄럽게 싸우는 모임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앞서 제가 언급한 사람들이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자신 있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무엇을 모르는고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세상이 어둠임을 안 믿어요. 무슨 말인고 하면 예수님의 등장 전에는 세상이 나름 괜찮은 동네, 햇볕이 쨍쨍 내리 쬐는 살만한 세상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등장은 세상이 개판이라는 것을 확정하는 등장입니다. 어둠이요 악한 세상임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세상이 어둠임을 들추어내는 방식으로 일을 하실까요?
그냥 좋게 구원해 주시면 안됩니까?

왜 다윗에게 모태의 태중에서부터 죄인임을 까 발리셔야 속이 시원하신 겁니까?
그냥 우리야 아내를 범했다는 것이 죄라고 하시면 될 터인데 왜 그런 것을 죄라고 하지 않고 모태의 태중에서부터 죄인임을 모르는 것을 죄라고 들추어 내느냐 말입니다.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면 되지 도무지 바꿀 수 없는 자임을 까발려서 무엇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래야만 십자가만 전파 됩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몸된 교회에 성령을 주신 이유는 십자가만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폭탄을 던지는 겁니다. 마치 이스탄불 공항에 폭탄을 터뜨리듯이.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한 쪽은 말씀대로 질서 잡자는 자들이 등장할 것이고 다른 한 쪽은 저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는 자들이 등장하겠지요. 주님이 이런 자들을 교회로 세우시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율법을 주셔서 유대교를 만들어 내신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주님은 교회 속에서 참된 교회를 만들어 내시는 겁니다.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하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너무나 질서 있는 피조세계가 만들어 지잖아요.

이렇게 만들었다고 하니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이 무슨 생각을 할까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절대 하나님 스스로 파괴하시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물로 심판을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세상을 노아 언약 속에 다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정결한 짐승의 피로 인해 온 세상이 덮혀진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인간들이 어떤 생각을 할까요?
노아 홍수 심판 생각하지 않습니다.

베드로 후서3장4-5절을 봅시다.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이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들은 땅의 출발점을 잊어 버렸습니다. 말씀에서는 의도적이지요. 땅이 멸망당하면 안 되잖아요. 살기 위해서 살아가는데 만일 죽기 위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허무한 인생이 됩니까?

그래서 늙어마게 친구들끼리 캠핑카 타고 여행도 다니고 만나고 싶은 사람과 데이트고 하는 거잖아요.

땅의 멸망은 혼돈입니다. 질서가 아닙니다. 살고자 하는 내가 볼 때에는 어지러움입니다. 그래서 땅은 처음부터 멸망당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요.

흙으로 만든 이유가 흙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 너무 싫어요. 아벨의 이름처럼 허무하게 인생이 끝나는 것은 싫습니다. 그건 질서가 아니지요. 그건 화평이 아닙니다. 그건 어지러움이요 그것이 전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왜 그러한 격랑 속에 집어넣습니까?

요한 계시록 22장 20절에 보면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실 때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빨리 오시라고 할까요 아니면 더 있다고 오라고 할까요?

격랑 속에 집어 넣어야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가 나올 것 아닙니까?

성도를 이 땅에 살게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잖아요. 주님이 속히 오신다고 하셨으니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가 되는 상태로 살도록 이 땅을 살게 하시는 겁니다.

교회가 질서 잘 잡히면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가 되겠습니까?
아니지요. 주님. 우리 지금 잘하고 있습니다. 빨리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수십억, 수백억 들여 예배당 건물 지었는데 오시려는 예수님을 빨리 오시라고 할 수 있을까요?
교회가 개판이 되어야 됩니다. 어지러워야 됩니다. 그래야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가 튀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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