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

창세기27:1-14

푸른 섬 2007. 7. 16. 12:21
 

죄인을 사용하시는 주님

창세기27:1-14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우리들이 별로 좋아 하지 않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들이 좋아 하지 않는 내용이라고 제가 말씀드린 이유는 이렇습니다.

어떻게 해서 믿음의 조상들이 이런 모습을 보일까라는 생각을 우리들이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삭이 어떤 사람입니까? 약속의 씨, 약속의 자녀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서 이미 복중에 말씀하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가 축복을 에서에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취향대로 에서에게 축복을 해 주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리브가는 어떻습니까?

리브가도 역시 자신의 취향대로 야곱이 축복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25장28절을 보면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참 희한하지 않습니까?

부모가 어찌되었는지 자식 둘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취향대로 한쪽을 편애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니 이미 대결구도는 오래 전부터 있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리브가는 하나님의 축복은 반드시 야곱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이삭은 에서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당연히 생각했을 것입니다.


특별히 이들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이 이삭 자신이 누구에게 축복을 하느냐, 누구에게 저주를 내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축복이라는 것은 단순히 복을 받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자로 서게 된다는 사실을 또한 알고 믿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어진 복이 이삭이 누구에게 축복을 내리느냐에 따라 그 복을 이어받게 된다는 사실을 이삭과 리브가는 너무나 잘 알 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이삭이 하나님께서 이미 야곱과 에서가 태중에 있을 때 하신 말씀과 상관없이 자신이 에서를 축복해 줘 버리면, 하나님께서도 역시 에서를 축복하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믿음이 아닙니까?


이것은 단순히 아버지로서 하는 축복과는 개념이 다른 내용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대리하는 축복권을 아버지 이삭이 갖고 있는 것입니다.


리브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리브가도 이러한 사실을 알기에 자신이 사랑하는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사랑하니까 무조건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물론 어떤 사람은 리브가가 믿음이 있었다고 해석을 하는데, 물론 그렇게도 볼수 있지만, 25장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기 보다는 둘다 자신이 좋아하는 아들, 사랑하는 아들이 축복받기를 원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그러니 12,13절을 용감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 진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뵈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


자신의 목적에만 관심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받을 저주조차 자신이 받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리브가가 야곱을 얼마나 편애 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마음 속에는 에서와 야곱이 태중에 있을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조차도 리브가는 자신이 사랑하는 야곱이 반드시 축복받아야 한다는 이유속에 쏙 들어가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조차 자신이 바라는 욕망을 이루는데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이 그냥 에서를 축복해 버렸어도 될 터인데 왜 사냥하여 별미를 먹게하여 자신이 죽기 전에 마음껏 에서에게 축복하게 하라고 합니까?

이것도 마찬가지지요.

자신의 마음이 별미를 먹고 흡족하니 기분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기분 좋음을 마음껏 자신이 사랑하는 에서를 축복하는 것으로 이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공부 제목을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실수 속에서도 언약의 꽃은 피고.


뭔가 알기는 좀 아는 것 같은데 확실히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에서와 야곱, 이들은 단순히 실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이들 자신의 삶의 방식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이들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말씀이 있어 보았자 이 말씀은 결국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할 뿐입니다.

창세기 25장23절을 다시 한번 봅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 말씀을 이삭과 리브가는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큰 자가 어린자를 섬긴다라고 하니까 우리는 곧장 형이 동생을 섬긴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예수님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큰 분입니까 작은 분입니까? 큰분이시지요. 그런데 그분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작은 인생들을 섬기시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너무 많이 뛰었습니까?

그러면 이후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께 한 대 얻어터진 이후 형에게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이전까지는 자신이 이기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형을 두고 자신의 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주께 은혜를 입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큰 자가 어린자를 섬긴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만일 이것이 문자적으로 해석하자면 먼저는 에서가 야곱에게 무릅을 꿇어야 하고 에서가 야곱에게 주라고 해야 하고, 에서가 야곱으로부터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성경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이해하는 식으로 큰자가 어린자를 섬길 것이라는 말을 우리는 무조건 야곱이 주가 될 것이라고 단정을 해 버립니다.


물론 맞습니다 마는 이 말씀이 그렇게 간단한 말씀이 아니지요.


그런데 그 주가 되는 것은 세상적인 주는 아닙니다.


지금 이삭이나 리브가, 야곱이나 에서,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식으로 이해했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면 세상적인 주로, 막강한 권세와 권력, 재물을 누리는 인생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은, 결국 누가 큰 자인고 하면 궁극적으로 섬기는 자가 큰 자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20장25-28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 남을 다스리는 자리, 즉 세상적으로 한 자리 차지 할 수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자신이 이방인에게 넘기움을 받고 능욕받고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는데 제자들은 어떻게 하면 한자리 차지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삭과 리브가, 에서와 야곱, 이들이나 제자들이나 차이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욕심대로 끌어 당겨 이용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자신의 욕심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려고 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데 이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삭이 어떻게 그렇습니까? 이삭은 리브가와 다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도 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질문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그 말씀을 해석했다면 이삭이 당연히 에서에게 축복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미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다(롬9:13)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무조건 이삭의 믿음없음, 말씀 무시를 이야기 할지모릅니다마는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자신의 일을 하실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이것을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삭, 리브가,에서, 야곱, 이들 모두는 오늘 본문에서 불신자로 나타납니다.

죄인들로 나타납니다.

제가 왜 죄인들이라고 말씀드리는고 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방식대로 이루려고 했다는 사실에서 죄인으로 드러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이 없지요.


무슨 말인고 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어떻게 이루실지 이들은 생각도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신다고 이들은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이루시는가?

바로 오늘 본문처럼 이루십니다.


죄인을 사용하시어 그 죄인들의 죄를 드러내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우리들을 당황스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인간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그 말씀을 지키고 성취하려고 덤벼듭니다.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좋아하는 그런 탐욕에서부터 나온 것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죄인들의 행동속에서, 결정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은 반드시 인간들의 흔적속에서, 즉 인간들이 자신들 나름대로 자신의 뜻을 펼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은 그 속에서 인간의 죄를 고발하면서 그 뜻을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십자가 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죄임을 밝히시면서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서 하신 언약을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에도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흔적을 남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애써지요.


그런데 우리는 항상 어떤 자로 드러나는고 하면 나는 죄인으로 드러나며 예수님만이 의로운 분으로 드러나는 식으로 성령님께서는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게 되면 내가 완전히 변화하여 굉장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깝게 살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삭과 리브가의 생각과 같은 사고 방식입니다.


이런 죄를 성령님께서는 드러내시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는 한걸음 한걸음, 발자국, 발자국은 바로 이삭과 리브가, 에서와 야곱의 삶을 되풀이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내 필요로 끌어당기고, 십자가도 내 필요로, 내 욕심을 채워주는 것으로 수시로 이용하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안할려고 해도 말씀을 조금만 떠나 버리면 우리의 탐욕이 불꽃놀이할 때 쓩 올라가는 것처럼 쓩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니 오늘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인을 사용하시여 주님의 언약을 이루심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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