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을 주셨나이다.
창세기30:25-43
야곱이 라헬이 요셉을 낳을 때에 라반에게 말하기를 자신을 보내어 자신의 고향 본토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할까요? 고향이 그리워서일까요?
아니면 다른 뜻이 있을까요?
29절,30절을 봅시다.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짐승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나이다.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때에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수고 해 주어도 자신의 집을 세울 가능성이 없어 보여서입니다.
31장7절을 보게 되면 야곱이 자신의 아내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
더 이상 삼촌 라반의 착취를 참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수고의 정당한 댓가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무엇을 알고 있는고 하면 자신이 복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라반의 소유가 많았졌다는 사실을 알 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누가 또 알고 있는가 하면 삼촌 라반도 알고 있습니다.
27절을 보세요.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유하라”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이 마음을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더 이상 외삼촌 라반에게 속을 수 없고, 그리고 자신의 가문을 세우기 위해서는 라반의 마음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라반이 야곱의 의도대로 반응합니다.
28절입니다.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31장7절을 보게 되면 이전에도 수없이 품삯을 정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7년동안 일하면 라헬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레아를 줌으로 결국 야곱은 14년을 라헬을 얻기 위해 일한 것입니다.
삼촌이 속인 것이지요.
이러한 일이 수도 없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지금 외삼촌의 마음을 읽고 더 이상 외삼촌 라반이 자신을 속일 수 없는 방법으로 자신의 집을 세울 방법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31절을 보면 라반이 이렇게 �습니다.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야곱이 뭐라고 답합니까?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32-33절입니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떼로 두루 다니며 그 양중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 내며 염소 중에 점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의가 나의 표징이 되리이다 내게 혹시 염소 중 아롱지지 아니한 자나 점이 없는 자나 양 중 검지 아니한 자가 있거든 다 도적질한 것으로 인정하소서”
이러자 라반이 흔쾌히 승낙합니다.
자 그러면 여기에서 야곱이 왜 이런 제한을 했을까요?
야곱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얼룩얼룩한 것과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낳게 하는 지를 말입니다.
야곱이 오랫동안 양을 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든 중 얼룩얼룩한 것 점있는 것 이롱진 것을 낳게 하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이지요.
37절을 봅시다.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떼에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는지라”
그런데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말도 안돼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얼토당토 않는 내용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아마 야곱이 우연히 이런 일을 해 보게 되었고, 그야 말로 놀랍게도 얼룩얼룩한, 점이 있는것, 아롱진 것을 낳게 하는 방법을 알게 된 것입니다.
물론 야곱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미 야곱은 삼촌 라반에게 자신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말 속에 이런 치밀한 계획을 숨기고 있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것도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삼촌 라반이 승낙하자 곧장 그는 실행에 옮깁니다.
삼촌 라반이 흔쾌히 승낙한 이유는 양과 염소중에 얼룩얼룩한 것, 점있는 것, 아롱진 것들이 나올 확률이 굉장히 낮기 때문일 것입니다.
틀림없이 삼촌 라반은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상 염소나 양 중에서 얼룩얼룩한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은 아주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놈이 태어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기에 자신의 재산에는 전혀 손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철저한 조치를 취합니다.
35절을 보세요.
“그 날에 그가 수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자와 점있는 자를 가리고 암염소 중 흰 바탕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를 가리고 양 중의 검은 자들을 가려 자기 아들들의 손에 붙이고 자기와 야곱의 사이를 사흘길이 뜨게 하였고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떼를 치니라”
교미를 통해 조금이라도 얼룩무늬 있는 자, 아롱진 새끼를 낳지 못하게 하기 위해 철저히 갈라 버립니다. 아애 사흘길이라는 거리를 두게 합니다.
그래도 야곱은 불평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실 복의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야곱의 계획대로 되었습니다.
이제는 야곱이 자신의 새끼양을 라반의 양과 서로 대하게 하여 구분하여 둡니다.
서로 섞이지 않게 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속여온 삼촌 라반에게 완전히 물먹이는 것이지요.
42절을 보세요.
약한 자는 라반의 것이요 실한 자는 야곱의 것이 된지라.
철저한 계획속에서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을 이용해서 외삼촌 라반에게 받아온 지금까지의 서러움과 열받음을 단숨해 해결해 버렸습니다.
43절을 보세요.
이에 그 사람이 심히 풍부하여 양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많았더라
놀랍지 않습니까?
야곱은 이미 자신이 이렇게 될 것 까지 믿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 수 십년 살아온 것을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약속대로 복을 주심을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33절에서 이렇게 당당히 말하는 것이지요.
나의 의가 나의 표징이 되리이다.
그 정도로 자신 만만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라반의 속임보다 더 큰 속임을 행한 야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라반이 얼마나 자신의 탐욕을 위해 야곱을 이용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야곱이 자신의 탐욕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지도 볼수 있지요.
우리들이 오늘본문을 통해 오해 하지 말아야 하는 사실은 야곱이 이렇게 하나님을 잘 믿었으니 큰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고 방식은 장차 이스라엘 국가로 형성될 때 이스라엘이 가져야 할 사고 방식과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품은 자가 참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이지요.
자신의 죄를 알고 하나님의 긍휼이 얼마나 큰 가를 아는 자들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언약궤를 앞장세웁니다.
자신의 죄악의 증거가 담겨있는 언약궤이지요.
둘째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가 든 항아리가 언약궤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 죄악을 피로서 덮어 버립니다.
야곱은 지금 단단히 오해를 합니다.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결국 십자가지심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긍휼이 담겨있는 이스라엘을 통해 이곳에 합류하는 자들은 복을 얻고, 그렇지 않는 자들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긍휼이 빠져 버리면, 은혜를 알지 못하게 되면, 강한나라, 세상나라를 추구하게 되면 여지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야곱의 사고 방식은 전혀 아벨의 사고방식, 즉 셈과 야벳의 사고방식을 닮은 것이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와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인간은 야곱의 범주를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셈이나 야벳도 하나님의 은혜로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 줄 수 있는 마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본성은 지금 우리들이 보는 야곱이나 그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과 똑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죄인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할 때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우냐는 것입니다.
오늘본문을 통해 이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실제로 성도는 복의 근원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도가 가는 곳마다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복의 근원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되신 예수님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미 야곱의 경험을 한 자들이지요.
그 죄를 아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믿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이 가는 곳 마다 하나님의 복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 복이 무엇입니까?
야곱이 이해한 복일까요? 아닙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입니다.
영생의 복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두려워하거나 주눅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 마다 복이 임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 복에 합하지 않는 자들에겐 저주가 되어 버리지요.
말씀을 맺겠습니다.
야곱처럼 우리에게도 이런 자신 만만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야곱처럼 엉뚱한 자신 만만은 안됩니다.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로마서8장35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글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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