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

창세기29:21-35

푸른 섬 2007. 7. 16. 12:23
 

속이는 인생

창세기29:21-35

우리가 야곱의 모습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수일같이 여겼습니다.

대단한 사랑이 아닙니까?


오직 한 사람을 얻기 위해 7년을 수일같이 여기는 태도. 그러나 이것이 과연 사랑인가? 사랑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선 야곱의 생애를 보게되면 야곱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목표하는 바는 반드시 갖고야 만다는 사고방식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7년을 수일같이 여기고 이제 기대하고 기대하던 결혼첫날밤을 지냅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아내가 된 사람이 라헬이 아니고 레아였습니다.


라헬은 곱고 아름다웠지만 레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31절을 통해 보면 안력이 부족하다는 말이 총기가 없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고, 또한 레아는 미모가 상당히 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여자가 자신의 아내가 된 것입니다.

라헬을 위해 7년간을 수일같이 여긴 일이 헛것이 되었습니다.

25절을 봅시다.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께 봉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까”

속이는 데 전문가인  야곱이 속임을 당했을 때 하는 말이 참으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자신이 속이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도 꿈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창세기28장12-15절입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 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그러니 야곱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지지를 받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의 행동방식들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자신을 속인 외삼촌에게 이런 말을 당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니까?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는 것입니까?

나의 사랑과 나의 사랑의 수고 7년을 이렇게 헛 것으로 돌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배신감이 얼마나 대단했을까요?


이에 대해 라반이 궁색한 변명을 합니다.

26절입니다. 

“라반이 가로되 형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그리고 하는 말이 라헬을 얻기 위해 7일을 채우라 그러면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네가 그를 위하여 또 칠년을 내게 봉사할지니라.


외삼촌 라반의 수법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라헬 딸 하나를 이용해 레아도 시집보내고, 또 14년동안 야곱을 부려 먹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야곱이 순순히 받아들일까요?

당연히 받아들입니다.


야곱의 성격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얻고 맙니다.

그의 이름의 뜻대로 남에게 지고는 못사는 성격입니다.


그리하여 칠일을 채워 라헬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칠년을 라반에게 봉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야곱이 레아와 라헬 두 아내를 얻었지만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합니다. 레아도 사랑하긴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라헬이 옆에 있기 때문에 레아에 대한 사랑은 항상 부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외삼촌 라반의 속임을 통해 야곱이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 삶의 방식을 고스란히 반복하게 되는 두 아내를 얻게 하셨습니다.


31절부터 자녀낳기 경쟁에 돌입하는데, 그 내용이 너무나 재미있습니다.

31절을 보게 되면 “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더라”


하나님께서 레아를 불쌍히 여기셔서 라헬에 비해 태를 먼저 여셨습니다.

그래서 레아가 첫 번째 아들을 낳습니다.

그 아들 이름이 르우벤입니다.

르우벤의 뜻은 보라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왜 이렇게 이름을 지었습니까?

32절 후반부에 나오지요.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재미 있지 않습니까?

물론 레아는 심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총이 없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아들을 낳게 해 주시니까 레아는 곧장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을 어디에 이용합니까?

라헬에게 빼앗기 남편의 사랑을 이제는 자신에게로 돌리는 데 이용하려고 합니다.

정말 이것이 성공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또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 이름이 무엇입니까?

시므온입니다. 

시므온의 뜻은 “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셨음으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레아는 지금 여호와께서는 라헬의 편이 아니라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 이름을 레위라고 합니다.

이 뜻은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보게 되면 레아는 아들을 낳았으니 당연히 남편의 사랑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야곱의 마음은 여전히 라헬에게 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아들을 낳습니다.

이름이 유다입니다.

그 뜻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리다.라는 뜻입니다.

왜 이렇게 이름을 지었을까요?


자신이 완벽하게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아마 유다라는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이 정도로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어 주셔서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셔서 남편의 사랑을 받게 해 주시니 여호와를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야곱은 지금 기가찬 일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당하고 있습니까?


과거 자신이 했던 속이고 뺏앗는 일을 외삼촌 라반에게 자신이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14년을 라반에게 봉사하여 기여히 자신의 목표를 이룹니다.


그런데 이런 목적을 이루는 중에 그는 또한 자신의 과거 모습을 자신의 아내 레아를 통해 보게 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라헬이 없었다면 레아에게 이런 모습은 나오지 않았을텐데, 자신이 많이 사랑하는 라헬이 곁에 있음으로 레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긍휼을 자신의 목적, 즉 남편사랑 받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용해 버립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자식을 주셨는데, 레아는 그 모든 자식을 남편사랑 받는 것으로 싹 바꾸어 버리는 일이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야곱 자신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취한 행동들에 대해 제대로 된 행동인가를 삼촌 라반과 자신의 아내 레아를 통해 지적받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죄인의 죄악된 모습을 사용하시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나 그 죄인들에게 자신의 삶을 통해 반드시 그 죄를 알게 하신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앞으로 계속해서 더욱더 분명히 드러나게 됩니다

요셉의 죽음도 야곱이 경험해야 하는 필수 코스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인간은 무엇이든지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만 살아갑니다.

외삼촌 라반이 그러하며, 야곱이 그러하며, 레아가 그러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우리도 그러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지만 우리도 이들 야곱이나 레아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우리는 우리의 현 상황을 옹호하는 쪽으로 이용하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수시로 그렇게 하지요.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런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라반처럼, 야곱 처럼, 레아처럼 살지 말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런 결심을 어디 한 두번 했습니까?

우리가 얼마전 이삭과 리브가를 보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나이가 얼마입니까?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았는데 결국 자신의 편애대로 축복을 하려고 야단 법석을 떨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런 본모습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야곱처럼, 레아처럼 살지 않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그것도 사실 잠시동안, 그리고 가끔씩 그렇게 살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느끼는 것은 제자리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삭을 보면 완전히 신앙의 퇴보 아닙니까?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은 이런 우리 자신들의 죄를 다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능력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들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첫째 정말 우리는 죄인인데 주님의 은혜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야곱처럼, 레아처럼 주님의 말씀을 나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정말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저는 정말 레아와 야곱처럼 내 욕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주님의 말씀에 내가 오히려 순종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나의 온 삶이 주님의 십자가 피 능력에 있음을 증거하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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