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군대. 367,360
창세기32장1-12
야곱은 길을 진행하는 중에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났습니다.
야곱을 하나님의 사자들을 하나님의 군대라고 부릅니다.
군대라는 용어는 싸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주 흥미 있는 표현입니다.
야곱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을 하나님의 사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합니다.
야곱은 왜 하나님의 사자들을 굳이 하나님의 군대라고 명명했을까요?
하나님의 사자들은 자신의 편이 되어 군대로써 싸움을 하여 자신을 승리케 해 줄 것이라는 기대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군대를 만났지만 야곱에겐 형 에서로 인한 두려움이 가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는 에서에게 사자들을 자기보다 앞서 보내어 이렇게 말하라고 합니다.
4절 하반절입니다.
“주의 종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가 있사오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고하고 내 주께 은혜받기를 원하나이다 ”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에게 많은 재산이 있으니 당신이 이삭의 재산을 다 받으셔도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장자권을 다 넘겨주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아주 낮추지요. 내 주께 고하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희한하지 않습니까?
큰 자가 어린자를 섬긴다고 했는데, 야곱이 형 에서에게 주라고 말하고, 은혜 받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듯이 장자의 권리, 즉 재산도 나에게 있으니 그 재산도 포기 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 버립니다.
형 에서가 사백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온다고 보고가 왔습니다.
사백인은 결코 작은 군대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318명의 군대로 연합군 그돌라 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백인의 군대는 그 당시로는 상당히 큰 군사력입니다.
7,8절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때로 나누고 가로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그러면 앞서 형 에서에게 보낸 사람들에게 전해달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진정으로 형을 주라고 하는 것이 아니지요.
진정으로 형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위험을 모면히 보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은 하나님의 군대를 만나고도 지금 이런 모습, 즉 심히 두렵고 답답하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첫 번째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자신과 함께 하셨다면 삼촌 라반에게 나타나서어 야곱을 선악간에 판단치 말라는 말씀과 같이 동일하게 에서에게도 나타나셔서 그렇게 처리 되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종들이 그 소식을 갖고 돌아와야 하는데, 에서의 군대는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의 생각이지요.
그러니 갑자기 심히 두렵고 답답함에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방식에서 분명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자신의 편이 되어주시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분명 하나님께서 자신의 편이 되어 주셔서 자신의 계획대로 형에서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심히 두렵고 떨리고 , 급기야 방법은 한 떼를 공격하면 다른 한 떼는 도망가는 방법까지 생각해 냈습니다. 역시 야곱다운 발상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도를 합니다.
기도가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봅시다.
9절부터입니다.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 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모든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소유를 자신은 자격이 없는데 주께서 주셨다라고 고백합니다. 지금도 보잘것 없다는 식으로 기도합니다. 자신을 엄청 낮춥니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역시한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12절에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서에게 자신과 처자들이 죽으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수 없지 않습니까라는 것이죠.
얼른 보기에는 대단한 기도인 것 같은데, 여전히 야곱은 자신이 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너무너무 싫어하지요.
자신이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쉽게 끌어 당깁니다.
왜 제가 이렇게 해서하는고 하면, 내일 본문인 13절 이하에서 다시 새로운 계략을 짜는 것을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작전이 아주 쉽게 성공하리라 생각했던 야곱, 하나님의 군대가 자신을 도와 주지 않자,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다시 작전을 바꿉니다.
그리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을 다 언급하면서 자신을 낮추면서까지 자신은 살아야 한다고 항변합니다.
그리고 다시 작전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짜지요.
여전히 야곱적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입니다.
라반의 집에서도 잠시 후태하는 것 같았지만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자신을 낮추지만 반드시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 시피 하나님께서 언약을 어떻게 완성하셨습니까?
인간이 아닌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언약을 이루시지 않았습니까?
야곱은 지금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자신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한 것입니다.
자기 중심으로 언약을 이해하게 되면 자신은 살아될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신약성경으로 넘어오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요한복음12장25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 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놀라운 말씀이 아닙니다. 야곱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5장15절입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결국 이 말씀대로 사도들은 주의 복음을 전하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주의 복음이 무엇이길래 사람들이 그토록 미워하고 죽이는가입니다.
그것은 야곱과 같이 살고자 하는 인간들에게 그것이 바로 죄라고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이땅에 사는 인간들은 항상 살고자 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율법을 보면서, 율법을 지키면서 그들은 영생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지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것이 죄라고 고발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야곱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늘 살기 위해 발악을 하는 존재들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항상 우리는 자꾸 무엇인가를 챙기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돈이 되었던, 건강이 되었던, 자식이 되었던, 기도가 되었던, 성경 말씀이 되었던, 항상 이것들을 챙기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도가 성령을 받았다면 기도를 통해 자신이 부인될 것이고, 성경 말씀을 통해서도 자신이 부인 될 것이고, 돈을 통해서도 자신을 부인될 것이고, 건강을 통해서도 자신을 부인하게 될 것이고, 자신을 통해서도 자신을 부인하게 될 것인데, 인간은 이것들을 주님이 주셨으니 이것을 하나의 바벨탑으로 만들어 가더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야곱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 해서라도 살아야 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태도로 이세상을 살아갈까요?
기도해서라도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기도 해서라도 죽음의 자리, 내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부인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성도란 어떤 자를 가려켜 성도라 합니까?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자, 주님을 위해 사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죽음을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과 함께 죽음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늘 자신을 부인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만 내세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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