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강해

강해 9

푸른 섬 2008. 1. 22. 00:05
 

십자가 사랑

사무엘상4장12-18

우리는 흔히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열심히 믿었습니다.

그런데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실제로 주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합니까?


아니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성경도 열심히 보고 기도도 열심히 하는데 하는 사업이 망했다.


이럴 경우에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합니까?


틀림 없이 두 가지를 말할 것입니다.


하나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 사람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않았겠지. 그러니 그런 꼴을 당하는 것이 아니겠나.

제대로 믿었다면 저런 꼴을 당하겠나.


아니면 예수 믿는 다는 사람이 왜 저런 일을 당해, 예수라는 신은 없는 것이 분명해.

하나님이 계시다면 결코 저런 사람을 저런 모습을 당하게 할 수 없어.


아니면 또 어떤 반응이 있을까요?

뭐 운이 없었겠지.


세상은 우리인간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흘러가는 것 같이 보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우리 상식을 벗어 날 수 없는 것이 세상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아니 믿긴 믿지만 기껏해야 앞서 말한 두 부류의 사람과 같은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신앙은 우상숭배의 신앙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당장 이런 반발을 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분명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과 그의 죽음은 분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서 당한 저주가 아닌가?


그러니 우리들도 만일 저주를 당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아서 당하는 저주가 아닌가?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지금 엘리 제사장의 죽음과 그 아들들의 죽음, 그리고 궤의 빼앗김, 이 모든 것이 저들의 죄와 관련되어 있지 않습니까?


저들이 제대로 하나님을 경외했다면 이런 일을 당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들이 생각하는 상식적인 성경해석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적용을 합니다.


엘리와 두 아들들처럼 자기 자식을 더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배를 더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지.


이렇게 마음 먹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은 결코 엘리와 두 아들들처럼 그런 꼴을 당하기 싫다는 것이지요.



이런 마음이 바로 엘리와 두 아들들이 갖고 있던 마음입니다.


이사야 53장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면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12절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에 관한 말씀임을 다 잘 아실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 받으시고 돌아가실 때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예수님을 조롱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만 제거하면 자신들에겐 평화가 올 것이란 확신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품습니까?

그야 우리의 죄를 위해서 고난당하신 것이 아닙니까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내일 모레가 성탄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짐승들이 자는 곳에서 태어나시고 구유에 누우셨는데 이런 일은 어떻게 해석합니까?


겸손하게 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 중에 누가 예수님을 믿다가 집도 날리고 가정도 파탄 났다. 이런 사람을 보면 뭐라고 할 것입니까?


그러면 또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인간을 어떻게 같은 자리에 놓을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참으로 편리한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머리 둘 곳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우리 인간이 머리 둘 곳이 없다면 말이 안 된다.


이게 인간들의 편리한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그저께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씨가 당선되었습니다.

교회 장로입니다.


오늘 교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오신 그 기쁨 이상이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그의 고향과 그의 출신학교가 좋아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오셔도 그럴까라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오심은 오히려 왕의 자리가 아니라 사관에 있을 곳이 없고, 머리 둘 곳 없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문전 박대는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그러니 예수님과 우리 인간들의 상식을 비교해 보면 달라도 이만 저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저런 꼴이 났다.

그러니 우리는 말씀 잘 듣자.


이런 생각하라고 오늘 본문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제가 늘 강조하듯이 말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들입니다.

즉 엘리와 두 아들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이미 들어 있습니다.


말씀대로 이들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실 이 죽음 속에 우리도 포함됩니다.

우리 중에 엘리나 그 아들들처럼 살지 않는 자가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지 예수님을 더 사랑합니까?

매일 먹고 살기 위해서 발부둥 치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도 실상 엘리와 그 아들들 꼴이 나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의 이 모든 죄가 용서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본문을 보면서 결심해서, 예수님을 더 사랑해서 우리가 지옥가는 인생, 멸망 받는 인생이 안 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 흘리심, 그분이 말구유에서 나셨기 때문에 우리가 용서받은 자로 복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우리가 죄가 어떤 것인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의 본래 모습이 어떻게 끝장나야 하는지를 눈으로 목격하는 것입니다.


이틀이 지나면 성탄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세상의 주님이심을 증거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이용해 장사하고 돈 벌어 먹게 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즐거움을 배가 시켜 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은 저희 죄에서 구하시고 그렇지 않는 자는 내 버려두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버림받은 자는 오로지 생각하는 것이 자신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죄 용서함을 받은 자는 오로지 생각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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