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강해

강해 8

푸른 섬 2008. 1. 22. 00:05
 

패하는 전쟁

사무엘상4:1-11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전쟁을 할 때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 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누가복음14장31,3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씀을 하시지요.

전쟁을 하는데 계산도 하지 않고 전쟁하는 임금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만을 갖고 이만의 적을 맞이할 때 이 전쟁에서 이길까 질까를 계산하여 사신을 청할 것인지 전쟁을 벌일 것인지 결정할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이야기로 하면 우리 귀에 속 들어올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는데 이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해서 사업을 합니다. 그렇지 않고 누가 망할 것을 염두에 두고 사업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분명히 승산이 있기 때문에 그 사업을 시작하든지 , 아니면 장사를 시작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우리 예빈이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떼를 써서 승산이 있으면 떼를 씁니다. 그러나 승산이 없다 싶으면 곧장 항복해 버립니다.

다른 방법을 사용하지요.


이렇듯 인간은 자신이 승리하기 위해, 살기위해 머리를 너무나 잘 씁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영원한 생명과 관련해서는 이러한 머리를 쓸 수 없습니다.

제가 단정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여러분을 기분 나쁘게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담이래로 영생과 관련해서는 항복을 한 적이 없습니다.


아니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항복하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런 항복들이 결코 인간 스스로해서 나오는 항복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전쟁할 때 임금이 계산을 한다고 합니다.

이길지 질지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했습니까?

“무릇 내게 오는 자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라라”


이 말씀은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아는 익숙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앞에 우리가 가만히 서서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 가려면 자기 부모, 처자, 형제,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가가 되기 위해 우리가 과연 이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끔 해야 되는 일이 아니라 온전하게 해야 하는 일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어떤 인간이 예수님을 위해 자신이 모든 것을 부인하고 따르겠습니까?


여기 있는 우리들이 그럴 수 있을까요?


우리의 계산은 가능합니다.

이렇게 하면 천국에 갑니다. 이렇게 하면 주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하고 싶고 그래서 예수님 쪽이 더 승산이 있다고 생각되지만 정작 우리 자신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기껏해야 흉내를 낼 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이 흉내를 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입니다.


블레셋과 전쟁을 합니다.

이들은 당연히 전쟁에서 승리할 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전쟁에 패하고 사천의 군사가 죽습니다.


실상 가나안 전쟁에서 죽어야 할 대상은 이스라엘 군대가 아니라 가나안 땅에 거주하는 자들과 이방인들이지요.


그런데 지금 누가 죽습니까?

전쟁을 할 때 이들이 전쟁의 승패를 계산하지 않았겠습니까?

당연히 했을 것입니다.

제사장도 있고 심지어 누가 있습니까?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자신들에게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번 전쟁은 자신들의 승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천 명이 죽는 패전을 겪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합니까?

언약궤를 실로에서 가져다가 자신들 가운데 두자고 합니다.

이것으로 자신들의 원수들 손에서 구원하자고 합니다.


자신들 조상들의 경험으로는 언약궤만 있으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지요.


여기에 대해 블레셋 군대가 어떤 반응을 합니까?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가로되 신이 이르렀도다 하고 또 가로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장부가 되어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말고 대장부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


희한하지요.

두려워하는데 오히려 더 강하게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마음을 품게 됩니다.

결국 이들의 말대로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이스라엘 보병 삼만 명이 죽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도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계산으로는 전쟁에서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들의 정신의 중심에는 홉니와 비느하스가 있습니다.


여호와라는 존재는 자신들의 유익을 위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 홉니와 비느하스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 전쟁도 마찬가지이지요.

여호와의 언약궤가 앞장서 가나안 땅을 정복한 것은 오직 여호와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임을 저들은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들의 배를 위해 전쟁해 주신 여호와, 블레셋이 믿는 우상과 동일하게 여호와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믿음이 아니지요.

그러니 여호와의 언약궤를 내세워도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에서 패하게 하시고 언약궤를 빼앗기게 하십니다. 또한 이런 정신의 대표자인 홉니와 비느하스, 그리고 삼만명의 군사들을 죽이신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이것을 모릅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심지어 예수님을 말씀처럼 계산해서 결심해서 따르며 신앙의 흉내를 내는 것이 믿음이 있는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늘로부터 주어진 믿음, 곧 성령으로 난 믿음이 아닌 경우엔 이들의 결론한 항상 동일합니다.


내가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대접을 받을 수 있느냐?

이 땅에서 어떻게 잘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냐?

이런 생각이 가득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오히려 언약궤를 빼앗기게 하시고, 이스라엘 군사 삼만을 죽이심으로, 홉니와 비느하스를 죽이심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드러내십니다.


이것을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모릅니다.


이런 말씀도 다 어떻게 해석하는고 하면 저들이 말씀을 잘 듣지 않아서 순종하지 않아서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말씀을 잘 순종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겠다는 것이지요.


이런 사고방식이 바로 홉니와 비느하스의 죽음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제가 서론에서 예수님 말씀은 언급했습니다.

우리는 계산은 잘 합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이 일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장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적 태크닉을 내세우는 자는 죽음당한 삼만 군사와 동일한 사고를 가진 자입니다.

내가 기도가 부족하니 기도를 더하고, 성경 말씀 읽는 것이 부족하니 성경말씀 더 읽고.


실제로 이렇게 하면 여러분의 마음은 뿌듯해집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마음이 뿌듯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공로가 너무나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고자 할 때 계산한 사람이 있다면 참 성도는 두 손 들고 항복할 것이요. 거짓 성도는 종교적 기술들을 수없이 �아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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