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강해

강해 24

푸른 섬 2008. 5. 1. 07:55
 

울음

사무엘 상11장1-11

성경을 보면 전쟁이 나옵니다.


전쟁이 나오니까 오늘을 사는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말씀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누가 말했던가요? 총성없는 전쟁이라고..


그러나 실상 성도는 영적전쟁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 싸움은 실질적으로 어쩌면 과거 우리들이 보는 구약성경보다 더욱더 실감나는 전쟁입니다.

사실 구약에 나타나는 전쟁들이 신약으로 넘어 오면 모두가 다 영적전쟁으로 구약성경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신약시대를 너무 시시하게 생각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전쟁도 하고, 하나님의 능력도 나타나고 하면서 뭔가 사는 맛이 있고, 눈에 번쩍 번쩍 띄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이런 일들이 예수님당시, 그리고 사도들 당시 잠깐 나타났다가 다 사라져 버린 것 같습니다.


물론 아직도 사람들은 그런 활동적인, 눈에 보이는 식의 역사와 능력을 고대하고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속이고 속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서 우리들이 아하, 그냥 전쟁이 있었구나, 그런데 그 전쟁이 나와 무슨 상관이지 생각해 버리면 곤란합니다.


사실 믿음이 있는 자는 오늘 이 시대가 얼마나 치열한 전쟁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고 있는 자입니다. 싸움이 없는 자는 믿음이 없는 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싸움이 사람과 다투고 하는 싸움이 아니라 영적 전쟁,  즉 이 땅을 살면서 누구를 증거하며 사느냐로 싸움이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이방족속인 암몬족속에게 먼저 언약을 맺자고 청합니까?


그러나 우리가 그 상황속으로 한번 들어가본다면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뭘 이해한다고요. 저들이 먼저 알아서 언약을 맺읍시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상황.


그러면 우리가 당신들을 섬기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종이 되겠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다급했으면 이렇게 하겠습니까?

살기 위해서는 종이라도 되어서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암몬 사람 나하스가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어야 너희 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

암몬 사람 나하스가 야베스를 치려고 하는 목적을 아시겠죠?

그냥 한 지역을 차지해서 그 지역사람들을 노예로 삼고 통치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토확장이 목적이 아니지요.


이스라엘에 대한 모독이 목적입니다.

참 희한 하지요.

왜 이런 마음이 들었을까요?


과거 이스라엘에 입다라는 사사가 있을때 이들이 오지게 한번 얻어터진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에 대한 앙갚음일까요?


어찌되었던 지금 암몬사람 나하스가 이스라엘을 모독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철저하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증거하기위해 도구로 선택받은 국가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던, 어떤 행동을 하던 상관없이 이스라엘의 목적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증거하는 나라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지금 암몬이 모욕하고자하는 이스라엘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살기 위해 암몬과 언약을 맺고자 하고, 스스로 종이 되어, 과거 애굽에서 처럼 종살이를 하겠다는 생각을 해도,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이런 모습을 통해 이스라엘의 현재 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생존하기 위해서는 무슨짓이든 다 하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도 있고, 율법이 있어도, 제사장이 있어도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입니다.

그러니 생존을 위해서는 수단이나 방법이 문제가 될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도 맺고 종도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에는 무언가 노림수가 있습니다. 종이되어도 고상한 종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현 상황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암몬족속의 종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암몬사람 나하스가 뭐라고 합니까?

치욕을 줍니다.

너희들을 모욕거리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야베스 사람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입니다.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그러자  야베스 장로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7일간 시간을 달라고 합니다.

이유는 이스라엘 온 지경에 사자를 보내어 우리를 구원할자가 없으면 그것조차 당하겠다는 것입니다.


암몬이 얼마나 강한 나라였으면 이런 내용을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래 보아라는 것입니다.

사자들을 보내어 구원병을 얼마든지 요청해 보라는 것이지요.

누가 보아도 이스라엘 내에서는 암몬군대를 이길 군대는 없습니다.

구원할 자도 없습니다.


이것이 명명백백한 상황입니다.

그러니 7일간의 시간을 주고, 구원자를 요청하는 것에 대해 허락하는 것입니다.


암몬자손은 이것을 통해 노리는 노림수가 있습니다.

철저하게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것이지요.


그 예상대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소리를 높여 웁니다.

왜 울까요?

이제 우리는 구원자도 없이 꼼짝없이 암몬족속들로부터 모욕을 당하는 처지가 되는구나.

그래서 모든 백성들이 야베스 장로들이 보낸 사자들의 말을 듣고 소리를 높여 우는 것입니다.


상황이라는 것이 이런 상황입니다.

암몬을 대항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구원자는 없습니다.

절망입니다.

벼랑끝입니다. 


이제 떨어질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사울이 등장합니다.

사울과 사무엘을 좇아라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좇지 않으면 어떻게 한다고 합니까?


각을 뜬 소처럼 하겠다고 경고합니다.

협박을 해도 이만저만 협박을 하는 것이 아니지요.


물론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도 이용하십니다.


드디어 사울이 암몬을 쳐 버립니다.

각기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큰소리 치던 암몬군대가 박살나 버렸습니다.


한편의 영화같지요.

영화를 만들어도 될 것입니다.

물론 돈이 안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왜 이렇게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실까요?

선택하여 불러 내셨으면 주변에 암몬족속 같은 것들을 다 제거하시면 얼마나 좋습니다.

또한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도록 환경과 여건을 만들어 주셨으면 이런 모욕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과정을 보면 꼭 이런 것들을 하나의 세트로 만들어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암몬족속같은 원수를 두시고, 이 원수 앞에 이스라엘을 두셨습니다.

이 뿐만 아니죠. 이스라엘 꼬라지는 완전히 죄인이란 존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저 밑바닦까지 다 보여 줍니다. 이런 상황에서 구원자가 등장합니다.


그러니 이런 모습을 보는 우리로서는 기분이 썩 좋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우리 성도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우리 성도의 꼴이 말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꿈을 꾸죠.

이런 이스라엘이 아니라 완벽히 주님을 섬겨내는 이스라엘, 참 이스라엘, 주님의 백성이 되어야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죄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런 생각을, 마음을 안 먹어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먹은 자들의 대표자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바리새인들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참으로 천박하기 짝이 없는 모습의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어떻습니까? 아주 고상한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여러분 이해 됩니까?

이것을 사람들은 이해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비판한 바리새인은 말만하고 실천안하는 자들이라고 구분해서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지요.

삶이 얼마나 완벽했으면 기도할 때 그렇게 당당하겠습니까?


우리도 그렇지 않나요.

여러분들이 기도 열심히 하고 성경 많이 보고, 하면 어떻습니까? 당당해지는 느낌 들지 않나요.

목사들 모임에 가보면 그런 사람들이 가득가득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을 모르면 우리는 성경을 보아도 헛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증거하기 위해 지금 하나님께서는 암몬족속과 천박한 야베스 지역사람들과 사울을 사용하셨습니다.

성도의 삶의 현장이 치열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는 철저하게 삶의 현장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천박한 모습, 고상한 모습, 어떤 모습이든 상관 없습니다.

아주 다양한 모습, 천의 얼굴로 성도는 살아갑니다.

생존하기 위해 발부둥치고, 아니면 남을 도와 가며 살고, 아니면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등등 수많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도는 이런 일을, 이런 모습을 통해 증거하는 것은 오직 한분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입니다.

전 우리들이 암몬사람 앞에서 모욕당하면서, 천박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예수님이 증거되어 지는 도구로 사용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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