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강해

강해 26

푸른 섬 2008. 6. 2. 12:33
 

위급하고 절박할 때

사무엘상13장1-23

믿음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믿음이라는 것은 결코 이론 적인, 생각속의 논리가 아닙니다.


로마서10장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게 되면 반드시 입으로 시인하게 되어있습니다.

물론 입으로 시인한다고 하여 반드시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그렇다면 왜 마음으로 믿는 것을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까?

입으로 시인하지 않으면 안됩니까?


그 이유에 대해 로마서 10장 11절부터 보면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이라는 것은 오직 주의 이름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성도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전했기 때문에 타인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로마서10장20절을 보면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구원이라는 것이 철저하게 주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된다는 것을 증거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 5-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결코 행위에 포함되지 못합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철저하게 은혜가 은혜 되도록 증거하는 내용물입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상 13장에 보면 사울왕의 첫 번째 전쟁에 나서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먼저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자 이스라엘이 이들에게 가증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가증스럽다는 말은 몹시 괘심하고 얄밉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사울이 온 땅에 나팔을 불어 전쟁을 준비합니다. 이스라엘 온 백성들이 길갈로 모여 사울을 좇습니다.


블레셋도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습니다. 병거가 삼만, 마병이 육천입니다. 그리고 백성는 해변의 모래 같이 많았더라고 합니다. 군사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6,7절을 봅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 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따응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은 떨더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왜 왕을 요구했습니까?

열방과 같은 왕. 즉 블레셋나라 같은 왕이 자신들에게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왕을 보니 아직 블레셋 왕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22절을 보게 되면 이스라엘에는 칼과 창이 겨우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유는 블레셋의 힘에 눌려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에 의해 철공이 다 없어졌고, 철재류는 철저하게 블레셋이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병거가 삼삼, 마병이 육천, 군사들 수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다는 것은 이들 모두가 철재무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요나단과 사울왕만이 철재 무기, 그리고 나머지 군사들은 괭이, 삽, 도끼, 쇠채찍, 쇠스랑같은 것을 들고 전쟁에 나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상황이 얼마나 위급한 상황입니까?

지금 중국 온 나라가 스추안성 베이추안 지진 때문에 난리가 아닙니까?

텔레비전을 통해 그곳에서 살아난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끼는 위급함과 절박함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요. 지금도 여진이 계속 된다고 하고 또 어떤 지역에서는 댐이 붕괴될지 모른다고하고,

이뿐만 아닐 것입니다.

음식이나 물에 대해서도 얼마나 절박하겠습니까?


뿐만아니라  가족을 잃고, 자식을 잃고, 삶의 터전을 잃고, 남편을 잃고 아내를 잃고, 일가 친척들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들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우리들이 볼지 모르지만, 만일 이 집이 무너져 자신이 죽었고, 이제 더 이상 이 건물로 인한 생계가 불가능하다고 했을 때 어떻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이 보는 본문이 이정도,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이들은 자신들 모두가 죽어야 되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8절에 보면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왕 중심으로 힘을 결집하는 것이 왕정 체제인데, 사무엘 사사로 인해 오히려 이 왕정체제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자 사울이 위급하고 절박한 상황에 처합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급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이제 왕, 그들이 뽑은 왕도 위급하고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사무엘이 왜 이레를 기다리라고 해 놓고 오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울을 위급하고 절박한 상태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게 하기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세운 왕이 정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왕인가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백성들이 흩어지자, 다급하고 절박해진  사울왕은 자신이 직접 번제를 드립니다.

번제는 제사장이 드려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번제만 드리면  화목제만 드리고 나면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사울왕이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신앙을 얼마나 많이 봅니까?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근거로 하여 가지는 확신들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이렇게 했으니 하나님께서 이것을 들어 주실 것이야.

아니면 내가 하나님께 헌금을 얼마 했으니  하나님께서 더 많은 물질의 축복을 주실 것이야.

이런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수 있습니다.


얼마전에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자신의 자신의 형님 때문에 미치겠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오천만원 이상을 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감사함으로 한다면 별 문제가 안되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벌기 위해서랍니다.


번제란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내고 고안해 낸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지금 제사장이 없는 상황에서, 사무엘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번제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받으시지 않겠느냐고 생각한 것입니다.


지극히 인간적이지요.

백성들은 흩어지고, 그렇게 되면 왕의 의미가 사라지고, 왕 노릇 해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패망할 것이고.


사울의 입장이 십분 이해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번제를 딱 마치니 누가 등장합니까?

사무엘이  왔습니다.


우리들 생각에는 이렇죠. 조금만 참지, 왜 그 조금을 기다리지 않아서 왕의 자리를 내 놓아야 하는가라고 말입니다.


사울의 변명을 봅시다.

11,12절입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 사울왕이 가로되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말이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다급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번제를 드렸는데..


이 정도가 되면 우리는 사울을 이해하고도 남겠지요.

그렇데 사무엘은 너무나 냉정합니다.

13,14절을 봅시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고”

사무엘은 사과도 하지 않습니다.

무슨 사사가 이렇습니까?

무슨 선지자가 이렇습니까?


자신이 늦게 와 놓고 하는 말이 사과는 고사하고 오히려 나쁜 말만 늘어 놓습니까?

오늘날 이런 사무엘같은 사람이 있다면 모두가 다 욕하고, 아무도 선지자로, 사사로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윤리나 법칙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인간이 어떤 행동을 취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울왕을 위급하고 , 절박한 상태로 몰아넣으시면서 그들의 반응을 보시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로마서 10장을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반드시 입으로 시인하게 되어있다고 말입니다.


사람은 마음속에 있는 것을 입으로 드러냅니다. 즉 행동으로 나타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구원이 주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증거하기 위해 입으로 시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왕은 위급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그 마음속에 있는 것을 행동으로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 마음속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왕의 자리입니다. 즉 왕으로서의 역할입니다.


분명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왕의 역할에 대해서, 왕의 자리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사울왕 마음에서 하나님의 법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의 자리, 왕의 역할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절박한 상황에서 자신의 임의대로 번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런 본문이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사울 왕이 이런 모습을 보여 버림을 받게 되니 우리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별 할 말이 없습니다.

블레셋에 대해서는 그들이 어떤 짓을 해도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좀 다르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이런 사울왕을 통해 참 믿음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급하고 절박할 때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라고 말입니다.

자신의 임의대로 행동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4장19,20절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 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용기가 있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잡혀 죽은 상황에서 자신들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과거같으면 도망갔겠죠.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들을 이런 모습으로 서게 하셨습니다.


성도는 위급하고, 다급하고 절박할 때  예수님께서 참 주님이심을 증거하는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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