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강해14

푸른 섬 2008. 8. 28. 11:32

다른 교훈과 바른 말

디모데전서6:3-10

우리는 복음을 너무나 간단하게 생각합니다.

어떻게 간단하게 생각하는고 하면 내가 복음을 안다는 것이지요.

내가 복음을 어떻게 아는가?

 

인간의 공로로 되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십자가 지신 주님의 공로요 은혜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끝입니까?

아니면 그 다음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화론 자들이 주장하는 구원 그 이후의 삶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까?

우리는 성화론 자들의 주장에 반박하기에 바빠서 정작 우리 자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아니 우리 자신을 돌아볼 마음이 없지요.

왜 그런고 하면 우리의 사악함을 감추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십자가 복음에 착념치 않는 자들이 어떤 악한 모습으로 드러나는가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먼저는 교만하여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에 딱 달라붙어 있지 않으면,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을 늘 가까이 하지 않으면 교만해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늘 깊이 생각하는 삶이 아니면 교만이라는 것이 불쑥 튀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항상 우리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은 변론과 언쟁입니다.

자신을 합리화 시키는 논리를 끄집어냅니다.

아니면 말싸움을 합니다. 단순히 이런 모습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너무 편파적으로 보시는 것이 아닌가라고 항변하실지 모르지만, 과연 그럴까요?

십자가 복음에 딱 달라붙어 있지 않으면, 죄인의 본성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도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복음에 딱 달라붙어 있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교훈을 따르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생각에는 여기에 쉽게 동의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있고, 그 믿음 안에 있는데 내가 다른 교훈을 따른다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과연 무슨 교훈을 따라 하루하루를 살고,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을 합니까?

자식들을 가르칩니까?

 

이제야 인정하시겠습니까?

말씀을 떠나 버리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다른 교훈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됩니다.

이것을 두고 교만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만하니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4절을 한번 보세요.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특이하지요.

교만한 자에게서 저절로 이런 생각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요. 성도가 십자가의 복음에 딱 달라붙어 있지 않으면, 마치 매미가 수액을 빨아 먹기 위해 나무에 딱 붙어 있듯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에게서 튀어 나오는 것들이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의 복음을 방해하는 것들만 튀어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심지어 마음이 부패하여 지고 진리를 잃어버리는 지경까지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서로 다투겠지요.

십자가 복음을 이용해 자기 배를 채우려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런 자들끼리 싸움이 일어납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가 오늘날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상입니다.

모두가 다 십자가 복음을 가까이 하지 않으니 자기 배를 채우는 데 급급합니다.

또한 겉모습으로는 말씀을 가까이 하고, 우리가 눈으로 보기에도 그러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것을 보면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여기는 모습이니, 이들을 다른 교훈에 착념하는 자들임에 분명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용해 어떻게 한 미천 잡아 볼까 생각해서, 새벽마다 땡깡부리고, 아침마다 조용히 땡깡부립니다.

이들에겐 결코 지족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너무나 간단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복음에 딱 달라붙어, 말씀에 딱 달라붙어 사는 자들은 경건이라는 것이 큰 이익이 됩니다.

동일하게 이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앞선 이익은 자기 배를 채우려는 이익이고, 지금 이익은 십자가 복음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드는 이익입니다. 은혜를 더 깊이 알아 가는데 이익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자들의 마음가짐이 어떨까요?

 

7,8절을 봅시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십자가 복음을 알게 되니까 우리의 현실을 재대로 봅니다.

이 말씀은 불교에서 말하는 공수래공수거,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말과는 완전히 다른 말이지요.

말은 같지만은 그 의미는 천지차이입니다.

이 땅에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지요. 그러나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 어느 누구도 이 세상 것을 가지고 갈 인간이 없습니다. 다 지옥가야 할 인생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성도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셨는데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9절을 보게 되면 부하려 한다고 합니다.

왜 자꾸 사람들은 부하려고 합니까?

은혜를 모르니 그렇지요.

 

그러니 부자 되려고 하다보니 결국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집니다.

이것은 곳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복음에 딱 달라붙어 있지 않는 삶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부자 되세요 하는 텔레비전 선전과 같이 우리의 속에서부터 부자 되려고 하는 욕구가 흘러나옵니다.

 

그러면 돈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사람들이 부자가 되려고 합니까?

돈이 신의 경지에 올려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이나 옛날이나 돈만 있으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는 것이 인간들 세상입니다.

뱀이 인간을 유혹할 때 어떤 식으로 유혹을 했습니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유혹하지 않았습니다.

 

이 속성을 그대로 자신들의 속에 담은 아담 후손들이 어떤 일을 합니까?

돈으로, 다른 말로 하면 힘으로 하나님 행세를 하지 않습니까?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니 당연히 속에 들어 있던 것들이 콸콸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10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을 사랑하면 당연히 믿음에서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뿐만 아니지요.

얼마나 많은 근심에 사로잡히겠습니까?

복음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스스로 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냥 우리를 내버려 두어도 저절로 십자가로 가까이 가는 그런 인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냥 내버려 두어도 저절로 십자가로 가까이 간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어디에 그런 내용이 나옵니까?

 

십자가로 더 가까이 가는 성도는 오직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밖에 없습니다.

제발 우리의 본성을 자꾸 더 드러내는 인생이 되지 마시고,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감사하는 삶이 되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더욱더 가까이 하는 그런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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