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강해

강해7

푸른 섬 2008. 9. 10. 10:42

희한한 일

다니엘2:46-3:18


다니엘이 꿈을 말하고 그 해석을 느부갓네살 왕에게 알려 주었을 때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에게 절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물과 향품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47절입니다.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시오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자시로다”


그리고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을 높여 바벨론 온 도를 다스리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박사의 어른을 삼았습니다.

더 나아가 다니엘이 청하여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바벨론 도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무엇인가 우리의 기대와 일치되지 않습니까?

죽음의 위기에 몰렸을 때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그 기도의 응답을 받았고, 그 결과로 이 세상에서 빛의 모습, 즉 모든 세상 사람들이 존경할 만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모습을 보세요.

최고의 강국의 왕이 다니엘에게 절하지 않습니까?

절한다는 것은 당연히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절하는 것이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다니엘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신의 신이시고 모든 왕의 주재시라고 말입니다.


다니엘의 모습을 통해 느부갓네살왕도 굴복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으로 바뀌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고 살면서 바라는 꿈이 아닙니까?


위기에 몰렸지만 하나님의 도움으로 오히려 높임을 받고 하나님도 영광 받으시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러한 마음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한번 봅시다.

그것이 바로 3장에 나옵니다.


느부갓네살왕이 왜 다니엘에게 절하였고, 그를 높여 바벨론 온 도를 다스리게 했는가를 알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금나라를  가장 지혜롭게 도와 줄자라는 것입니다.

꿈을 말하고 해석해 낸 그 하나님을 믿는 다니엘이야 말로 자신의 야망을 가장 잘 이루어줄 자라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느부갓네살 왕은 금으로 신상을 만듭니다.

자신이 꾼 꿈을 생각하여 신상은 금, 은, 동, 철, 흙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나라, 즉 금의 나라를 신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느부갓네살왕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곧 신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인정했는가? 신중에 신, 모든 왕의 주재이신 다니엘의 하나님이 인정한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만이 이 세상에서 존귀와 영광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일 다른 자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이 있다면 그런 자는 살아 남지 못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꼭 북한을 보는 것 같습니다.


3:5-6절을 봅시다.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왕의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 하매”


이것이 바로 느부갓네살왕의 본심입니다.

다니엘에게 절하고, 하나님을 찬양한 이유가 다 자기 자신의 영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다니엘이 꿈을 해석하여 그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다니엘이 2:18절에서 기도이유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결코 바벨론 다른 박사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께서 남기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남기신 자들을 바벨론 다른 박사들과 함께 죽이신다면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이루어지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들은 남은 자는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죽더라도 남은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다니엘과 세친구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다니엘과 세친구는 단순히 바벨론 포로에서 남은 자들로서 포로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보시면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39장에서 40장으로 가보면, 39장에서는 분명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다고 나와 있는데 40장 이후에는 죄용서함과 새하늘과 새땅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볼 때 남유다의 바벨론 포로라는 것은 모든 인간들이 죄속에 가두어졌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포로에서 돌아온다는 것은 그 죄를 용서함 받은 자들, 즉 남은 자들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다니엘서에서는 신들의 아들과 같은 분으로, 인자로 인하여 구원을 얻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생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높임을 받는 것이, 칭송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느부갓네살왕이 자신이 만든 신상에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극혈이 타는 풀무에 던져 넣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명령을 누가 거역하겠습니까?

모두가 악기소리가 날 때 엎드리어 그 신상에게 절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을 참소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교묘한 생각입니다.

아마 느부갓네살왕은 유대인들을 제외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갈대아 사람들은 왕의 명령에 근거하여 이들을 고소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세요.

“느부갓네살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 오라 명하매 드 디어  그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 온지라”


이때에 다니엘은 어디에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어�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이제 죽음에 직면했습니다.


느부갓네살왕은 왜 절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15절을 보세요.

“너희가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느부갓네살왕이 다니엘의 꿈 이야기와 그 해석을 듣고 다니엘에게 절한 이유를 우리는 이 대목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의 하나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조차도 내편이라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낼 신은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어떻게 대답합니까?
16-18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믿고 있길래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이렇게 당당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들은 분명 알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결코 죽음에 버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만일 이들이 죽게 된다면 하나님의 약속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니 이들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니 극렬히 타는 풀무가운데서 건져내지 않으시더라도 우리들은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느부갓네살 왕은 낯빛이 변했습니다.

감히 자신의 말을 거역하다니.


그래서 그는 풀무를 평일보다 일곱배나 더 뜨겁게 했습니다.

그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극렬히 타는 풀무가운데 던져 넣으라고 명합니다.


우리의 기대와는 너무나 다르지요. 꿈을 해석해서 높은 자리에 앉아으면 되었지 왜 또 죽음으로 몰려 갑니까?


그러니 일반적이 죄인들이 생각하는 신앙과는 너무나 다른 신앙을 이들은 갖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살펴 보았듯이 이 땅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여서 잘되어 하나님과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누구와 동일한 사고방식입니까?


그것은 느부갓네살왕과 동일한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자기 편이라는 사고방식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가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의지와 반대되는 것을 말씀하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조차 죽일 것입니다.


이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죽이려는 느부갓네살에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신앙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것에 대한 의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어떤 좋은 직장이나, 지위를 가졌을 때 항상 이런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다. 물론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말은 하지 않겠지요.

여러분이 복음이 무엇이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 한 켠에서는 이런 생각이 튀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다. 그러면서 우리는 넌지시 그 자리를 사수하려고 발부둥칩니다.


과연 무엇을 믿고 있는 것입니까?


성도란 땅에 것을 믿는 지가 아닙니다.

땅의 것에 목숨을 거는 자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분에게 목숨을 거는 자가 참된 성도입니다.

땅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 조차도 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고 생각하며 사는 자가 성도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살 때 땅에서 일어나는 것을 갖고 자신이 참 주님되신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분명 이 땅에서 살아가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보이지 않는 분,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믿고 살았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위기가 찾아 왔습니다.

자신들의 목숨을 빼앗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믿는 것을 하늘에 계신분입니다.

결국 이들은 풀무불에 던져 넣어짐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증거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참으로 대단하다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남은 자의 참모습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나 사도바울이 어떻게 그러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남겨진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어떻게 남겨졌습니까?

바로 십자가의 피로 구속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 속에는 이미 주님되신 예수님의 영이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되신 예수님만을 증거하는 자로, 예수님만을 믿는 자로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 땅에서 잘되는 것을 하나님의 뜻 운운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서 나도 저들처럼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것도 역시 느부갓네살왕의 사고방식과 일치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성도는 단지 오늘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약속에 신실한 분이시며 긍휼이 얼마나 크시고 놀라운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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