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강해

강해9

푸른 섬 2008. 9. 10. 10:43

짐승

단4:1-37

먼저 우리들은 4:1-3절을 3장에서 이어지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 구절을 4장에서 일어난 사건을 결론으로 하여 하는 말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 왕이 처음 꾼 꿈 해석을 들었을 때 이미 영원한 나라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러니 불속에서 함께 하신 신들의 아들과 같은 분을 보았고, 또한 불속에서도 살아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볼 때에 이전에 자신이 꾼 꿈과 그 해석을 생각해 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급히 마음을 바꿉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본문을 보면서 좀 이상하게 느끼는 것은 느부갓네살이 회개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모든 책임을 누구에게 돌리는고 하면 설거머니 다른 자들에게로 돌립니다.


3:29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고”


자신은 마치 아무른 잘못도 하지 않은 냥, 누구든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거스른 자는 죽인다고 명을 내립니다.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향해 거스르면 죽인다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심판자의 위치에 있습니다. 자신은 마치 중립자의 위치,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자인냥 행세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로 나섭니다.

4:2,3절을 보세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하노라 크도다 그 이적이여 능하도다 그 기사여,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 권병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한글 성경이 좀 어렵습니다.

쉽게 말하면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너무나 기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 권병은 대대에 이를 것을 말하는데, 이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들이 이미 앞서 느부갓네살 왕이 자신이 꾼 꿈을 어떤 식으로 적용하는 가를 보면서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위치를 더욱더 높이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백성들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알려 줌으로 말미암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누구편인가를 만 백성에게 알리는 효과를 톡톡히 보자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느부갓네살을 삐딱하게 보느냐고 물으신다면, 저의 마음이 삐딱해서가 아니라 성경을 계속 읽어 보니까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느부갓네살왕이 꿈을 꾸었습니다. 4절을 보게 되면 그는 강력한 힘을 소유한 왕으로서 집에 편히 있었고, 궁에서 평강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니 무엇이 부족함이 있었겠습니까?


자신의 빽이 워낙 든든하니 더더욱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한 꿈이 그를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래서 그는 꿈해석 전문가들을 불러 꿈을 알려주고 그 해석을 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도 그 꿈을 해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보기에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왕에게 잘 보이려면 그 꿈을 대충 때려 맞추어서 해석하여 왕에게 알려주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 합니다.


왜냐고요. 그 꿈의 해석을 했을 경우 왕이 그 해석에 동의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미 느부갓네살은 그 꿈의 해석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대충 끼어 맞추어서 꿈을 해석했다가는 큰일을 당할 수 있겠지요.


결국 다시 벨드사살이라 불리는 다니엘에게 묻습니다.

이곳에서만 보더라도 우리들은 느부갓네살이 여전히 자신들의 우상을 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을 벨드사살이라고 여전히 부르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 꿈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한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가 자라 견고하여 지고 높이는 하늘에 닿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 끝에서도 보입니다.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 만민의 식물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고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무릇 혈기 있는 자가 거기서 식물을 얻습니다.

우리가 보아도 너무나 좋은 꿈 아닙니까?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하늘에서 한 거룩한 분이 내려옵니다. 그분은 순찰자이십니다.

이 분이 소리 질러서 이 나무를 박살내어 버립니다.


오직 뿌리의 그루터기만 땅에 남기고 철과 놋줄로 동이고 그것으로 풀밭 가운데 있게 합니다.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하늘이슬에 젖고 땅의 풀 가운데서 짐승으로 더불어 그 분량을 같이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16절에서 이 나무가 나무가 아니라 사람임을 말합니다.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나리라”


그런데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17절에 나옵니다.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니 곧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으느니라”


이것이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의 내용입니다.

여러분들이 보아도 얼마든지 해석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느부갓네살은 이 꿈의 해석을 알지 못했을까요?

아미 대충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꿈을 기어코 해석해 내라는 것은 자신에게 불길한 일이 닥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 해석을 알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결국 다니엘이 그 꿈을 해석합니다.

그 해석이 무엇입니까?

느부갓네살 왕이 장차 견고하고  창대하사 하늘에 닿고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사람에게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여 질 것입니다.


이것이 꿈의 해석입니다.

그러면서 다니엘은 왕이 지금이라도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라고 간청을 합니다.


이것을 볼 때에 우리는 지금 비록 느부갓네살 왕이 강력한 힘을 소유하고 있고, 장차 그 권세가 땅 끝까지 미친다 할지라도 그것은 곧 짐승과 같은 모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을 모르는 자는 곧 짐승과 같다는 것입니다.


결국 꿈대로 왕을 짐승처럼 살다가 때가 차서  총명이 다시 느부갓네살 왕에게로 돌아 옵니다. 왕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느부갓네살의 말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낮추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다니엘 4장 말씀이 주어진 것일까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제가 설교 제목을 짐승으로 했습니다.

그 이유가 이제 나옵니다.


우리가 잠시 다니엘 7장으로 가 봅시다.

왜 7장으로 가느냐고요?

7장을 보게 되면 짐승이 나옵니다.

7:17절을 보게 되면 ‘네 짐승은 네 왕이라 세상에 일어날 것이로되’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1절을 보니 이들이 성도들과 더불어 싸워 이깁니다.

그러나 22절을 봅시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신원하였고 때가 이르매 성도가 나라를 얻었더라”라고 합니다.


결국 느부갓네살의 꿈을 통해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느냐를 주님은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 힘이 너무나 견고하고, 그 권세가 땅 끝까지 미치는 짐승의 나라가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성도들이 고난을 당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실 때가 언제냐?

일곱 때가 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곱 때라는 것은 결국 짐승이 다스리는 시대요, 성도들이 고난과 죽임을 당하는 시대이며, 이때가 끝나면 주님의 성도를 위해 신원하시고 성도는 영원한 나라를 얻게 됩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짐승이 다스리는 세상입니다.

이 짐승의 힘은 너무나 견고하고 창대하여 하늘에 닿고 땅 끝까지 이르는 힘입니다.

성도는 이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우리를 놀랍게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결정 났다는 사실입니다.

짐승은 현존하며 일곱 때를 다스리고, 성도는 그 속에서 고난 받고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일곱 때를 지나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어거리 놀라운 일이냐고요?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요한복음 15:19절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여기에서 짐승은 세상으로 표현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택함을 입은 자입니다.


인간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것과 상관없이 짐승과 성도는 예수님에 의해 갈라져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놀라운 일이지요.


교만한 자를 낮추시기 위해 주님께서 느부갓네살 왕에게 꿈을 꾸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교만한 자가 낮아지는 일은 없습니다. 인간 스스로 반성해서 낮아지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낮아집니까?

총명이 돌아와야 합니다.


인간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에게 총명이 돌아온 것은 하나님의 때가 되었기 때문에 총명이 돌아 왔지요.

이것은 느부갓네살왕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서서히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럼 인간이 무엇이냐?

느부갓네살은 무엇이고 다니엘은 무엇이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냐?


다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온 세상의 심판주이심을 증거하는 자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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