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강해

강해8

푸른 섬 2008. 9. 10. 10:43

 풀무불 속의 네 사람

다니엘3:19-4:3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심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마귀가 자리를 잡고 있는 자들은 항상 이런 기대를 갖고 성경을 대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그렇게 믿습니다. 항상 주님은 내 편이라는 사고 방식 말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죽음의 자리에서 건져주기 않을 지라도 자신들은 결코  왕들의 신들을 섬기지 않을 것이고,  왕이 세우신 신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모습이야 말로 얼마나 우리가 바라고 바라던 신앙인의 모습입니까?

이와 함께 위기를 맞았을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으로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어디 영화에서 많이 보는 장면 같지 않습니까?

어떤 조연이 악당에게 위협을 받아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주인공이 나타나서 악당들을 물리치고 그 사람을 구해주는 모습. 이런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얼마나 흐뭇해 합니까?


풀무불에 던지워져서 죽임을 당해야 하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머리털도 그슬리지 않았고, 그들을 끌어 풀무불에 던져넣으려던 자들, 즉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은 불에 타 죽어 버렸습니다.


얼마나 통쾌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느부갓네살 왕을 살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살아 있는한 이런 일은 언제나 다시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기대하는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멸해 버리시지 왜 자꾸 살려 두시느냐 이겁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간단하게 느부갓네살을 죽여버리면 끝날 일을 왜 그의 명령을 따르는 졸개를 죽이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누구의 사고방식과 같을 까요?

그것은 바로 가인의 사고방식입니다.

즉 마귀의 사고방식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하는데,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그 길을 목숨을 바쳐서라도 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야 말로 영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멸해 버리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던 자들이 누구입니까?

제자들이 아닙니까?


이들은 무엇을 모르고 있습니까?

이 세상이 왜 존재해야 하는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꾸 자신의 몸의 행복과 안녕을 기원할 뿐이지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사건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건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소개하기 위해서 이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 왔고, 지금 풀무불에 던짐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증거합니까?


우리들이 오늘 본문을 먼저 생각지 말고 예수님을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즉 땅에 속한 분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풀무불 가운데 있는 신들의 아들과 같다는 말입니다.

물론 신들의 아들과 같다는 말은 우상을 섬기던 바벨론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보기에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함께 계신 분은 땅에 속한 자와는 다른 분임을 알았지요.


느부갓네살왕이나 그의 신하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가는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느부갓네살을 보았지 않습니까?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말이야 모두 맞게 하지 않습니까?

찬양도 하고요.


그러나 다 엉터리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풀무불 속에 계신 분을 볼 때 그들은 그들의 시각에서 나름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볼 때에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죄, 자기 백성들의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십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속에서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불속에 들어가면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물속에 빠져도 죽게 되어 있지요.


그러나 이들은 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서도 살아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기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세력이란 주님 안에 있는 자에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0장14,15절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께서 자신의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시기 때문에 양들은 생명을 얻게 됩니다. 즉 영생을 얻게 됩니다.


이 생명이란 단순히 불속에서도 살아 남는 생명이 아닙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더 이상 드리우지 못하는 생명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죄가 모든 인간위에 왕노릇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은혜가 왕노릇합니다.


요한복음5:24절을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7-29절을 봅시다.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부활이야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부활이냐 심판의 부활이냐가 중요하지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온 세상의 심판주 이심을 증거한 것입니다.


로마서 6:4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지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 생명 가운데서 사는 삶을 말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어떻게 남은 자로서 풀무불도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이것이 우리들이 궁금해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들의 신념이 강해서일까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11:5절을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로마서 8:29,30절을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위하여 미리 정하였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미 다 정해 놓으다는 것입니다.

즉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이미 다 정해 놓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남은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들을 왜 두었는가? 그것은 그 은혜를 증거하기 위해서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온 만유의 주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은혜와 주님이 좀 맞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어떤 주님이신고 하면 자기의 목숨을 내어 주시어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이시요, 그 은혜와 상관없는 자는 심판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조금 간단하게 말하면 십자가 지신 분이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는 은혜와 심판이 함께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속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계속 살려 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구약에 속하여서 예수님을 소개하는 자로 살았기에 불속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함께 계신분의 죽으심으로 그들은 구원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죽으신 그 분에 의해 온 세상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좀 이상합니까?

사실 육신이 있는 자는 불속에 들어가면 죽습니다.

우리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죽은 자로 간주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을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과 함께 하신 분, 즉 땅,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닌 신들의 세계, 하늘에 속한 분이 그들의 죽음에 함께 해 주셨기 때문에 이들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풀무불 속에서 살아남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이미 다니엘이 예언한 뜨인 돌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뜨인 돌이란 것이 그냥 힘으로 몰아붙이는 분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시어 죽임을 당하심으로 주님이 되시어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물론 그의 죽음은 느부갓네살과 같은 사고방식의 죄인들로 인한 죽음입니다.

자신을 왜 이 땅에 살아가게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자들로 인한 죽음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런 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이 심판 주 이심을 극명하게 증거되어 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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