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강해

강해38

푸른 섬 2008. 9. 14. 17:52

다윗을 기뻐하는 요나단  

사무엘상19장1-7

우리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야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요.


물이 진합니까? 피가 진합니까?


성경을 읽다보면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도 그 중에 한 내용입니다.


사울이 점점 더 미쳐가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사울이 미쳐간다라고 볼수 있겠지만 사울 본인의 입장에서는 그냥 자신의 속에서 당연히 나오는 것이 나올 뿐입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제거하는 다윗을 그냥 살려 둘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제거를 하려고 합니다.


부부싸움을 할때 이런 철칙이 있습니다.

절대로 시집에 대해 욕하지 마라.

아니면 절대로 처갓집에 대해 욕하지 마라.


왜 이런 말을 합니까?

그야 처가와 처가 일치되는 입장에 놓여 있고 시집과 남편의 집에 일치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처갓집을 욕하는 것은 곧 자신의 존재 기반을 욕하는 것이기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시집을 욕하는 것도 그렇지요.


어디 감히 시집을 욕합니까?

그것은 내 부모에 대한 모독아닙니까?


처가도 동일하겠지요.


사람들은 자신의 자존심, 존재 기반을 무너뜨리면 그냥 두지 않습니다.


아무리 이치에 맞는 말도 상대의 자존심, 아니면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참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것은 단지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국가에 속한 국민들도 그렇게 한패거리로 난리를 뜹니다.


내가 속한 국가를 모독하는 자는 아무리 입바른 소리를 하더라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입바른 소리든 무슨 소리든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 이 땅의 철칙입니다.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성경을 읽어 보면 답이 나오지요. 물론 안 나오는 사람도 많지만.

왜 자신들을 무시하느냐 아닙니까?


겉모습이야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제거하자라고 했지만, 그 내막은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의 문제 아닙니까?


우리도 이렇게 율법을 잘 지키고 있고 나름대로 착하게 살고 있는데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란 자가 와서 자신들의 죄악을 조목조목 따지시면서 고발하시니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나 자신의 잘못을 조목조목 따지면 기분 좋지요?


한 두 번은 참을 수 있겠습니다 마는 3년 동안 계속해서 조목조목 죄를 들추어 내 보세요.


아니 자신들은 죄라고 생각 안하는데, 잘못되었다고 생각 하지도 않는데 너 틀렸어라고 해 보세요.

얼마나 열받겠습니까?


지난주에 여기에서 아주 친하게 지내는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저기 큰 교회를 다닙니다.

예빈이를 왜 자신들 교회 유치부에 안 보내느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씀이 없는데 왜 그곳에 보냅니까?


그랬더니 막 화를 내는 겁니다. 왜 화를 내느냐?


그 요지는 이것입니다.

정 선생 당신말만 맞고 우리는 틀렸다 말입니까?


네. 그러니 우리는 각자 하고싶은대로 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 분이 화가 난 이유가 그것입니다.

자신들이 교회 열심히 다니고, 전도사가 열심히 기도하고 설교 준비하는 것들조차 다 부정해야 하느냐는 것이죠.


그리고 하는말이 한 두 번 설교 듣고 어떻게 아냐고.

설교란 한두번 들어 보면 압니다.


설교는 그 사람이 믿고 있는바를 내어 놓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의를 전하지 않는 교회에 예빈이를 보냅니까?


성경학교 한다고 해서 보냈더니만 예빈이가 왜 유치부있는 교회 안 보내 주냐고 난립니다.

재미있거든요. 또 한가지 과거 주거든요.

선생님도 잘 챙겨주고.

우리는 별로 재미 없잖아요. 친구들도 많지 않고. 말씀도 어른들고 함께 들어야 하고.


노래도, 율동도 없고.

그러니 얘들이 예배에 올려고 하겠습니까?


이 아이들도 자신들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곳, 즉 자신이 대우받는다는 느낌을 받는 곳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아이들도 제거합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자신들의 존재감을 채워주지 못하는 교회는 제거, 말씀도 제거..


믿는 부모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아이들 자신들의 자존심을 더욱더 높이는것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 납작해 지는 것.

이것은 아이들에게 재미가 없습니다. 어른들도 재미 없는데 아이들이 재미있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을 받은 자들이 자녀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증인아닙니까?


그러면 보여 줘야죠.


아이라고 뭘 알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자녀들이야기 하니까 자녀 이야기 하나 더 하겠습니다.


유치원 학부모를 보면 참으로 놀라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얼마전에 언론에서 보았는데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 할때 좋게 말한답니다.


그래야 부모들이 좋아한데요. 괜히 뭐 못하니, 뭐가 문제니 했다가는 오히려 문제가 발생할지 모른답니다. 우리 유치원도 마찬가지요.


아이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 못합니다. 부모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몇 번 시도를 해 봐도 이건 뭐 대화가 되어야죠.


그래서 아애 포기해 버립니다.


자녀는 자신의 분신이죠.

문제가 발견되면 고치면 되고 바꾸어 가면 되는데 그놈의 자존심이 얼마나 센지.


그래서 누구든지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제거.

유치원을 바꾸어 버립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고 요나단과 사울과 사울의 딸 미갈이 나옵니다.

참으로 우리의 본성과 정 반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왕위를 이어받을 자 아닙니까?


미갈이야 자신의 남편이 왕이 되면 좋겠지만..


이들이 누구를 돕습니까?

누구를 살립니까?


다윗을 살립니다.

우리가 요나단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나는 왕자다.

우리 아버지는 첫 번째 왕이고.


그러면 이 나라를 내가 물려 받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라이벌이 나타났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야 제거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나라이야기 하니까 너무 거리고 멀고, 내가 지금까지 모음 재산과 모든 것을 내 자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다 가져간다면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죽이려고 덤벼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요나단은 다윗을 기뻐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성도에게 찾아 오셨다는 것은 성도의 모든 것을 뺏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옆에 계셔서 조목조목 따지시면서 우리의 죄를 들추어 내십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떨까요?

네. 네.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린다고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한다면 그는 곧 사울의 마음을 가진자입니다.


성령이 성도안에 거하시면서  늘상 책망하시면서 성도를 예수님의 십자가 피 안으로 밀어 넣으십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자존심도, 자신이 지켜야  할 것도 , 어떤 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볼때 병신 쪼다 같습니다.

요나단이 그렇지 않습니까?

완전히 병신 쪼다 아닙니까? 다 내어 놓아야 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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