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강해

강해40

푸른 섬 2008. 10. 6. 15:27

요나단

사무엘상20:24-34

한국에는 기러기 아빠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을 유학보내는데 그곳에 엄마도 함께 보냅니다. 그리고 자신은 한국에 남아 돈을 벌어 유학비를 보내 주는 것입니다.


그저께 여기에 사는 어떤 분을 만났는데 이곳에 온지 10년정도 되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올 때와 그의 똑 같은 시기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50대 중반이 됩니다.

불과 10년 전만해도 돈을 자기 수중에 많이 갖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들놈 장가보낼때도 자신이 갖고 있던 비자금도 주고, 또한 아내에게 딸에게 돈을 한 뭉치씩 주었답니다. 아무튼 억단위를 넘어가는 모양입니다.


이곳에 와서도 몇 년간은 돈을 자신의 주머니에게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두달에 한번씩 한국에 들어가면 대우는 잘 받았다네요.


그래서 최근 몇 년사이 사업이 잘 안되어 한국에서 도로 용돈을 타 써야 하는 입장이랍니다.

이렇게 되니 얼마 전에 이런 대우를 받았답니다.


오랜만에 한국에 갔는데 며느리가 얼굴도 보지 않고 말로 인사만 하더래요.

아들놈도 그렇고.


이번에 딸을 시집보내는데 얼마나 열받고 있는지.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편을 들겠습니까?

그야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사람편을 들지 않겠습니까?


만일에 이 사람 이야기를 들으면서 잘 됐습니다.

그렇게 대우 받는 것이 우리 인생에게는 당연합니다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제가 기사대기를 한번 맞을지 모르겠죠.


사람들은 누구에게 무엇을 빼앗기는 것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사울왕과 요나단이 나옵니다.

20장 전체는 요나단에 대해 특별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요나단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한번 봅시다.

요나단이 다윗을 살리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죠.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지.


정말 다윗을 죽이려는 것인지 아닌지.

그것을 알아서 다윗에게 정보를 건네주죠.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욕을 엄청 얻어 먹고 죽임까지 당할 뻔합니다.


27절을 봅시다.

“이튿날 곧 달의 제이일에도 다윗의 자리가 오히려 비었으므로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에게 묻되 이새의 아들이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 식사에 나오지 아니하느뇨 요나단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다윗이 내게 베들레헴으로  가기를 간청하여 가로되 청컨대 나로 가게 하라 우리 가족이 그 성에게 제사할 일이 있으므로 나의 형이 내게 오기를  명하였으니 내가 네게 사랑을 받거든 나로 가서 내 형들을 보게 하라 하였으므로 그가 왕의  식사 자리에 오지 아니하였나이다.”


요나단이 사울왕의 마음을 압니다.

그런데 확실히 다윗을 죽일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인하는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아버지가 사울에 대해 별로 좋게 여기지 않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 하는 말을 보세요.

내가 네게 사랑을 받거든 이라는 표현을 아버지께 그대로 표현합니다.


아버지의 지금까지 행적을 보면 다윗은 사울의 사랑받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라는 요나단은 다윗을 자신의 사랑받는 대상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자 사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30절보세요.

사울이 요나단에게 노를 발하고 그에게 이르되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됨을 내게 어찌 알지 못하랴.


엄청나게 욕합니다.

도리에 어긋나고 악하고 불순하며 사람답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를 거스리는 이런 불효막심한 자식놈아라는 뜻이지요.

되먹지 못하게 태어난 놈이라는 것입니다.


사울왕이 왜 이런 말을 합니까?

31절에 나옵니다.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


요나단에게 물려줄 나라가 다윗이 살아 있다면 결코 든든히 설수 없다는 이유에서 자식을 욕한 것입니다.


그러자 요나단이 뭐라고 합니까?

아버지께 대 듭니다.

그가 무슨 죽을 일을 행했습니까?


이정도 되면 그 다음 상황이야 뻔하죠.

기사대가 한방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기사대기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단창을 들어 치려합니다.

말 안 듣는 자식 놈은 몽둥이가 약이죠.


심히 노하여 식사자리를 떠나버립니다.


사울의 마음은 확정되어 있죠.

다윗의 제거만이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는 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이렇게 보니까 우리 가슴이 꽁닥꽁닥 하지 않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대판 싸우는 모습. 제가 좀 과장했습니까?

이게 대판싸우는 모습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누구 때문에 대판 싸웁니까?

다윗 때문에 대판싸웁니다.


희한하죠.


요나단이 왜 아버지를 열받게 합니까?


다윗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열받게 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1장1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아닙니까?


십자가의 도, 복음이라는 것은 멸망하는 자들이 볼 때에는 미련한 것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는 것은 사울이 볼 때 그건 미친짓이라는 것입니다.

진짜 자식으로써, 아들로써 되먹지 못한 짓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볼때는 어떻습니까?

요나단이 잘하는 것입니까?

아니죠. 아닙니까?


잘하는 것입니까? 그러면 복음을 아는 자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그렇습니다.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입니다. 미친짓입니다. 정신 나간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말하면서 믿을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미련한 짓입니다.

멀쩡한 육체가 있고, 정신이 있는데 내가 뭐가 못나서 십자가지신 예수님을 믿어야 되지.


이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한다.


예수님 당시나 과거 다윗시대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믿고 전하는 것은 정말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마태복음10장34-39절을 봅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니라”


무시무시한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시죠.


십자가의 도라는 것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싸움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다윗을 사랑하는 요나단과 미워하는 사울이 부자지간에 싸움을 하듯이 말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아버지가 돈을 많이 갖고 있을 때에는 아버지 대우 하다고 수중에 돈이 없으니 아버지를 무시하니까 부자지간에 안 좋은 마음이 일어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 믿음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믿으면 불화한 가정에 평화가 오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화평하는 것이라고 인간의 상식은 주장하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은 어떻습니까?

무슨 아버지와 아들이 싸움을 일으키는 복음이 다 있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바닷가에 가면 깨진 병 유리 조작을 볼수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때 가끔 동해 쪽을 가보면, 특히 감포라는 곳을 가보면 그곳엔 왜 그렇게 깨진 병조각이 많은지.


그런데 그 병조각이 날카로운가, 그렇지 않습니다. 파도에 하도 얻어 맞아서 아주 부드러운 병조작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처음 병조각을 보았을때 무슨 이렇게 귀한 돌이 다 있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수도 없었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세월을 살다보면 복음이라는 모난부분 제거 작업에 돌입합니다.

날카로움을 제거하면 이렇게 살기 편한데..

왜 사람들에게 자꾸 시비를 걸어 분란을 일으키고, 특히 집안싸움을 일으키느냐.


그럴 필요가 뭐 있느냐.

그냥 복음이라는 것은 나 혼자 알면 되고 그냥 입다물고, 남들이 다 알아듣게 설교하고, 말하면 살기 얼마나 편한데.


왜 이런 현상이 이러나는고 하면 십자가의 도가 점점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멸망하는 자인가?

그야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만을 전하는 사람을 교회에서나 집에서나 친구들간이나 누구간에나 욕을 얻어먹게 되어 있는 것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검을 주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누가 아멘하고 받아들이겠습니까?

겉으로야 아멘입니다라고 하겠지만 실제로는 누가 내 딸하고 불화해야 하고, 내 아내하고 불화 해야 하고 내 아버지와 불화, 내 형제들과 불화하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십자가의 영을 받은 사람은 이렇게 살아진다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를 미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런 이야기 좀 들으며 살았으면 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전하면서 이런 예의도 없고, 효도도 모르는 놈아라는 말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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