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강해

강해41

푸른 섬 2008. 10. 15. 00:24

다윗의 거짓말

사무엘 상21장1-9

윤리나 도덕, 아니면 율법이라는 것은 늘상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저께 서울의 어느 큰 교회 목사 설교를 들었는데, 그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감동을 받았는고 하면 그 목사는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나 합리적으로 목회를 해 왔더라는 것입니다. 교회건물도 없으면서 탈북자를 돕는데 수십억을 헌금하고, 어려운 아이들 공부시키는데 수십억 장학재단인이 뭔지 모르지만 돈을 쓴다고 합니다.


그래서 항상 자신의 것을 희생하여서 , 내 집 크기 좀 덜 넓히고, 남을 도와 주는 일에 너무나 열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운영도 철저하게 토론을 거쳐 민주주의 방식으로, 즉 의견내고 의사 결정하는 다수결 원칙으로 운영해 왔던 모양입니다.


물론 교인들도 수천명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설교를 몇편 들어 보았는데 윤리적으로 도적적으로 또한 어느 누가 들어도 흠 잡을 만한 내용이 없었습니다. 특히 공부를 좀 많이 한 사람들이 들으면 너무나 감동되는 그런 설교입니다.


물론 설교라기 보다는 뭐라고 할까요. 연설에 가깝다라고 해야 할까요?


무식하게 밀어 붙이는 식의 설교가 아니라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설교였습니다.


지금 그 교회가 예배 장소를 빌려서 예배를 드리는데 장 소 문제가 발생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가 무슨 방법을 제시했는데 이번에는 어느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고 오직 말씀보고 기도하는 중, 설교하는 중에 그 방법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번엔 민주주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전문가인 목사에게 맡겨달라고 협박아닌 협박을 했습니다.


물론 제가 그 목사의 말이 틀렸다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옳다는 것도 아닙니다.


무슨 방식을 취하던지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면 되는 것이지요.

의견 충돌이 있으면 자기를 죽이는 쪽으로 가면 되고요.


물론 자신의 탐욕, 인간의 의를 노골적으로 추구한다면 거절해야 하겠지요.


제가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참으로 사람들이 보기에 휼륭하게 목회하는 서울의 어느 교회 목사를 예를 든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어쩌면 그렇게 다를까라는 생각을 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에 쓰여진 내용과 그 목사가 설교하는 내용이 어쩌면 그렇게 180도 다른가 라는 것입니다.

물론 설교를 하면서 교회의 현 문제를 거론 할 수 도 있습니다.

말씀을 따라 무엇이 주님을 제대로 증거하는 것인지 생각해야 하지요.


그러나 제가 180도 다르다는 것은 그 분이 취한 방식, 행동, 견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관심과 그 목사의 관심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 목사가 오늘 본문을 보면 어떻게 해석할지 모르겠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높으로 도망간 내용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그런데 도망간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윗이 놉으로 가서 행동한 내용이 우리들을 당황스럽게 합니다.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묻습니다.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하는 자가 없느냐?

아마 다윗이 움직일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움직인 모양입니다.


반드시 그들과 함께 해야 하는 다윗인데 혼자 온 것을 본 아히멜렉이 당연히 궁금할 것이 아닙니까?


그때 다윗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2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바와 네게 명한 바 일의 아무 것이라도  사람에게 알게 하지 마라 하시기로  내가나의 소년들을 여차여차한 곳으로 약정하였나이다”


다윗의 말이 진실입니까 아니면 거짓입니까?

거짓이지요.


지금 그것도 누구한테 거짓말을 합니까?

하나님의 제사장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상상이 갑니까?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받은 다윗이 지금 하나님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지요.

먹을 것을 달라고 합니다.


우리가 보기엔 살기 위해서 거짓말하고 살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죠?


그러자 제사장 아히멜렉이 어떻게 합니까?

거룩한 떡이 있다고 하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부녀를 가까이만 하지 않았으면 먹을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룩한 떡은 아무나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제사장이나 제사장 자신이나 함께 한 자들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입니다.


레위기 24장8, 9절을 봅시다.

“항상 매안식일에 이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할 찌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 이 떡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 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 찌니 이는 여호와의 화 제중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이 거룩함이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


영원한 규레를 지금 누가 깨고 있습니까?

다윗이 깨고 있죠.


장소도 깨어 버리고 먹는 사람의 기준도 깨어 버리고.

무슨 이런 사람이 다 있습니까?


거짓말에다가 하나님의 율법도 우습게 여기는 다윗.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다윗이 지금 하는 것이 잘하는 짓입니까 아니면 못하는 짓입니까?


물론 우리가 이렇게도 볼수 있죠.


그 당시 제사장도 부패하여서 하나님의 율법을 좀 확대해석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떡을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에게 주었다라고 말입니다. 물론 부녀와 가까이만 안했다면이라는 조건이 붙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제사장 아히멜렉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생각해야하는 것은 다윗입니다.

다윗의 행동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칭찬 들을 행동을 했습니까?

사람들의 보기에 동의하고 인정할 만한 행동입니까?


제가 어느 주석을 보니 오늘 본문을 이렇게 해석해 놓았습니다.

다윗이 다급한 상황에서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나중에 많은 사람의 제사장이 죽었다라고 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써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주석에서 진설병 먹은 것은 속 빼 버립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다윗과 그리고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먹은 진설병 사건에 대해서 두둔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거짓말 하는 것이 더 나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하는 것이 더 나쁩니까? 그것도 배고 고프기 때문에.


뭐다 더 나쁩니까?


이게 우리들이 생각하는 판단 기준입니다.


그럼 이제 마태복음으로 한번 넘어가 봅시다.

12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 때는 제자들이 시장할 때였습니다.


타임잉이 끝내 주죠.


하필 시장할 때즈음에 밀밭사이로 지나가시는지.


제자들이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바리새인들이 난리 법석을 떨고 있습니다.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율법어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당신 무슨 별 볼이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보는 사무엘 상 21장을 말씀하십니다.

3,4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자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미 바리새인들이나 예수님 모두가 인정하는 것은 다윗의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전혀 거스리지 않는다는 말씀 아닙니까?



5,6절입니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안식을 범하면서 제사장들을 일을 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경우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누구시다. 성전보다 더 큰이시다.


즉 참 성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의 행동은 죄가 된다 된지 않는다.

죄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윗의 거짓말이나 진설병을 먹은 행위는 죄가 안된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의가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거하는 자로 살았기 때문에 말입니다.


여기에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상식, 율법, 도덕, 윤리가 다 깨어져 버립니다.


우리들이 생각하기에는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별나서 지금 문제를 일으키시어 지적하시는 것 같죠.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별난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를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시장할 때 그것도 안식일 날 밀밭사이로 지나가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의가 된다는 것이지요.

이 놀라운 사실이 복음입니다.


사람들은, 목사들은 자꾸 자꾸 무엇을 꺼집어 내려고 하는 고 하면 예수님 믿으니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라는 것을 꺼집어 내려고 해요.


그러다보면 무엇이 무시되는지 아십니까?

예수님 안에 있다는 사실, 그 은혜속에 있다는 사실. 죄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람들로부터 잊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렇게 민주적으로 하지 않으면 죄요, 자신을 희생하여 남에게 도와주지 않으면 죄가 되는 요상항 법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인 인간의 본성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완전히 무로 돌려 버리는 결과가 됩니다.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 예수님이시오, 예수님 안에 성도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즉 이 땅의 흐름, 풍조를 근거로 죄가 된다  죄가 아니다를 구분하는 것이야 말로 오히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설교하면 누가 박수를 치는고 하면 자기는 어떤 것도 희생하지 않으면서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언어 유희를 즐기는 자들이 박수를 칩니다.


봐라 저렇게 목회하고 열심히 봉사, 희생해도 오히려 십자가 원수가 아니냐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언어유희를 즐거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복음을 이용해 자기희생, 자기 부인을 오히려 하지 않는 것이 의라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도 다윗과 상관 없는 자입니다.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입니다.


다윗은 기름 부음을 입었기 때문에 지금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거짓말도 해야 하고, 율법도 범해야 하는 그런 입장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에 성전 안에 있기 때문에 죄가 없다. 의롭다 끝이 아닙니다.

이 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조롱 당하고 미움받고 죽임 당하고, 헐벗고, 굶주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우리를 여간 당황스럽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이 이렇게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기준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이 기준안에 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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