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강해

강해43

푸른 섬 2008. 10. 26. 18:52

원통한 자

사무엘상22장1-5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하고,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에겐 어떤 욕구가 있다고 말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소속의 욕구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소속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 학자가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인간은 한 쪽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소속이냐, 아니면 예수님의 소속이냐?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인간은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되느냐 아니면 마귀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알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인간군상들이 사는 사회집단입니다.


사람들이 모인 집단, 써클이나, 클럽에 가보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자신의 존재의의를 마음껏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입을 다물고 침묵함으로, 어떤 사람은 입을 열고 자신의 의견을 소신껏 말함으로.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가진 재능, 실력을 뽐내면서 자신이 이런 존재다라고 타인들에게 각인시킵니다.


자신을 대견스러워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곳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라는 모임, 물론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와는 정 반대의 모습입니다.


현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라고 간판을 건 수많은 단체들을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개인들이 교회에서 무엇을 의도하고, 노리며 신앙생활을 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안에서 죽자가 아니라 대우받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모습이 형편없는 모습이다라고 하면 사람들은 그 교회를 떠나 버립니다.

형편없다고 했을때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을 것입니다.


구성원들. 서울의 어떤 교회는 정치가들, 학자들, 경제인들이 많이 온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교회를 선호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선호합니다.


또 한 가지는 목사의 설교입니다.

그 교회의 목사가 어떤 설교를 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선택이 달라집니다.


누가 나의 취향에 맞게 설교를 하느냐로 교회를 결정합니다.


또 한 가지는 숫자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모이느냐에 따라 교회를 결정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존재의의를 더욱더 부각시킬 수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여기에서는 두 종류의 인간이 나옵니다.

한 종류는 그 모임 안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 다른 한 종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예배만 꼬박꼬박 참석하고, 헌금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탐욕에 근거하여 한 쪽은 밀착하여, 다른 한쪽은 거리를 두고 모임에 참석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예배당 모양입니다.

요즘 한국교회가 장사가 되지 않아 문닫는 곳에 한 두 곳이 아니랍니다.

왜 그런고 하면 이미 소비자들은 자신들의 기호를 어디에 맞춥니까?


많은 것을 희생하지 않는 쪽으로 맞춥니다.

그래서 자신이 많이 희생해야 하는 모임은 가지 않습니다.


이 뿐만 아니겠지요. 목사의 학력 수준, 말투, 사모님의 모습 등등.


별별 조건들이 다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들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할 때 형편없다라고 간주하면 언제나 버릴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다른 선택을 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다다르고자 하는 곳이 어디 일까요?

마귀가 자리 잡고 있는 곳입니다.


세상 권세, 돈, 사람들로부터 숭배받는 것, 이곳에 도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장 잘 비판하는 것이 무엇인고하면 예수님을 믿고 가난하다. 어렵게 산다. 병이 낫다. 이렇게 되면 옳거니 잘 됐구나 생각하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교인수가 줄어 들면 비판하고.


물론 대 놓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속으로 그렇게 하겠지요.

대놓고 하는 인간도 있긴 있습니다.


반대로 잘살면, 건강하면, 교인수 늘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시기심과 함께 하나님의 축복이니 뭐니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를 또 당황스럽게 합니다.

요즘 본문을 보면 계속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다윗이 도망 다니는 것도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다윗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자기 식구들, 그리고 환난당한 모든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의 주위에 있는 사람이라곤 친족들, 그리고 환난당한 자, 빚진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입니다.


이들을 외부에서 볼때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봐라 . 다윗 저놈, 다윗을 따르는 자들은 자기 식구들, 그리고 자신의 삶에 찌들린 자들이 함께 하는 구나.


저게 무슨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냐.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장수들도 있고, 권력자도 있고, 부자도 있고 이렇게 말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보기에 전혀 참여하고 싶지 않는 집단입니다.


앞서 제가 많은 예를 들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이런 다윗의 모임에 참여하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모임이란 모든 사람들로부터, 대중들로부터 따돌림받고, 그것도 모자라 국가 권력으로부터도 미움을 받는 그런 집단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다윗을 인정하긴 했지요. 그러나 실제로 도망자로, 미친모습으로, 따르는 자들이라곤 자신의 가족들과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윗을 따르지 않았잖아요.


이게 핵심입니다. 400여명만 다윗을 따랐고 나머지는 따르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죽인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자는 만만이라는 말이 무색합니다.

물론 우리는 또한 환난 당한 자나,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을 아주 좋게 해석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었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주석을 보게 되면 화난 당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다윗의 학정 아래서 다윗을 사랑하며 의로운 행동을 했던 자들, 그리고 빚진 자에 대해서는 사울의 잘못된  경제 정책으로 말미암아 고리대금업자에 시달리던 백성들, 그리고 마음이 원통한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시행되던 사울의 정치에 대해 영적 고통을 받든 자들이라고 해석합니다.


물론 그렇게도 볼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것은 우리가 성경은 너무 우리의 선입견에 근거하여 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7장3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어떤 소리를 들었는지가 나옵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들었을까요?

그들 눈에 그렇게 비쳤기 때문입니다.


36절 이하를 보면 바리새인 집에 들어가서 앉으셨을때 한 여인이 향유로 예수님께 붓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이 뭐라고 합니까?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였으면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이제 무슨 말입니까?

상종치 않는 인간이란 말입니다.


선지자였다면 어떻게 이런 여인의 향유를 받을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딱 맞는 말 아닙니까?

죄인의 친구.


마태복음9장10,11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2,13절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가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다윗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다윗이 아둘람 굴로 도망쳤을 때 다윗과 한 패거리가 된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이 받았던 평가와 달랐을까요?

그러면 세리와 창기가 정말 세리였고 창기가 아니었습니까?


진짜 창기였고, 세리였습니다. 실제로 죄인이었고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다윗이 증거한 것이 바로 이런 예수님입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사람들의 평가가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증거한 다윗이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평가로 볼 때에는 꽝입니다.

특히 고상한 사람들, 권력자들, 돈 많은 사람들이 볼 때 더더욱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주님은 어떤 주님이십니까?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십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십니다.


이것을 모르는 자들은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자신이 어떤 집단, 단체에 소속된 것으로 자랑하고, 뻐기고 교만하며, 잘난 체 하며 살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 소속된 것, 그 은혜만으로 감사하며 사는 자입니다.

이 은혜를 찾아다니는 자가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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