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강해17

푸른 섬 2009. 7. 13. 08:07
죽음과 이용
사무엘 하 1장15-31
요즘 우리는 죽음에 대해 많이 듣습니다.
이곳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한국의 유명연예인의 자살과 전직 대통령의 자살. 그리고 최근에는 마이클 잭슨의 죽음까지.

그러다 보니 죽음조차도 이제는 하나의 이벤트로 여겨지게 됩니다.
물론 돈 벌이가 되기 때문이겠지요.

이사야 57장1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 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의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비한 자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떤 인간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야 뻔하지요. 돈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이익이 안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요즘 이상한 일들이 많죠.
의인의 죽음에 대해 마음에 두고 있는 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익되거든요.

예수님의 죽음, 그리고 부활을 이용해 자신을 이롭게 할 수 있다 말입니다.

자신의 탐욕을 끝없이 채워 줄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의인이 죽을 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다는 말씀을 멋지게 피해가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자신의 탐욕을 그대로 성취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님을 죽이지 않고 예수님을 믿으면서 자신의 탐욕을 이루어간다.
이것이 누구의 항변입니까?

말라기1장6절을 봅시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 함이 어디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제사장들을 결코 주의 이름을 멸시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사를 꼬박꼬박 드렸다는 것이지요.

물론 내용물에 있어서는 문제가 되지만.
그러나 제사장들 입장에서는 내용물에는 아무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사만 드리면 되었지 그 내용물을 갖고 시비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되었지 어떻게 믿느냐, 무엇을 믿느냐가 무슨 문제냐라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항변하겠지요?
그때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깨끗한 떡을 드리지 않았고 흠없는 제물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만 우리는 다르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되었지 무슨 다른 것이 필요합니까?
내 욕심채우는 것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인데 이것이 뭐가 문제가 됩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고방식이 말라기에 나오는 제사장들과 뭐가 다릅니까?
말씀에 찔림을 받기는 커녕 자기 변명만 늘어 놓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음조차 이용해 먹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나옵니다.
나단 선지자의 말대로 우리아의 처가 낳은 아이가 심히 앓다가 죽습니다.
이때 다윗이 취한 행동을 보세요.

심히 앓을때에는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금식합니다. 밤새도록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죽었습니다.

죽고 나니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20절입니다.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rudqok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 지라.”

너무 상반된 모습을 다윗이 보입니다.
그러니 신복들이 당황해 합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그러자 다윗이 대답합니다.

22-23절을 읽어 봅시다.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이 말이 이해 됩니까?
우리 같으면 어차피 죽으리라고 했으니 그양 믿고 말지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알죠.
그래서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 달라고 밤새 금식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의 죽음과 함께 이 간구가 끝이 납니다.
말씀대로 되어짐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 때문에 아이가 대신 죽었음을 믿는 태도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죽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실상 죽어야 한 자가 당신이지만 다윗은 다윗이 해야 할 역할이 있기 때문에 아이가 대신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여디디아를 낳는 것입니다.
여디디아가 곧 솔로몬인데 여디디아의 뜻이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희한하죠.
다윗의 죄로 인해 한 아이는 죽고 한 아이는 새로 태어나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로 살게 됩니다.
이것을 보니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말씀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마태복음3장17절하반절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다윗은 죽음과 다시 살아남을 동시에 경험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경험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하게 됩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을 보겠습니다.
암몬 자손의 왕성인 랍바를 쳐서 취하게 됩니다.

이 성에서 누가 죽었습니까?
여호와의 전쟁에 목숨을 내건 우리아가 죽었습니다.

그 죽음의 댓가로 누가 이 성을 취합니까?
다윗왕이 이 성을 취합니다.

참 희한하죠.
그냥 암몬 자손의 왕성인 랍바를 쳐서 취하게 하시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밧세바를 집어 넣어시고, 우리아를 집어 넣어시고 아이의 죽음과 여디디아를 태어 나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과정에서 다윗은 자신이 어떤 자로 드러납니까?
죄인으로 드러납니다.

실상 죽어야 할 대상이 암몬 뿐만 아니라 자신도 죽어야 하죠.
그러나 다윗은 암몬의 왕성인 랍바를 취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다윗은 부정됩니다.
그러면서 오직 하나님의 사랑 만이 높이 부각됩니다.

오늘 본문을 그냥 보게 되면 우리는 다윗이 마치 아이의 죽음을 이용하는 것 같죠.
제가 서론에 말씀드린 그런 류로 다윗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죠.
전쟁의 승리는 누구의 승리입니까?
다윗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우리아의 희생의 승리요, 죽은 아이로 인한 승리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때에는 이것을 담고 있는 자입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자요. 동시에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부활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죽으실 때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믿고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때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이용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이용당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아이가 그저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아빠, 겉보기가 뭐야 라고 말입니다.

6살인 우리아이에겐 처음 들리는 단어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엄마가 이렇게 설명합니다.


과자를 사면 상자 안에 과자가 있지?
그런데 과자봉지나 상자에 있는 모습과 과자 내용이 같아 달라.

그러자. 다르다라고 합니다.
그래. 그래서 하는 말이 겉보기와 속이 다르다고 하는 거야.

신앙생활을 이렇게 포장지 처럼 하는 자들이 말라기에 나오는 제사장들이요 오늘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이용해 먹는 자들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이용당하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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