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스크랩] 강해 16

푸른 섬 2009. 7. 5. 20:54

선지자 나단을 보내심

사무엘하12장1-14

사람들은 어떨 때 하나님을 찾습니까?

여러 경우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아니면 아플때, 슬플 때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즉 자신이 부족하기에 뭔가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찾습니다.


또한 어떨 때에 하나님을 찾는고 하면 자신 만만할 때 찾습니다.

내가 뭔가 하나님께 해 드릴 수 있을 때 하나님을 찾죠.


자신의 바램이 어느 정도 채워 졌을때 신께와서 한묶음 내어 놓습니다.


그런데 주님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찾아오시는 것은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니면 뭔가를 바래서 오시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한 비유를 다윗에게 들려 줍니다.


한 성에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부자고 하나는 가난했습니다.


부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자기가 사서 기르는 암양 새끼 하나뿐이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암양새끼는 자신의 딸처럼 귀한 양이었습니다.

집에 강아지를 길러본 사람은 잘 알 것입니다.


어느 날 어떤 길 가는 사람이 부잣집에 왔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이 행인을 대접하는데 자신의 양과 소는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의 양 새끼를 빼앗아 자신에게 온 사람을 대접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다윗이 크게 노해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가  갚아 주어야 하리라.


다윗은 이 비유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해했습니까?


양 한 마리 때문에 죽을 죄입니까?

물론 네배를 갚는 것은 율법에 따라 네배를 갚아 주는 말입니다.

양을 훔쳤으면 네배를 갚아야 하는데 말씀이 출애굽기 22장1절에 나옵니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 지니라”


다윗은 율법을 완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왜 네 배만 갚으면 되지 마땅히 죽을 자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가난한 자에게 양 한 마리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그 양은 딸과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여기 있는 사람들은 딸과 같다는 말 다 이해하죠?


딸이 없는 사람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할 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아들만 있다고 모르겠습니까?


다윗은 선지자 나단이 하는 이야기의 의미를 율법에 근거하여 제대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 당사자가 다윗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한 여인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전쟁에 열심인 우리아를 살해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그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렇죠.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고 비로소 자신의 죄를 알게 됩니다.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죄를 알지 못했다.

우리아의 아내를 취한 후 우리아를 계획적으로 살해한 일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우리같이 윤리적이고 양심적인 사람들은 다윗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걸 아셔야 합니다.

인간은 본성이 그렇습니다.


율법에 그렇게 정통한 다윗이 율법을 몰라서 자신이 행한 짓이 죽을 죄임을 몰랐던 것일까요?

이거 한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다윗은 율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죠. 그런 그가 무엇을 하면 안되고 무엇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고 우리아를 살해한 것에 대해서는 왜 율법의 기준이 작용하지 않습니까?

작동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작동 멈춤, 기계고장입니다.


이게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는 본 모습입니다.


선지자 나단을 보내시기 전에는 절대로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좀 심합니까?


제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성경말씀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4장13-14절을 보겠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 지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이런 말씀이 성경에 있다는 것이 놀랍지요.


죄를 범하였지만 스스로 깨달 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죠.


그럴 때 그는 희생제물을 통해 속죄함을 얻게 됩니다.


다윗이 특별히 악해서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우린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너무 착하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아주 괜찮은 인간이라 생각하며 착각하고 삽니다.


그래서 자꾸 우리는 다윗이 나빠 보이고 미워 보이고, 동시에 나는 다윗에 비해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안 그런데요.

안 그런 인간 없습니다.


이건 제가 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한다고 책망하셨죠.


이 말씀은 단순히 바리새인들한테나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 앉아 있는 우리들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자기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이게 인간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종노릇 하는 인간의 본모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그건 나쁜 짓이야. 죄야라고 생각할 지라도 다윗은 절대로 자신이 죄를 범했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언제까지.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보내시기 전까지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죠.


그런데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죄를 늘상 깨닫습니까?


그래서 늘상 십자가로 달려 갑니까?


요한복음 15장5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면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나오는데 그 특징이 무엇인고 하면 한번 보겠습니다.

8-11절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희한한 말씀아닙니까?

성령받은 사람들이 책망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성령받지 않는 사람들도 책망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그 책망을 깨닫는 자는 오직 성령받은자, 곧 예수님의 몸의 지체인 자들만이 책망을 알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좀 희한하죠.

성령 받으면 변화되어 새사람 되어 더 이상 책망이 없는 세계로 나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십자가 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성령님을 제대로 받은 분 맞죠.


그런데 성령님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자들의 특징은 이와 다릅니다.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에겐 십자가만을 자랑한다는 것이 불가능하죠.


그러면 이제 우리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면 죄를 깨달으면 끝이냐라는 말입니다.


죄에 대한 값은 없습니까?

우리 인간이 치러야 하는 죄값은 없습니까?


다윗을 보면 자신이 행한 죄의 값을 톡톡히 치루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죄의 값을 안치뤄도 됩니까?

이사야 53장4-6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을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믿는 성도의 믿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행동을 잘 못 했기 때문에 스스로 죄 값을 치루려고 하지 마세요.

주님이 다 치루어 주셨습니다.


이것을 못믿는 자는 성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이 여러분들은 말 장난으로 들리십니까?

아니면 상한 심령으로 들려 집니까?


시편51편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가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리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며 전파하리이다 주는 제사를 즐거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이런 상한 심령이 있는 자가 천국백성입니다.









출처 : BLUE ISLAND
글쓴이 : 정석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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