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서 강해

강해 1

푸른 섬 2010. 7. 30. 09:06

묵시

미가1:1


교회를 너무 오래 다닌 사람이나 교회를 다닌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의 공통된 바램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나도 저 사람처럼 되어 보았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고난도 한번 당해 보았으면 하고 십자가에 못도 한번 박혀 보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능력만 된다면 이런 일도 한번 멋있게 치르고 싶은 것입니다.


죽은 자도 살려 보고 병도 고쳐 보고, 저만 이런 맘이 가끔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저께 어떤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분들이 뭔가 추진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약간 문제가 되는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직통 계시를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실 것을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표현을 한 것이지요.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다급한 일 힘든 일을 만날 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을 하느냐입니다.


제가 몇일 전에 이곳에 와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해야 될 일은 많고 우리가 풀수 있는 일은 없고 참으로 막막했습니다.


방법이 없어 보였기에 더더욱 답답한 것이지요.


그런데 왜 답답합니까?

왜 막막합니까?


왜 사방이 높은 철벽으로 쌓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살려는 것 때문입니다.


살려고 하니 문제를 풀어야 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살아갈 수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물론 저야 별로 답답한 것이 없었습니다마는.


어차피 갈거 뭐 잘 됐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집에 있어도 다른 생각을 하는 분이 있잖습니까?


갈땐 가더라도 반드시 해야만 일 이 있는데 이렇게 되면 안된다고 잠시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물론 금세 나와 같은 생각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 다급한 상황에서 아니면 뭔가 해결점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무엇이 나옵니까?


요나서를 보면 죽음에 처한 뱃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신을 찾죠?

당연합니다.


그런데 신을 찾는 다는자체가 그 사람이 지금 우상숭배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신이란 자신을 위해 출동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요나의 하나님은 다르죠.

죽음으로 나아가는 요나입니다.


사람들은 다급해지면 찾습니다. 신을, 하나님을, 예수님을, 부처를, 별의 별 것을 다 찾습니다.


이유는 간단하죠.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좀 내가 살만한 공간을 , 여지를 남겨달라는 것입니다.


이것마저 없어지면 나더러 어쩌란 말입니까라는 신에 대한 분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저주입니다.


나를 이런 식으로 몰아갈 것 같으면 당신 같은 예수는 나에게 있어서 저주할 대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 같은 사람을 좋아합니까 싫어합니까?


이렇게 물으면 당연히 여러분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야 당연히 선지자같은 분들을 열열이 환영하는 바이올시다.


우리가 선지자같은 분들을 거절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우린 언제나 십자가 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열왕기상22장을 보면 미가야 선지자가 나옵니다.

8절을 봅시다.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오히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소”

참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아합 왕은  아주 솔직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길한 일을 예언하지 않고 흉한 일만 예언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설날이 지났습니다.

설날에 인사가 무엇입니까?


복 많이 받으세요가 아닙니까?

그런데 복 받으라 하면서 길한 일을 말하지 않고 흉한 일을 말한다 해 보세요.


아마 세배 하다가 얻어 맞기 딱 좋을 것입니다.

세배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아니면 다 저주 받습니다.


지옥갑니다. 예수님의  피능력으로 천국갈수 있습니다.

아니면 지옥불에 갑니다.라고 해보세요.




아합왕에게 있어서 미가야 선지자는 꼴도 보기 싫은 선지자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미가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길한 일을 예언하는 자가 아닙니다.

흉한 일을 예언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시대는 참으로 이상합니다.

선지자들이 전하였던 그 예수님을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으니 말입니다.


베드로 전서1장8-12절을 봅시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선지자들은 자신의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길한 일을 예언하는 자가 아니라 흉한 일을 예언하는 자로 낙인 찍힌 선지자도 동일합니다.

이들 역시 제대로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을 통해 받을 성도들의 은혜에 대해서 예언한 것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의 영을 받은 자로 제대로 예수님의 주되심을 전했다는 것이지요.

무엇으로 말입니까?


길한 일을 예언하는 자가 아니라 흉한 일을 예언하는 자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게 성경전체를 통해 볼 때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단지 한 선지자의 부분에 불과하다는 말입니까?


이게 여러분들 궁금하지 않습니까?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길한일을 예언하는 자는 십자가의 영이 없는 자입니다.

오히려 인간들이 볼때 흉한일을 예언하는 자는 십자가의 영이 있는 자입니다.


본문에서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고 하십니다.

묵시가 임하면 좋을 것 같죠.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좋을 것 같죠.

다급한 문제가 해결되고, 막혔던 것이 확 풀릴 것이라 생각되어 집니까?


다 우상입니다.


묵시가 임하면 완전히 박살납니다.

드러나지 않는 죄악이 없고 그 죄로 인해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위에 긍휼이 임합니다.


진짜 주님을 만나게 되면 진짜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면 우린 정말 흉한 일만 당해야 하는 인생임을 알게 됩니다.


누가복음5장1-11절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만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그 일행들이 밤새도록 열심히 수고했는데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엄청나게 많이 잡힌 것입니다.


두 배 가득 잡힌 것입니다.

이것을 본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뭐라고 하는지 한번 보세요.

8절입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물고기를 엄청 많이 잡은 것 하고 베드로의 말이 연관성이 있습니까?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할까요?

예수님 정말 예수님 말씀에 의지하니 이렇게 많이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예수님 앞으로도 예수님 말씀에 의지하여 살테니 부디 저와 동행해 주십시오.

정말 예수님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예수님 저를 떠나지 말아주세요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주변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거나 아니면 예수님을 믿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이 원하는 예수님 상은 어떤 예수님 상입니까?


길한 일. 그래요 고기 많이 잡히는 일, 사업 잘 되는 일, 자녀 공부 잘하는 일, 마음의 답답함을 해결해 주는 일.

이런 일을 해 주시는 예수님 상 아닙니까?


이런 예수님이시라면 언제나 나와 함께 해 주세요 하는 신앙아닙니까?

이게 바로 우상예수입니다.

베드로는 진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물고기를 엉청나게 많이 잡았습니다.

사업이 번창한 것이지요.

떼돈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겐 이것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버려야 할 배설물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지금 죽음에 직면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된다면 저주받아 심판받아야 할 대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잠시 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자체가 죄인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꿈꾸는 예수님과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든 계시가 우리의 기대와는 너무 다르게 드러 납니다.


인간들은 제발 두 배와 그곳에 가득한 물고기도 버리지 말고 , 예수님도 나와 함께 해 주십사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자들 아닙니까?


이런 자들에게 복음은 길한 일이 아니라 흉한일이지요.

복음은 그야 말로 기쁜 소식인데 사실 복음은 흉한 소식입니다.


묵시가 기쁜소식입니까 아니면 흉한 소식입니까?


기쁜 소식입니다. 누구에게 말입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 나를 떠나소서라고 외치는 자에겐 그렇습니다.


그런데 물고기가 배에 가득, 이거 좋습니다. 예수님 나와 영원히 함께 동행해 주세요 하는 자에겐 흉한 소식이요 심판의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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