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서 강해

강해 5

푸른 섬 2010. 7. 30. 09:10

왕이 있는 인생과 왕이 없는 인생

미가2장12-13

11절부터 읽어 보면
“사람이 만일 허망히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

그리고는 12절에서

“야곱아 내가 정녕히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정녕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 양떼 같게 하며 초장의 양떼 같게 하리니 그들의 인수가 많으므로 소리가 크게 들릴 것이며”

라고 합니다.


연결이 됩니까?

글이 비약을 해 버립니다.

비약이라는 말 아시죠?


논리나 사고방식 따위가 그 차례나 단계를 따르지 아니하고 뛰어넘는 것을 비약이라고 합니다.


차례나 단계를 따라서 논리를 , 글을, 사고 방식을 진행 시켜야 하는데 갑자기 난데 없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앞의 문맥과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이 등장해 버리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아마 이 글 잘못 쓰였다.


이 성경 어디에선가 짜집기 했을 것이다.

아니면 저자가 다르든지.


그리고 우리가 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남은 자를 모을 것 같으면 왜 심판하십니까?


이게 또한 우리들이 가지는 의문아닙니까?


처음부터 철저하게 보호하는 양무리들로 남겨 두시지 왜 그들을 죄악가운데 두셨다가 멸망하시고 다시 남은 자들 모으시느냐 말입니다.


먼저 우리들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성경이란 인간의 이해를 돕기위해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비약했다라는 비판을 하든지 말든지 상관없는 것이 성경말씀입니다.


오히려 그런 비판을 들음으로 인간의 죄를 하나 더 들추어 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갑자 스러운 상황변화를 왜 기록하셨을까?

이것을 알려면 남은 자를 알아야 합니다.


12절을 보게 되면 남은 자라는 것이  마치 이스라엘백성들 중의 남은 자라고 이해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정녕히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정녕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라는 표현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자대로 읽으면 유다백성은 다 모으고 북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은다라고 해석될 수 있겠죠.

그런데 이런 시절은 없었습니다.

포로 잡혀 간후, 포로 귀한 후 그 후 어느 시절에도 이런 시대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우리는 거꾸로 해석해 들어가야 합니다.

거꾸로 해석해 들어간다는 말은 예수님쪽에서 해석해 들어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남은 자를 어떻게 이해하셨고, 모으는 무리들이 어떤 자들로 규정하셨습니까?


남은 자들은, 다시 모으는 무리는 자신들의 죄가 분명합니다.

미가서에서도 나타났듯이 이들이 죄없는 자들이 아니라 죄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남은 자들이며 모으시는 무리들이 됩니다.


마태복음1장21절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그냥 구원자라고 해 버리면 될 터인데 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해석을 합니까?

사람들은 그냥 구원자가 좋잖아요.


그래서 영화같은 것을 보면 구원자들이 얼마나 많이 등장합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단순히 구원자가 아니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이라는 자들이 있고 이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누가 배제됩니까?


자기 백성 아닌자들은 배제됩니다.

이들은 저희 죄에서 구원안하신다는 것이지요.


그냥 죄 가운데 빠져 지옥가도록 하신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에 의해 규정되는 구원받는 자들은, 남은 자는 자기 백성으로서 죄에서 구원함을 입은 자입니다.


예수님에 의해 죄용서함을 받은 자들이 천국 백성이요 참 양떼들이 됩니다.


요한복음10장을 보면 예수님이 양의 문이시오 선한 목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양떼들은 목자를 알고 목자도 양떼를 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자들만 예수님의 참 양떼라는 말씀이지요.


로마서 11장25-26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결국 누가 참 이스라엘입니까?

죄용서함을 받은 자들이 참 이스라엘입니다.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이 참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자기 백성을  친히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 백성들은 왕의 피로 죄용서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등장 자체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분으로 등장하신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미가서2장11절까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죄악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곧장 남은 자를 언급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록한 이유와 예수님의 오심을 비교해보면 전혀 어색하지 않고 그 이가 딱 맞아 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은 심판과 구원이 겹쳐져 있는 상황을 말씀하십니다.


미가서를 보면 심판과 구원이 따로 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은 문맥상 비약적으로 12,13절이 기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것이 심판과 딱 붙여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늘 본문은 전혀 비약적이 아닙니다.

심판과 구원을 동전양면과 같이 붙여 두심으로 말미암아 심판의 의미,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려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이 그렇죠.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신다고 하시잖아요.

그렇다면 저희 죄에서 구원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심판입니다. 멸망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심판이라는 바탕 위에서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 철저하게 죄인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 가룟유다는 마귀의 종노릇을 제대로 감당해야 했고요.


그러면 왜 이렇게 이런 식으로 심판의 근거를 완벽하게 확보해 놓으시고 구원을 이루십니까?

그 이유를 로마서 11장32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결국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을 밟히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님이 누구십니까?


사도행전2장 36절을 봅시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그분,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결국 주님을 전하시기 위해서 북이스라엘 멸망, 남유다 멸망, 다시 포로 귀환 멸망을 일으키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기 위해 그렇게 복잡한 역사를 끌어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허무합니까 아니면 놀랍습니까?

성령받은 사도 바울은 너무나 놀라워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설명하면 기껏 그것 하려고 하나님께서 역사라는 수레바퀴를 끌어 오신 거야. 천지 창조하신 거야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왜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고 남유다고 멸망시키셔서 남을 자를 만들어내시는가?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까요?


이들은 또한 거꾸로 해석합니다.

멸망 안당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들의 관심은 오직 살아 남는 것, 잘 사는 것,  이 땅에서 영원한 것에만 있습니다.


그저께 어떤 사람이랑 대화를 하다가 제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대뜸 저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 믿으면 다 잘되냐?


그러면서 하는말이 예수님 믿으면 잘 된데요. 이유가 무엇인고 하면 그곳에 가서 물건도 사고 팔아 준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대답했습니다.

그게 지옥가는 자들의 사고방식이라고요.


예수님께로부터 죄용서함을 입어 보지 못한 자들은 죄용서함의 은혜를 몰라요.

이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잘되느냐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주님으로 증거 되어지는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몇 일전에 텔레비전을 보는데  카톨릭 신부가 강의하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이슬람과 카톨릭이란 주제를 갖고 강의를 하는데 결론을 이렇게 내렸습니다.


카톨릭은 타종교를 어떻게 인류구원의 동반자요 협력자로 본다고 합니다.

이게 제2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이요 교황의 가르침이라는 것이지요.

즉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언급했습니다.

예수님도 타인을 존중하셨고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타종교든 무엇이든 협력하고 , 대화하고, 인류구원을 위해 힘을 합칠 줄 알아야 한다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이들에게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습니까?

이들에겐 심판의 이유, 멸망의 이유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겐 왕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삽니다. 예수 안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야기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을 보면 그들에겐 멸망의 이유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겐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돌아가지고 부활하신 주님이 없습니다.

왕이 없습니다.

얼마나 불쌍한 인생입니까?


그런데 우린 어떤 인생입니까?

불쌍한 인생입니까?

아니면 복된 인생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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