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서 강해

강해 7

푸른 섬 2010. 7. 30. 09:12

저는 자를 모으시는 여호와

미가4장1-8

본문을 읽게 되면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이 듭니까?

천국이라는 것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죠?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 봅시다.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서게 되는 것이 말일이다.


이때에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 갈 것이다.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를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또한 그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실 것이다.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하실 것이다.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것이다.


이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할 것이다.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 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다.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그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한 자를 모아 그 저는 자로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로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치리하리라


너 양떼의 망대요 딸 시온의 산이여  이전 권능 곧 딸 예루살렘의 나라가 네게로 돌아오리라.


이렇게 오늘 본문을 쭉 읽어 보았는데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많이 썪여있죠?


깔끔하지가 못하고 이것 저것 썪여있어서 말일, 마지막날, 즉 천국이라는 모습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하는데 좀우리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본문들을 쉽고 깔끔하게 정리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심판이라는 것을 쏙 빼버리고 다시는 전쟁이 없는 나라,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가 나무 앉을 것으로 말입니다.


그러면 천국이 우리 인간들이 본래 꿈꾸든 모습과 일치한 모습으로 성경말씀을 끌어 당길수 있습니다.


이방인이든 누구든 모두가 다 하나가 되는 나라.


전쟁과 싸움이 없는 나라. 목가적 삶을 영위하는 나라.

목가적이라고 하면 또 어렵지요.


농촌처럼 소박하고 평화로우며 서정적인 것을 목가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심판을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이라는 것은 의도적으로 빼버립니다.


심판이 들어가면 설명이 복잡해 지잖아요.

특히 사람들을 설득해서 어찌했던 천국에 집어넣어야 하는데 심판이라는 것이 걸림돌이 되잖아요.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이 6,7절을 보게 되면 저는 자, 쫓겨난 자, 환난 받게 한자를 여호와께서 시온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치리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저는 자, 쫓겨난 자, 환난 받은 자들이 그들이 스스로 저는 자가 되었고 쫓겨난 자가 되었고 환난 받은 자가 된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 자들입니다.


그러니 천국에서 살수 있는 자는 여호와께서 절게하신자, 쫓겨나게 하신자, 환난받게 하신 자들만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물론 이방인도 동일합니다.


이방인이든 야곱족속이든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가려면 절었던 경험, 쫓겨났던 경험, 환난받았던 경험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천국을 생각할 때 늘 사는 것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늘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사느냐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천국을 생각할때에도 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모든 관심을 둡니다.


그래서 천국이라는 곳이 어떠한 성격을 가졌는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천국에 들어가서 내가 몇평짜리 아파트에 살 것인가?


어떤 차를 몰고 다닐 것인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천국갔다 왔다고 하면서 개털모자 쓴자와 황금면류관 쓴자를 보았다고 구라치는 자들이 있죠.


그런데 놀라운 것이 이런 구라가 소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에게 잘 먹혀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그야 당연하죠.


예수님을 믿으면서 늘 이 땅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가 무엇을 마실까만 염려하는 인생이 다른 무슨 생각을 할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천국을 생각해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주인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천국의 특성을 살펴봅시다.

천국이라는 곳은 반드시 심판의 경험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물론 전쟁이 없는 곳은 분명합니다.


5절을 봅시다.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영원히 행하리라”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미 심판이 끝났는데 무슨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행한다는말이 나옵니까?


만일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영원히 행하리라라는 말씀만 있다면 우리가 충분히 이해가 되죠.


그런데 왜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행한다는 말씀을 집어 넣을까요?

그래서 오직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영원히 행하는 것의 의미가 제대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옥가야 하는 자들의 당위성이 늘 밝혀지는 곳이 천국입니다.


뿐만 아니라 천국온  자들은 절었던 경험, 쫓겨났던 경험, 환난 받았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절었고 왜 쫓겨났고 왜 환난 받았습니까?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심판 받았던 경험이 있는 자들이 천국백성입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천국이라는 곳은 죄 없는 자들이 가는 곳이라고 말입니다.

천국은 지옥과는 완전 상관없는 곳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말일, 즉 주님의 날에 대한 말씀에 의하면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천국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천국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미가 선지자가 예언했던 말씀과 같은지 다른지 말입니다.


마태복음 13장47-50절을 봅시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세상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니라”


이 말씀을 보게 되면 반드시 심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갈라내는 작업을 했는데 풀무불에 던져진 자들이 하는 일이 있습니다.

울며 이를 간다는 것이지요.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이를 간다는 것은 이를 가는이유가 있기 마련아닙니까?


천국을 생각하기 때문에 이를 가는 것이지요.

내가 왜 풀무불에 던져졌지. 난 당연히 천국갈수 있는 자였는데.


천국을 생각하지 않으면 이를 갈 이유가 없잖아요.


뭔가 풀무불과 다른 것이 있기에 이를 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하죠.

누가 그럼 풀무불에 던져지며 누가 천국간다는 말입니까?


마태복음20장28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혜택을 입은 자들 만이 천국갑니다.


이 혜택을 입은 자들만이 풀무불에 던져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을 보면 한결같이 섬기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섬김 받을 까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십자가에 돌아가심을 말씀하심에도 불고하고 제자들은 한자리 차지하기에만 관심있습니다.


가룟유다나 베드로나 요한이나 다를바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관심이 한자리 차지하기에 관심 있습니다.


우리와 다르지 않죠.

우린 기회가 오지 않아 안달아닙니까?


기회만 온다면 한자리 차지하고 싶어하잖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가룟유다는 풀무불에 나머지 다른 제자는 천국백성으로 인정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때문입니까?

욕심이 많아서, 아니면 욕심이 없어서.


아닙니다. 

대속물 때문이죠.


대속물되신 예수님으로 인해 가룟 유다는 풀무불에, 다른 제자들은 천국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미리 예언하고 그 예언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심판을 경험한 자들이 여호와의 치리를 받게된다는 말씀말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보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성도란 이미 심판 받은 자입니다.

심판의 경험이 있는 자입니다.


심판의 경험이 없는 자는 천국에서 살수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사는 성도란 늘상 십자가지신 주님되신 예수님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과 대조를 이룹니까?

풀무불에 들어간 자들과 대조를 이룹니다.


풀무불에 들어간 자들은 억울하겠죠.

천국에 있는 자와 비교할 때 별반 차이가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이를 갈겠습니까?

얼마나 울겠습니까?


그런데 누구로 인해 갈렸습니까?

십자가지신 예수님입니다.


그렇습니다.

미가 선지자가 말일에 대해 예언하면서 심판과 구원을 동시에 언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왜 심판이라는 것이 있는가?

왜 구원이라는 것이 있는가?

심판 자체, 구원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여호와에 의해서 절었던 경험있는자, 쫓겨났던 경험이 있던자, 환난 받았던 경험이 있던 자를 여호와의 백성으로 만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누구만 자랑하겠습니까? 그 삶 전체가 주님되신 예수님만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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