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서 강해

강해 9

푸른 섬 2010. 7. 30. 09:13

베들레헴 에브라다

미가5장1-15

믿음이라는 것은 육에 속한 자들이 보기에 얼마든지 무시해도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1절을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은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붙잡아 둘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처럼 확실한 것을 좋아하는 자들은 손에 잡히지 않고 붙들어 둘 수 없는 것은 어

떻게 생각합니까?


헛것이라 생각하죠.

쓸데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혀 쓸모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선진들은 이로써 증거를 얻었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다는 것이지요.


그 예로 3절에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고 합니다.


사람들은 나타나야만 믿습니다.

그런데 믿음이라는 것이 먼저고 그 다음에 나타난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성경 말씀은 처음부터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벽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도무지 받아 들여질 수 없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11장24-26절을 봅시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


이것이 믿음의 예중에 하나입니다.


우리 여자 아이들을 보면 공주되는게 꿈이잖습니까?

그래서 공주라고 부르고, 아들은 왕자라고 부르지요.


공주라 부르고 왕자라 부르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습니까?

그런데 모세라는 분은  바로의 공주의 아들, 즉 가장 강력한 힘을 소유한 왕의 아들, 왕자으로 불리우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입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사는 것은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죄악의 낙을 누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이 잠시라는 것이지요.


왜 잠시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우리들 생각에는 왕의 자리가 영원할 것 같고 왕자의 자리가 영원할 것 같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돈을 껴 안고 살고 자식을 껴 안고 살고 부모를 껴 안고 살고, 자리를 껴 안고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껴 안고 사는 삶은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뿐이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백성과 고난 받기를 더 좋아한 사람이 믿음의 사람 모세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참 희한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 믿음이 있다면 왕자도 되고 왕도 되고 해야 할텐데 오히려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는 일을 하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목사들이 입만 열면 축복 축복을 외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축복 축복이 뭡니까?


자식 잘되고, 병 낫고 , 사업 잘되고, 부자 되는 것 아닙니까?


믿음을 강조하면서 결국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을 믿음의 증거로 꺼집어 내겠다는 것이지요.


놀라운 사실은 모세가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은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이라고 하십니다.

26저러 보세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목사들이 그렇게 외치던 보화, 보물, 금, 은, 목숨이 무엇과 대조를 이룹ㄴ까?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과 대조를 이룹니다.


오히려 모든 보화는 애굽의 상징으로 작용하죠.


그런데 애굽의 상징인 보화를 가득 얻을 것을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그 목사가 점장이와 다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아세라의 목사지요. 풍요와 전쟁의 신인 아세라.


딱 맞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승리케 하시고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라는 외침은 아세라 우상의 목사로써 제대로 된 외침입니다.


여러분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고 싶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똑똑한 분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고 싶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을 용납지 않습니다.

반드시 하나를 버려야만 하도록 만드십니다.


둘 다를 취하는 일은 곧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겠다는 것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그러니 세상이 권세, 축복도 받고 예수님도 잘 믿겠다는 것은 곧 나는  재물을 섬기겠소라는 말입니다.

나는 권세를 믿겠소라는 말입니다.


이제 오른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2절을 봅시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 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여기에서 작은 것과 다스리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작다라는 말을 들으면 무슨생각이 듭니까?


여기 본문에서의 작다라는 의미는 사람들이 무시할 만하다. 별 소용없다는 의미로써 작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왕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에 이 왕이 어느정도의 힘을 가졌는가?
그가 창대하여 땅끝까지 미칠 것을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죠. 모든 원수를 진멸하신답니다.


견고한 성도 제거하고 말도 제거하고 병거도 제거합니다. 복술자, 정잠이도 제거합니다. 아세라도 제거합니다.


엄청난 능력을 가진 분이시죠.


그런데 그분이 어디에서 난다는 말입니까?

작은 고을에서 태어나신다는 말입니다.


왜 이렇게 작은 이라는 말을 집어 넣었을까요?

그것은 왕의 사역이 육의 사람들이 보기에 어떻게 보인다는 말입니까?


무시할 만한 사역으로 보일 뿐입니다.


별 영향력이 없는 사역처럼 보인다는 말씀을 미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9장에 보면 예수님과 빌라도의 대화가 나옵니다.

10절을 보세요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11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였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서로 대화가 됩니까?

대화가 되지 않죠?


빌라도의 말이 맞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맞습니까?

당연히 빌라도의 말이 맞죠.


예수님의 말씀은 그냥 허풍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미가5장2절에서 베들레헴 에브라다를 언급하면서 작다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왕되신 예수님이 심판주라는 사실입니다.


역사 속에 왕이 등장했을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작은 분으로 밖에 안보입니다.

즉 그냥 그도 한 사람에게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사람으로 취급당하는 분이 심판주라는 말씀입니다.


미가 선지자의 예언에 의하면 왕이 오시면 말도 없애시고, 병거도 없애시고, 아세라도, 우상과 주상도, 복술자와 점장이도 다 없애신다고 하십니다. 원수를 진멸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미가 선지아의 예언대로  이 땅, 역사 가운데로 들어오셨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처럼 보입니다.


미가 선지자의 예언은 허풍으로 보일 뿐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말을 의지하고, 병거를 의지하고, 아세라 우상을 섬깁니다. 다산, 풍요의 여신을, 전쟁에서 승리케 해주는 여신을 섬깁니다.

우상도 만들고 주상도 만듭니다.

복술자, 점장이들이 가득합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정신병자라고 합니다.

미가 선지자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작은 고을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물론 마태복음2장6절을 보면 유대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라고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작지 않다는 말은 누구의 입장입니까?


믿음의 사람의 입장입니다.

그러나 믿음없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빌라도의 말이 맞죠.


모든 권세는 빌라도가 가졌습니다.


그러나 모든 권세는 주님되신 예수님이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빌라도 같은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아세라를 섬지는 자들, 우상과 주상을 만들어 섬기는 자들, 복술자들, 점장이들이 가득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라야만 누구 드러날 수 있습니까?

바로 성도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들이 드러나죠.


성도는 이 땅에서 여전히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니까 그냥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는 속의 상황입니다.

배경입니다. 그 배경이 어떻다는 말입니까?


말, 병거, 아세라, 복술자, 점장이들이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일어납니까?


싸움이 일어나죠.

고난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모세가 살았던 믿음의 삶.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삶을 살면서 주님과 함께 고난당하는 것을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삶을 사는 자가 성도입니다.


이런 삶을 살게 하시는 분은 왕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미가선지자의 예언을 이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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