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서 강해

강해10

푸른 섬 2010. 7. 30. 09:14

하나님과 동행

미가6장1-16

이  땅의 인간들은 자기 자신의 수준을 평가할 때 아주 높게 평가합니다.

창세기11장을 보게 되면 인간들의 사고방식, 즉 자신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주는 사건이 나옵니다.


우리 어린아이들은 들어 보지 못했지요?

바벨탑이라고 말입니다.

바벨이라는 뜻은 언어를 혼잡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11장1절부터 살펴 봅시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 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인간들의 언어가 하나이니 서로 의사소통이 잘 되겠죠.

의사소통이 잘 되면 인간들이 무슨 짓을 할까요?


서로 협력해서 성과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이름 즉  사람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지요.


그러면 왜 이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창세기9장에 나와 있습니다.

1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1장28절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여 땅에 충만하라 ,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마태복음28장18-20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땅에 생육하고 충만하라, 정복하라고 하신 이유는 잘먹고 자식 잘놓고 잘 살아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이 온 땅에 충만하시기를 축복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노아 홍수 심판을 겪은 후 노아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축복이 싫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온 땅에 퍼지는 것이 싫었습니다.


인간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싫어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온땅에 퍼지는 것이 싫습니다.


힘을 모을 수 있으니 힘을 모아 자신들의 이름을 온 땅에 알리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철저하게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축복으로 번성하라고 하셨는데 인간들은 그 축복을 오히려 자신들을 방해하는 말씀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힘을 합쳐서 자신들의 이름을 내는데 진력을 다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벨사건이 터지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실력을 의지하여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직접 그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담안에 있는 인간들은 근본적으로 여호와의 이름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여호와의 축복에 대해서도 그 축복을 절대로 축복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축복을 저주라 생각합니다.


미가서를 보면서 왜 창세기와 마태복음을 언급하냐고 하신다면 미가서 말씀이 독립적으로 있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 6장 본문을 보면 우리들이 혹하는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제가 대학교 다닐때 선교단체에서 활동할 때 아주 많이 듣든 구절이 나옵니다.

6장 8절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 말씀을 보게 되면 피끓는 젊은 이들을 미치게 하지요.

물론 요즘 돈에 미치고 사랑에 미친 젊은이들에겐 이 말씀이 우습게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는 말씀으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

본문을 한번 봅시다.

6장 1절을 봅시다.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일어나서 산 앞에서 쟁변하여 작은 산으로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산과 견고한 지대들, 이들이 왜 여호와의 쟁변을 들어야 합니까? 이들이 왜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이들이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한 증인입니까?

3절을 보세요.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엇에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거하라”

이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게 하신분이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생각합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게 하셨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바벨탑을 쌓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자신들을 저주하는 말씀으로 들었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4,5절을 보세요

“내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종 노릇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 어 네 앞에 행하게 하였었느니라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의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바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추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추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의 의롭게 행한 것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여러분들이 읽으시기에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립니까?

여호와의 말씀에 의하며 내가 너희들에게 이렇게 호의를 베풀었고 여호와께서 의롭게 행하셨다는 말씀으로 들리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세를 보낸 것도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의 추억도 모두가 다 자신들에게는 기분나쁜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힘들때 모세를 보내어서 속량하여 출애굽을 시켜 주셨고 가장 힘든 시기에도 여호와께서 그들의 힘과 방패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엔 오히려 왜 우리를 그렇게 출애굽을 시켜서 그 고난의 시기를 거쳐 오게 하셨습니까 라는 반항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됩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해석하면 목사님은 왜 그렇게 성경을 거꾸로 삐딱하게 해석하십니까라고 하는 분이 계실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석할 것입니까?

단지 여호와의 말씀, 쟁론이 그렇다. 그러니 너희들 반성하라는 식으로면 해석할 것입니까?

그러니 6-8절처럼 하게 하기 위해서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할까요?


그렇데 되면 문제가 심각해 집니다.

6-8절을 봅시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였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결국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번제물을 드려도 안되고, 천천이 수양과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을 드려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허물, 죄용서를 위해 이방종교와 같이 맏아들을 바치는 정성을 다해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뭐가 됩니까?


여호와께서 명하신 제사자체가 소용없다는 말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율법은 왜 주셨습니까?


처음부터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고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면 또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공의를 행할수 있고 인자를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과 함께 행할수 있다는 주장이 전제가 되어야 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성경을 읽어 보세요.

성경 어디에도 인간이 이러한 삶을 살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는 부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성경을 읽을때 딱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읽으면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보실 때 우리의 상식과 정반대, 즉 십자가에 피흘리신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성경이 제대로 해석이 되어집니다.


9절을 보면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할지니라고 하십니다.

완전한 지혜를 가진자가 있습니까?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 있을까요?


어떤 인간이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하겠습니까?


우리 자신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삶이 팍팍해 지면 하나님께서 왜 내 삶을 이런식으로 살게하십니까 원망 나오지 않습니까?


어느 누가 마땅히 죽어야 하는 자라고 인정합니까?

지렁이도 밟으면 꿂틀거린다는 말이 딱 맞습니다.



주님께서 벌이시는 일에 대해 꿂틀거리지 않을 인간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런 짓을 합니다.

불의한 재물,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 부정한 저울, 부자들의 강포, 거짓말을 합니다.


우상을 섬기고 자기 몸이 하고 싶은대로 합니다.


이게 인간들이 본모습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의 본모습입니다.


이것이 수많은 체험을 ,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의 본모습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께 함께 행하는 것이 우리가 행할 일이다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무엇을 모릅니까?


자기 자신을 모르지요.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모릅니다.


마태복음23장23절을 봅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중한 바 의 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 말씀이 미가서 6장 8절이 딱 겹칩니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이 이 본문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십일조다 하고 의와 인과 신도 행하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을것 같으면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흘려 돌아가셔야 합니까?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점잔하게 가리치시고 너희들 물질적 십일조만 하지말고 정신적으로도 제데로 하나님을 섬겨라고 가르치시면 되잖아요.


오늘날 얼마나 많은 목사들이 제대로 가르치려고 애를 씁니까?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 , 제대 배우지 못해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미가서를 보든 마태복음을 보든 어디를 보든 본문을 보고 제대로 이해하여 제대로 가르쳐서 제대로된 예수님을 믿는 자를 만들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바벨탑 만드는 짓일줄 꿈에도 생각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피흘려 돌아가셨는지를 말씀을 통해 전파해야 하는데 예수님의 피흘리심을 성경본문을 보면서 다 피해가버립니다.


우리가 공의를 행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함께 행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아니면 아무리 사소한 수입이라도 십일조를 꼭 하시고 의와 인과 신을 함께 가지시면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라고 가르치는 것이지요.


이런 짓은 예수님의 피흘리심을 무효로 만드는 짓입니다.

피흘리신 예수님의 이름을 온 땅에 전해야 하는 인생들이 오히려 자기 이름을 온 땅에 내려고 발악하는 행동입니다.


오늘날 목사들 중 건전하다고 하는 목사들의 대다수가 이 수준입니다.

물론 다른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는.


우리 이름을 내고 온 땅에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은 악세사리 취급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돌아가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입니다.


늘 죄인으로 드러나며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신 예수님이 더 좋아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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