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서 강해

강해 11

푸른 섬 2010. 7. 30. 09:15

원수 만들기

미가7장1-6

1절을 좀 쉽게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아, 답답하구나. 여름 과일을 따러 나섰다가, 포도 송이를 주우러 나갔다가, 먹을 만한 포도 송이 하나 얻지 못하고, 먹고 싶던 맏물 무화과 하나 만나지 못하듯”

2절로 가면 선인이 세상에서 끊쳤고 정직자가 인간에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3절은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도다 그 군장과 재판자는 뇌물을 구하며 대인은 마음의 악한 사욕을 말하며 서로 연락을 취하니

4절은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5절에서는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6절은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로다.


단지 이 말씀이 유다나라에만 국한 된 말씀일까요?

사람들은 오늘 같은 본문을 대하게 되면 이런 나쁜 인간들이 있던 시대는 극히 제한 적이라 생각합니다.


어느 누가 오늘 같은 본문을 보면서 이것이 나의 모습이요,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라고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인가요?


우리의 아이들이 이런 모습인가요?


사람들은 사람들의 본 모습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조차도 우리의 본질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라 생각지 않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자신의 본질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라고 인정하는 자라면 방금 제가 한 단정적인 말에 당연히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신 분을 이용해 먹으려고 합니다.


이용해 먹는다는 말은 자신이 그래도 괜찮은 사람, 인정 받을 만한 사람, 지옥가지 않아도 될만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이야, 정말 유다는 멸망받아 마땅하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연히 인간은 멸망받아 마땅하다. 나도 그러하다라고 생각해야 될 터인데, 나는 쏙 빠져버립니다.


선인이 세상에서 끊쳤다는 말은 말도 안되는 말이라는 것이지요.

미가 선지자가 단지 자신의 시대에 유다땅에 국한해서 하는 말이다는 것입니다.


정직자가 인간에 없도다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선인이나 정직자가 없다는 것은 지구상 모든 인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로마서3장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23절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리라고 하십니다.

 

5장12절에서는 분명합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으르렀느니라”


이렇게 말해도 사람들은 미가선지자 말씀은 미가 선지자 말씀이고 로마서는 로마서로 취급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언제나 쏙 빼버립니다.


어디에서 말입니까?

죄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로마서4장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여기시나니”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다.

모두 죄인인데 누가 의인인가 했을때에는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는 이를 믿는 자가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에 여기에서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씀의 뜻은 7,8절에 나옵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주도권을 다 주님께서 쥐고 계시죠.

믿는다는 믿음의 행위를 갖고 의롭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인간세상을 평가하시는 주님의 평가가 지금 미가 선지가를 통해서 평가하시는 그 평가와 일치합니다.

요한복음 1장5절에 의하면 참 빛은 예수님 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나머지는 다 어두움이라는 것입니다.

그 어두움은 자기 자신이 주체적으로 빛을 받아 들이고 안 받아 들이고 할 주도권이 없는 어둠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미가서 7장1-6절을 보면서 단지 인간들이 악한 모습을 보일때에만 저런 악한 모습일 뿐이다라고 생각할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늘상 표면만 봅니다.

물론 그 내면을 보려고 애써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말씀에 근거하여 내면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에 근거하여 인간 본질을 보는 인간 없습니다.


물론 성령받은 자만 그렇게 봅니다.


미가 선지자가 그렇게 보듯이.


제가 오늘 본문을 통해 특별히 좀더 살펴보고 싶은 부분은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본문입니다.

6절입니다.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니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35,36절에서 인용하셨습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미가서에서의 말씀을 보면 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사람이 됩니까?


선한자가 없기 때문이죠.

믿을 놈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선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악한 자들이고, 모두가 다 악을 부지런이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안 식구 조차도 원수가 됩니다.


그러면 왜 집안식구가 원수가 됩니까?

무슨 악을 행하기에 그렇습니까?


악한 사욕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탐심이죠. 오늘날로 표현하면 돈입니다.

돈 때문에 집안식구가 원수라는 말입니다.


이런 일 종종 듣고 봅니다 . 그죠.


돈 때문에 아들 죽이고 아버지 죽이고 이혼하고 난리아닙니까?


그러면 우린 괜찮아서 아들 죽이지 않고 아버지 죽이지 않습니까?


우린 휼륭해서  아버지 안 죽입니까?


여건만 되어 보세요.

환경만 되어 보세요.


아버지고 어머니고 형제고 자매고 없습니다.

탐욕을 위해서는 모두가 다 자신들의 희생제물들이죠.


그러니 우린 이런 사건들을 들으면서 접하면서 우리의 본질을 알아야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런 내용의 말씀을 예수님께서는 영 다르게 사용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10장34절부터 봅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앞서 미가서 말씀에 의하면 왜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까?

탐욕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재앙의 상황이라 간주합니다.

집안식구가 원수가 되는 상황은 저주받은 상황이지요.

이것은 곧 심판만이 남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거꾸로 집안식구를 원수 만드는 일을 하십니다.

집안식구가 원수가 안되는 것이 오히려 저주라는 것입니다.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지요.


적어도 미가 선지자를 통해 집안식구가 원수되는 것이 심판의 근거라고 하셨으면 예수님을 믿으면 이런 원수관계가 성립되면 안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집안식구끼리 원수 만들기에 나서신 것입니다.


참으로 난해한 말씀일 수 밖에 없습니다.

집안식구끼리 원수가 되지 않고 서로 화목하게 살수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미가 선지자가 말하는 재앙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상태가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이루실때에는 오히려 반대로 이루어버리십니다.

집안식구는 반드시 원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무엇 때문에.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집안 식구끼리 원수가 될 때에야 비로소 미가 선지자의 말씀이 제대로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렵죠.


그러니 육에 속한 자들은 미가 7장6절을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제발 집안식구끼리 원수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예수님을 잘믿자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장은 다릅니다.

집안식구끼리 원수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본능은 가족입니다.

무얼해도 가족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가족우선이죠.

좋을 것을 보아도, 먹어도, 입어도.

무얼해도 자기 가족 생각하지 남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무얼해서, 무엇을 먹어도, 입어도, 늘 상 예수님이 우선시 되어 보세요.

가족관계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원수됩니다.

상대는 당연히 우선 순위가 가족이라 생각했는데 다른 상대가 우선순위가 예수님이 되다 보니 상당히 기분이 나빠집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아비나 어미를 사랑합니다.

아들과 딸을 더 사랑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누가 개입됩니까?

예수님이 개입됩니다.


이럴 때 무엇이 발생합니까?

미움이라는 것이 발생하고 십자가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땅에 원수만들기 위해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의 원수를 고의적으로 만들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작업에 우리가 걸려 든 것입니다.

성도가 여기에 걸려 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못 배워 먹었다. 예의가 없다. 어른공경 모른다. 자기 자식 사랑 모른다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이런 소리 듣게 성도를 몰아 붙이십니다.

십자가의 피로 그렇게 하십니다.


성도가 십자가의 피를 말하지 않으면 원수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임을 알지 못합니다.


집안 식구라는 표현을 좀 확대해서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흘리신 이유를 말하는 순간 주님의 원수만들기 작업은 성공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을 늘 이렇게 끌어가십니다.

요즘 좋은 가정만들기에 미친자들이 있죠. 행복한 가정만들기에 미친 목사들.

정말 미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어찌그리 정반대로 해석합니까?

행복한 가정을 꿈꾸게 되고 만들려고 하면 십자가는 제거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주님의 원수만들기에 기꺼이 함께 참예되는 복받은 성도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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