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서 강해

강해13

푸른 섬 2010. 7. 30. 09:16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미가7장11-20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관심과 성경의 관심이 너무 다릅니다.

성도의 관심과 성도 아닌 자의 관심이 너무 다릅니다.


그저께 우연히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20년 이상을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장사를 했답니다.


그러니 늘상 잠은 여관같은 곳에서 잠을 자고 밥은 당연히 식당에서 먹었답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에겐 작은 소망이 있었답니다.

아이 손잡고 아내랑 시장도 가고 함께 놀고 싶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지금은, 이렇게 사람 만나고 좀 여유롭게 사는 것이 바람이랍니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바라는 소망이 달라집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건강을, 자식이 아프면 자식이 건강하기를.


자식이 공부 못하면 공부 잘하는 것을.


남편이 말 안들으면 말 잘 듣는 남편이 되기를.


아마 사람이 백명이면 사람들의 소망은 수천 수만가지가 될 것입니다.

아니 늘상 환경이 변하기 때문에 정말 무한대가 될 것입니다.


환경에 따라 바라는 것이 수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 나옵니다.


왜 이런 것이 자꾸 튀어나옵니까?

환경에 따라서 바라는 것들이 왜 자꾸 내 속에서 튀어 나옵니까?


그것은 나라는 자신의 유동성을 고정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정착이라는 것이지요.


나그네 삶은 싫다는 말입니다.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지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같은 인생은 내가 바라는 인생이 아닙니다.

내가 바라는 인생은 늘 형통하고 고통없고 고난없고 재앙이 없는 인생입니다.

소득은 나의 바램보다 늘상 더 많은 인생이길 바랍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후 하나님의 저주를 받습니다.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세기4장1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런 인생을 사는 것이 죄인된 자로 당연한 인생이죠.

그런데 죄인이 순순히 이 상황을 받아 들입니까?

안 받아 들입니다.


그래서 가인이 에덴 동편 놋땅에 거합니다.

유리하지 않습니다. 정착합니다.


성을 쌓습니다.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따 에녹성이라고 이름까지 붙입니다.


유리하는 인생, 저주받은 인생을 보여줄 마음이 없습니다.

아벨을 죽인 장본인입니다라고 인정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죽음으로 인생이 죽어야 하는 인생임을 보여주는 아벨계열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삽니다.


성도란 죽음을 보여주는 삶을 사는 자입니다.


아이고 목사님 모두가 다 살려고 발부둥 치고 목사님도 살려고 발부둥치지않습니까?

세상에 죽음을 보여주는 삶을 사는자가 어디있습니까?


성경에 가득합니다.

창세기5장만 보아도 아벨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죄로 인해 인간은 마땅히 죽어야 함을 증거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7-12절을 봅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겼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사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골로새서 3장3절에 보면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든지 아니믿든지 늘상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죽음의 흔적입니까 아니면 살아 있다는 흔적입니까?


가인이 왜 성을 쌓습니까? 그것도 자신의 아들 에녹의 이름을 붙여가면서 말입니다.

자기 이름 내세우기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어떻습니까?

성도는 예수의 생명이 자신의 몸에 나타나는 것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죽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안개같은 인생임을 담대히 전하는 자입니다.

단지 안개같은 인생인데 오직 예수님의 생명을 전하는 자로 안개같은 인생을 사는 자입니다.


조금 전에 고린도 후서 4장7-12절을 보았습니다.

성도에겐 자기 인생이 없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자기 인생은 늘상 죽음에 넘기우는 인생.


그래 난 죽어야 마땅한 인생임을 보여주는 인생이 성도의 인생입니다.

그래야만 누가 증거됩니까?


생명되신 예수님이 증거됩니다.


고린도후서4장18절을 봅시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예수님을 위해 죽음에 넘기울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가인의 경우 그에겐 보이는 것을 붙드는 자입니다.

영에 속한 성도는 보이지 않는 것을 붙드는 자입니다.


그러니 성경 어디에도 눈에 보이는 것을 붙드는 성도는 없습니다.

오히려 성도가 눈에 보이는 것을 붙들려고 할때 주님은 그 보이는 것을 다 제거해 버리십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보이지 않는 영원한 도성을 소망하게 만드십니다.


오늘 본문 미가서로 들어가 봅시다.

언약대로 성실과 인애로 하실것 같았으면 왜 굳이 유다를, 이스라엘을 죄가운데 두시고 멸망시키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느냐 말입니다.


물론 이 속에는 다른 열방도 다 들어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죄라는 것은 빼버리고 , 죄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그냥 은혜로 구원하시면 안됩니까?

왜 반드시 자기의 죄를 부끄러워하게 만들어서 구원하시느냐 말입니다.


왜 너들너들한 인간의 삶들이 , 허물과 죄악들이 가득한 인간들의 삶이 드러나야 합니까?


그냥 천국에 집어넣어주면 안됩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 설교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안듭니까?

그러실것 같으면 그냥 구원해주면 안됩니까?


어차피 주님홀로 다하시는데 왜 그곳에 우리 인간에 들어가서 죄라는 것이 드러나야 합니까?

이런 반박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머리 좋은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래 맞아 . 어차피 주님홀로 다하시니 나는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나는 죄인이니 그냥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이지요.


성경 말씀을 백날 들어도 그말이 그말이니 뭐 들을 이유가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답을 다 아는데.


나는 죄인이고 주님의 용서로 구원받았음을 다 아는데 성경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요.

성경읽을 이유도 없습니다.


설교 들을 이유도 없죠.


이렇게 되면 주님의 증인이 될수 없습니다.

주님의 증인이 될려면 죽음에 넘기우는 인생, 죄가 드러나는 인생이 되어야 됩니다.


미가서 7장18절을 봅시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릉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이 말씀속에 무엇이 담겨있습니까?

죄를 지었다 , 죄 용서 했다가 담겨있습니까?


물론 맞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는 용서받은 자의 삶이 담겨있습니다.


사람들은 오해를 합니다.

예수님믿으면 되지 뭐.


도대체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의 삶속에 믿음의 흔적이 담겨있습니다.


바로 용서받은 증거물들이 수도없이 줄줄줄 흘러 나온다는 말입니다.


죄용서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나 사도바울의 삶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미가서를 읽어 보면 우린 나쁜 놈들을 보는 것 같았죠?

그러다가 고린도 후서 4장을 보면 아주 휼륭한 성도를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한쪽은 죄만 보여주고, 한쪽은 예수님만 전하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모습아닙니까?


그렇다면 구약 이스라엘과 사도바울이 다릅니까?


자꾸 헷갈리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우린 자꾸 어디에 관심이 있는고 하면 선악에 관심이 있습니다.


구약이스라엘은 나쁘고 바울은 좋고.

그런데 사도바울이나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나 모두가 다 무엇을 전하는 자입니까?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전하는 자입니다.


사도바울속에는 미가서 7장이 들어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피공로가 사도바울을 휘감고 있습니다.


그가 천막장사를 왜 했겠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맞습니다.

먹고살기 위해서 맞습니다.


우리의 죄는 죄대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 죄를 덮어서 주님은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성도 입에서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리까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미가서7장16절을 봅시다.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핧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인하여 두려워 하리이다”


성도의 삶이 이러 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안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사실을 알까요 모를까요?

모릅니다.


하루하루를 살면서 성경을 들추어 보면 주로 인하여 두려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덮어버리고 기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두려움이고 자시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육에 속한 자 처럼 살 뿐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를 염려하면서 말입니다.

자신이 누구를 전하는 자로 사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자신은 가인의 계열임을 전할 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십자가 피를 인정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삶을 들여도 보면 믿음의 삶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피공로로 사는 삶이 아닙니다.


자신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로 사는 인생이 아닙니다.


유리하는 자가 아닙니다.


믿음은 그 사람의 삶속에서 보여집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 같은 분이 어디 있습니까라는 고백이  우리의 삶 속에서 늘 흘러 나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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