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서 강해

강해 12

푸른 섬 2010. 7. 30. 09:16

인생의 의미를 찾는 인생

미가7장7-10

어떤 글을 읽어보았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예정된 죽음이었다. 많은 참관인들이 보인다.

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지구와 하늘 너머에서 무엇을 보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곳에 가는 것이 두렵지 않다. 그곳에서 모든 것이 명확해 질 것이다. 안개가 걷히듯 그곳에 도리스가 있을 것이다.

그녀에게서 설명을 듣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수많은 우발적인 가능성들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생의 전개,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한 순간에 수많은 가능성들이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무의미의 상태에서 얼마든지 많은 의미도 받을 자세로 존재한다.


 그것이 본래 무의미하다는 의미에서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의미로든 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인생은 의미로 가득하다.


 인간의 생은 카오스 적이다. 그러나 카오스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카오스는 코스모스의 이전의 상태이다. 코스모스는 질서가 지워진 상태이다. 배열이 이루어진 상태이다. 규칙성이 지배하기 시작한 상태이다.


그러면 카오스는 질서 이전의 상태이다. 그것은 다른 방식의 규칙이 적용될 수도 있는 상태이다.

우리의 삶에 부여된 질서는 그것으로 인간의 모든 측면을 통합하고 포섭하지 못한다. 우리의 삶은 아직 많은 질서 지워지지 않은 영역에 남아있다. 그것이 카오스 이론의 핵심이 아닐까”


죽음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한번은 겪어야 하는 현실이다.

죽음이 마지막 종착지라면 삶의 모든 우발적 사건들은 결국 죽음이라는 목표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이 질서지워진 상태가 아니지만 인생퍼즐의 마지막 조각은 죽음으로 맞추어진다.

이것이 카오스 이론의 핵심일까? 그래서 죽음너머에 뭔가 희망을 거는 것일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죽음에 의미를 두는가?

그래서 자살을 하는가?


인생은 예측대로 살수가 없다. 여기 저기서 사건이 툭툭 튀어 나온다. 두더지 게임처럼.

그러나 결국 두더지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시간이 다 되었다.


죽음이 인생마지막을 장식한다.


그래서 카오스에 질서를 끼어 넣기 위해 확실한 죽음조차 희망으로, 의미로 바꾸어 버린다.


이것이 다가 아니다.


인생이 아무리 우발적 사건속에 살지만 인생은 결코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다. 죽음으로 허망하게 끝나버려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의미를 의미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예술이라고 한다.


또 다른 어떤 사람은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찾으려는 모습으로서 의미를.


살아 있다는 자체가 의미 있다.


인간들은 죽음이라는 것이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죽음, 즉 허무함, 의미 없음, 없어짐, 사라짐의 반대로서 인생을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죽음 조차도 하나의 통과의례로 볼 뿐이지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생각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하는 생각입니다.

죽음이후에 뭔가 있다는 것도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사람들은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과연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죽음이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다른 퍼즐이 있을까요?


물론 다른 퍼즐조각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지막 퍼즐 조각이 있습니다.


첫째 아담때부터 주님이 다시오셔서 영원히 다스리실 때까지 마지막 퍼즐조각이 있습니다.


성도는 늘상 정답을 갖고 사는 자입니다.


그래서 의미있니 의미 없니, 죽음이 해결책이니 아니니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한번 봅시다.

7-10절입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 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찌어다 나는 엎드러질찌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데 앉을찌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 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 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같이 밟으리니 그것을 내가 목도하리로다”


죄 때문에 심판받는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노, 심판을 당하지만 다시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이지요.


이런 것을 누가 보는고 하면 대적이 이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내용이 이해가 됩니까?

범죄한자가 철저하게 심판을 받는데 심판을 받고 다시 심판받은 그를 인도하여 광명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대적을 부끄럽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대적이 거리의 진흙처럼 밟힐 것을 심판받은 자가 눈으로 똑똑히 본다는 것입니다.


뭐 별 어려운 것이 없죠?

늘 듣든 말씀아닙니까?


뭐 특별한 것이 있습니까?


에베소서2장1-10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다시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미가서 7장 7-10절에서는 나라는 주체가 등장합니다.

그 나가 미가선지자 자신도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범죄함으로 심판받는 이스라엘로도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2장으로 오니까 나라는 주체가 사라집니다.

우리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우리라는 주어도 주인역할 못합니다.


상황은 미가서에 나오는 내가 겪은 일과 동일합니다. 그러니 미가서에서는  주님의 하신일을 목격하는 자로 , 마치 제 3자의 입장처럼 표현됩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2장으로 오니까  제 3자의 입장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행하게 하기 위해서랍니다.


긍휼, 하나님의 큰 사랑만을 전하는 자로 성도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의 피를 전하는 자로 말입니다.


대적이나 심판이나 구원이나 모든 것이 오직 한분, 십자가에 피흘리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행하시는 주님의 일입니다.


아브람을 부르시고 약속의 땅에 집어 넣어셔서 이스라엘로 만드시어 궁극적으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마지막 퍼즐 조각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게 처음부터 영원까지의 마지막 퍼즐조각입니다.

그러니 인생이 의미가 없니, 죽음이 어떠니, 삶이 어떠니 저떠니 다 헛소리입니다.


처음부터 인생은 자신의 의미를 찾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예술이 인생의 무의미를 의미로 바꾸어준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도 죄의 흔적일 뿐입니다.


죽음도마찬가지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마지막 퍼즐조작은 죽음이 아니라 주님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신 예수님.


이분이 우리 인생에게 마지막 퍼즐조각입니다.


그러니 죽음 후에 뭔가 다 알겠지.

이런 생각은 성도가 하는 생각이 아닙니다.


죽음후에 다 알겠지라고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왜 사람이 카오스 속에 살아가는지.

왜 우발적인 사건들의 연속속에서 부딪히고 깨지고 하면서 살아가는지.


이미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다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도 알려 주셨습니다.


이스라엘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 우발성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쪽에서는 결코 우발성이라는 것이 없었지요.


철저하게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자들로 그들을 때를  따라 부르시고 사용하시고 내버려 두시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에겐 믿음이 있느냐를 물으십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교육목표가 따분하지 않는 사람으로 키우기 라고 합니다.

참 재미있죠.


성도들도 아마 이런 사람이 되고 싶을 것입니다.

따분하지 않는 사람으로 사는 것.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성도가 따분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성도가 따분함을 느끼지요.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의미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아닙니까?


이스라엘 자체엔 의미 없습니다.

미가 선지자 자체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을 사용하시는 주님되신 예수님만이 참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을 기쁨으로 삼지 못하고 나의 삶의 행적들을 통해 따분함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에베소서2장을 보니 죽고 사는 일이 나로부터 떠난사건입니다.

말씀이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까?


단지 우린 믿어질 뿐 아닙니까?


본문 어디에 우리 자신이 주체가 되어 행하는 일이 있습니까?


그래서 미가서 7장7-10절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체들은 범죄한 주체밖에 없습니다.


대적들이 짓밟히는 것도 주님께서 보게 해 주셔야 볼수 있는 것이지요.


이게 성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제발, 인생의 의미를 찾지 마세요.

십자가 안에 이미 마지막 퍼즐이 처음부터 영원까지 확 밝혀져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는 자는 십자가의 원수가 됩니다. 주님의 원수가 됩니다.


성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의 증인일 뿐입니다.

거지나사로로 살다가 죽어도 말입니다.


거지 나사로에게 무슨 인생이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본을 삼을 사람을 거지 나사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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