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서 강해

강해 2

푸른 섬 2010. 7. 30. 09:08

성전

미가1장2-7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의 본성은 특정 장소를 중요시합니다.

사람들이 특정 장소나 특정 시기를 중요시 하는 이유가 다 범죄한 아담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에덴동산이라는 특정한 지역을 자기 나름대로 만들어내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신과 소통을 하려고 합니다.


신과 함께 노닐던 그 시절이 그리워 자기 나름대로의 에덴동산을 만들어 내어 신과 대화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이 만든 에덴동산에서 신의 지시를 받아 신의 뜻대로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삶이야 뻔하지요. 신의 지시란, 신의 뜻이란 이 땅에서 자신이 하나님처럼 행세하며 사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이 만든 신에게 굽신거리지만 그거야 결국 자신에게 굽신 거리는 것 밖에 안됩니다.


굽신거리는 행위와 그 다음 자신에게 주어진 복을 생각하면 이것인 한세트가 됩니다.

결국 자기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하는 것이지요.


물론 여기에 중매자가 끼어 듭니다.


중매자가 끼어 들어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매자도 돈으로 산 자신의 소유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이런 것들이 특정한 장소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특정한 장소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다급하면 집안도 됩니다.


집안에도 어떤 곳은 또 거룩한 곳이 됩니다.


아무튼 인간은 이렇게 특정 장소를 마련함으로 신과 교감을 가지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5절을 한번봅시다.

“이는 다 야곱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를 인함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뇨 사마리아가 아니뇨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뇨 예루살렘이 아니뇨”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는 산당에 있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에 뭐가 있습니까?

솔로몬 성전이 있지 않습니까?


사마리아에는 뭐가 있습니까?

사마리아 성전이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을 세운 여로보암이 두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열왕기상12장28절에서 33절입니다.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이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님께 숭배 함이더라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팔월 곧 그 달 십 오

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단에 올라 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 저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팔월 십오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여로보암왕이 취한 행동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들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의 대표입니다.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자기가 가진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성전쯤이야 얼마든지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하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합니다.


우리야 성경을 알고 있으니까 송아지가 어디에서 등장하는지 알고 있죠?

모릅니까?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을 때  아론과 그 일땅들이 한 일이 나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성을 모아, 열심을 다해 뭔가를 만들어 냅니다.

1절을 보면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갑자기 눈에 보이는 인도자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자 이들이 무얼 요구합니까?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내어 놓아라는 것이지요.


이게 인간들의 본성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것도 마찬가지아닙니까?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되어지는 산당입니다.


송아지를 만들고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

이렇게 해서 이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백성중 삼천명 가량이 도륙당했습니다.

그 형제를,  그 친구를,  그 이웃을 도륙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로보암왕은 똑같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재미 있는 현상아닙니까?

몰라서 송아지를 만듭니까?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을 알지 못하여서 이렇게 할까요?


다 알아요.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는 하나의 전설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지요.

지어낸 이야기지 않는냐. 대신에 북 이스라엘 사람들을 내 편으로 만들어 내기 위한 방법으로는 그 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듯이 자신이 지배하는 지역에도 성전 만들어 놓으면 백성들의 이탈을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왕은 머리가 더 좋습니다.

산당들을 짓습니다.


곳곳에 하나님께 제사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창구를 만듭니다.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불편함을 제거해 주고 깔끔하게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여로보암왕.


오늘날 교회가 이런 일을 잘 수행하고 있습니다.

예배당을 잘 꾸명서 마치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만듭니다.


물론 노골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죠.

단지 교인들의 정성을 쏟아붓도록합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예배당이 성전이 됩니다.


성전이라는 말이 뭐가 나쁘냐고요.

지금 우리들이 그 성전의 문제점을 보고 있지않습니까?


인간들이 꿈꾸는 성전을 지금 목사라는 자들이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유다나 사마리아나 모두 산당을 만들어 놓았다는 말입니다.


열왕기상16장2절부터 봅시다.

“아하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륙년을 치리하였나 그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치 아니하고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 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자가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왜 이렇게 아들까지 바쳐가며 신을 찾을 까요?

이유야 간단합니다.


별일 없으면 별일 없도록 계속해서 신이 인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또한 무슨 문제가 있으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아들까지 바치는 것이지요.

그리고 산당과 작은 산 위,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것입니다.

급기야 강력한 힘을 소유한 앗수르의 수도 다메섹에 갔다가 그곳에 있는 단을 보고  그대로 단을 만들어 제사를 드립니다.


누구께 제사를 드릴까요?

이방신께? 아닙니다.

14절을 보세요

“또 여호와의 앞 곧 전 앞에 있던 놋단을 옮기되 새 단과 여호와의 전 사이에서 옮겨다가 그 다 북편에 두니라 아하스 왕이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하며 가로되 아침 번제와 저녁 소제와 왕의 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를 다 이 큰 단 위에 불사르고 또 번제물의 피와 다른 제물의 피를 다 위에 뿌리고 오직 놋단은 나의 물을 일에 쓰게 하라 하매”


다메섹에서 보고 만든 단이 원래 성전에 있던 단보다 훨씬 웅장하고 컸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원래의 놋단은 자신이 사사로이 이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이게 죄인의 모습니다.


이게 첫째 아담안에 있는 자들의 본모습입니다.


자신이 살수 있다면, 자신이 번영할수 있다면, 자신이 부자 될 수 있다면 여호와의 말씀이든, 성전이든, 하나님이든, 예수든, 율법이든, 십자가든 무엇이든이 이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어디에서 나오셔서 심판하신다고 합니까?


성전입니다.

여호와께서 성전에서 나오셔서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악을 밝히시고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지금 유다와 사마리아는 무엇을 붙들고 있습니까?

성전입니다.


여호와께서 명하셔서 지은 성전과 자신들 나름대로 가꾸어 만든 성전, 전국토에 성전을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전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성전에서 나오셔서 이 죄상을 밝히시고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진짜 성전에 계신 여호와께서 나타나실 때에 인간들이 만든 성전이 성전이 아님이 밝혀집니다.

진짜 성전에 계신 여호와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상이 본 모습이 드러납니다.


진짜 성전에 계신 여호와께서 나타나실 때에 그들의 죄악이 제대로 밝혀집니다.


참 성전되신 분께서 오셨습니다.

진짜 주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성전고수로 참성전을 죽여버립니다.

참 하나님을 죽여버립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표적을 보이라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도발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절


이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이 성전은 참성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솔로몬 성전이 가짜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전을 지으라고 허락해 주시니 인간들은 그 성전을 곧장 자신들의 탐욕을 이루는데 이용하기 바쁩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


이 탐심에 의해 성전을 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전을 붙들고 사는 너희들은 지금 우상숭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참성전되신 예수님을 탐심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또한 우상숭배입니다.


참으로 이상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지나도, 사람이 바뀌어도 바뀌어도 인간의 본성은 바뀌질 않습니다.

탐심에서 한시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목사들은 탐심이 가득한 맘으로 예배당, 성전, 예수님, 십자가, 여호와, 하나님, 개혁신학 등등을 운운합니다.


여전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람들은 우상숭배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탐욕의 우상숭배로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그러니 예수님께서 오셔서 갈라내는 작업을 하시면 슬피울며 이를 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순전하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구라치고 있습니까?


그러나 십자가 복음 앞에서는 벌써부터 이를 가는 일이 펼쳐집니다.

오히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해 십자가 복음을 핍박합니다.

무슨 명목으로 그렇게 합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합니다.

지금도 참 성전되신 주님은 여전히 미움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붙들고 있는 것으로부터 심판이 흘러 나온다는 사실을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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