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말라기 강해 1

푸른 섬 2011. 3. 29. 20:05

말라기1장1-5

오늘부터 말라기를 보겠습니다.

말라기는 사람이름입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고 합니다.

경고를 왜 합니까?

 

땅에서도 이런 경고를 많이 합니다.

경찰을 통해서 경고를 하기도 합니다.

아니면 깡패를 통해서 경고를 하기도 합니다.

아니면 법적인 것을 통해 경고를 합니다.

경고를 누구에게 합니까?

 

무언가 잘못한 사람에게 경고를 줍니다.

제일 많이 보는 경우가 축구경기에서입니다.

상대선수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하면 경고가 나갑니다.

그리고 더 이상 안된다 싶으면 퇴장을 시켜버리지요.

여호와께서 왜 이스라엘에게 경고를 하셨을까요?

그야 당연합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너희들 악은 이런 것이다 라고

 말씀을 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2,3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누굽니까?

야곱의 이름 아닙니까?

여호와께서 복을 주신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야곱의 자손들 즉,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라고 합니까?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였나이까 라고 합니다.

우린 성경을 잘 알지요.

주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사랑했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이들은 벌써 멸망당했습니다.

아니 이스라엘조차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만드신 것은 주님의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하십니다.

이들은 이미 뱃속에서 이런 결정을 받은 자들입니다.

 

무슨 선한일, 착한 일을 하기 전에 사랑받을

자와 미움 받을 자가 결정되었습니다.

로마서 9장8-13절을 보겠습니다.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경고를 하시는데 이런 말씀을 왜 하십니까?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라고 하면

이미 끝나버린 일이 아닙니까?

주께서 이미 다 결정을 하셔놓고 새삼스럽게

 경고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우린 그런 생각하잖아요.

 

어차피 그렇다면, 주님께서 사랑할 자와 미워할

자를 정하셨다면 굳이 선지자를 보내서 말씀하실

 필요가 있는가 말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필요가 있을까?

 

그냥 사랑하는 자와 미워하는 자를 갈라내면 끝나는 것을...

첫째 아담안에 있는 인간들의 생각은 늘 이런 생각입니다.

그럴 것 같으면 저를 왜 만드셨나요?

지난주 욥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어차피 사랑할자라면 왜 욥을 고난속으로 몰아넣어셔야 합니까?

이런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런 질문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어차피 그럴 것 같으면 십자가 지실 필요가

뭐 있습니까라고 하는 이유가 어디있을까요?

내 편한대로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몸이 요구하는대로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물론 몸이 요구하는대로 세상이 안돌아가니 문제지만.

 

안 그래도 몸이 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데,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사람을

 더 열 받게 하는 것이지요.

 

일본에 지진이 일어나고 그 영향으로 쓰나미가 덮쳐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은 것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슬퍼한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세상은 돈으로 돌아갑니다.

겉모습은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 슬퍼다.

불쌍하다. 참으로 가슴아프다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장의용품을 일본에 공급하는 사업가의 입장은 어떨까요?

말은 못해도 얼마나 기분좋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죽어야 돈을 많이 벌잖아요.

 

제가 너무 심한 이야기 합니까?

만일 사람들이 죽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산다면

 그 공장은 문 닫아야 합니다.

 

먹고 살길이 막막해지지요.

먹고 살길이 막막한데 자신이 죽을지경인데

다른 나라 지진났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가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안들어 옵니다.

 

옆집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어도 눈에 안들어옵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기 밖에 몰라요.

자기 사랑밖에 모릅니다.

 

이런 사람에게 주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지금도 그렇다라고 해 보세요.

 

뭐라고 하겠습니까?

나는 나를 사랑해 주길 기대했는데 사랑할 사람과 미워할 사람이 따로 있다.

그 대상이 내가 될지, 누가 될지 나는 모른다.

참으로 화가 날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스라엘은 입장이 다르지요.

이들은 분명하잖아요.

그들의 역사가 그러했잖아요.

 

그런데 그들 눈에는 그 역사 속에 하늘의

 세계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분명 야곱은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라고 합니까?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반문하죠.

이들이 이렇게 반문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들은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자신들이 꿈꾸는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역사를 보니 이게 어떻게

 여호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증거냐?

 

이것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은 증거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보기에 어떻습니까?

 

주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까 미워하셨습니까?

우리들이 생각하는 사랑도 아마 이스라엘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 주실 만큼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주님께서 사랑하지 않은 역사아닙니까?

무슨 말인지 못알아 듣습니까?

 

사랑했다면 그들이 무슨 짓을 하든 용서해

주시고 좋은 길로 인도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시도 때도 없이 심판을 감행하시고

 나라도 둘로 쪼개 버리시고, 포로로 잡혀가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과연 주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증거일까요?

 

우리가 이스라엘 입장이 한번 되어 봅시다.

 

이런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절대로 못 받아 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원하는 사랑이 따로 있습니다.

 

주께서 하시는 사랑이 따로 있고 내가 규정하는 사랑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라고 반문하잖아요.

주님 지금까지 행해 오신 일을 보세요.

 이것이 과연 우리를 사랑하신 일입니까?

 

지금 우리 꼴을 보세요.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증거입니까?

사업은 망했고, 농사는 망쳤고, 자식은 속썩이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요.

 

지금 증거를 보세요. 이 증거들이 과연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증거입니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어떻게 답변하십니까?

 

에서를 예로 들고 계십니다.

3,4절을 한번 봅시다.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 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에서의 시절에 번영이 없을까요?

3절에 보면 분명 그의 산들이 있고, 그의 산업이 있습니다.

이들의 산업이 크게 성공했습니다.

 

어디에 나옵니까?

지금 세상에 가득하잖아요.

4절에 나오잖아요.

무너뜨림을 당할 산업이 있었다는 말이 아닙니까?

 

주께서 아무리 무너뜨려도 우린 다시 쌓을 것이라고 하잖아요.

이들은 자신들의 산업이 무너뜨려지고 다시

쌓고 다시 무너뜨려지는 것을 주께서 벌이시는 작업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냥 그럴 수도 있지. 세상의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묵시세계를 모릅니다. 하늘 세계를 모릅니다.

주님의 세계를 모릅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세계만 보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쌓고 무너뜨림당하고 쌓고 무너뜨림 당하고..

 

주님께서 자꾸 무너뜨리시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미워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야곱과 에서는 결판났습니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러니 에서가 무슨 짓을 해도 에서는 미움받는자로 끝나버립니다.

심판받는자로 끝납니다.

 

지금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는 질문에 에서는 미워한다.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놀랍지요.

이미 결판난 상황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미래 쪽에서 앞선 미래를 보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말씀은 이미

 하늘에서는 끝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땅에서 너희들이 아무리 발부둥쳐도

 이 원칙에 벗어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의 반문 즉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는 질문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너희는 사랑받기로 결정되었다라는 말입니다.

에서에게 하신 말씀대로 표현해 보면

야곱은 영영한 축복을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요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땅의 일입니다. 역사입니다.

 

내 몸이 부딪치는 현실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살펴 보아도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증거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에게 너를 사랑하는

 증거를 너가 느끼도록 줄께가 아니라 믿음차원으로 넘겨버립니다.

 

에서는 영영한 진노를 받을 백성이요 너희는

영영한 사랑을 받을 백성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5절을 보세요.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밖에서 크시다 하리라”

결국 이스라엘이 에서가 영영한 진노를 받는

백성임을 목격하면서 여호와를 찬양한다는 것이지요.

이것도 미래일 아닙니까? 사람입장에서는 말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로 한번 가볼까요?

히브리서11장1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절을 보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누가 모든 세계가 말씀으로 지어진 것을 보았습니까?

아니지요. 믿음입니다.

7절에 노아이야기가 나옵니다.

홍수를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노아에겐 홍수가 이미 덮쳐서 있습니다.

그러니 방주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린 거꾸로 생각하지요. 홍수가 오면 방주를 만들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노아에겐 여호와의 말씀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보기에 미친 사람처럼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모든 것을 믿음이 주도합니다.

물론 이 믿음은 내가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주신 믿음입니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다는 이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의 현실과 에서의 현실을 비교해 보면 같을까요 다를까요?

달랐다면 이스라엘이 그런 말을 하지 않겠지요.

 

우린 특별한 역사를 가졌어. 그래 주께서 사랑하고

계심을 느껴라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나 에서의 역사나 별 차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것은 오직 하나 , 이스라엘에는 율법이 있었고,

제사가 있었고, 성전이 있었고, 선지자가 있었다는 사실.

여호와의 말씀이 있었다는 사실이 다르지요.

 

그런데 이 율법이, 제사가, 성전이, 선지자가

 자신들에게 유용하지 못하니 그런 말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즉 경제적 가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시대로 넘어오면 완전 역전이 일어납니다.

유대인들은 무엇을 붙들고 있습니까?

율법, 성전을 붙들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요.

그런데 이런 자들이 누구를 죽입니까?

예수님을 죽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희들은 죄인이라는 말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입니다.

 

이렇게 됨으로 어떤 인간도 사랑받을 자가 없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말씀이 취소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9장18절을 봅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로마서11장5절입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이들이 누굴까요?

바로 야곱입니다. 이스라엘입니다.

 

주님께서 왜 이런 식을 일을 벌이십니까?

로마서11장36절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기 위해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철저하게 자기 입장에서 해석하도록 만들어 놓습니다.

그래야만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게 됩니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심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제대로 전하십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사랑도 자기 소유로, 미움도 자기

소유관점에서 해석을 합니다.

 

주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주님을 전하도록 자신이 마음껏 이용당함은 견딜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을 감사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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