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말라기 강해 5

푸른 섬 2011. 4. 24. 18:20

너희의 구하는 바 주님

말라기3장1-6

말라기 1,2장을 근거해 볼 때 제사장들이 주님을 구할까요 구하지 않을까요?

만일 우리들이 말라기에 나오는 제사장처럼 살았다면 주님을 구할까요 구하지 않을까요?

아마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주님을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다.

우린 적어도 주님이 어떤 분 인줄 알고 있지요.

그렇지 않나요?

만일 제사장들처럼 살았다면 주님이 오시면 우릴 심판하실 것 아닙니까?

그러니 주님을 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오시길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을 구합니다. 주님을 사모합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말씀대로 살지도 않으면서 주님을 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들이 말라기 1,2 장을 보면서 그 이유에 대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왜 이들이 주님을 사모하고 구합니까?

자신들은 당당합니다.

어떻게 당당합니까?

1장2절에 보면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반문합니다.

1장6절에는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라고 합니다.

2장14절에는 여호와께서 어떻게 우리들에게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합니다.

2장17절에는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습니까라고 합니다.

이들이 이렇게 목에 힘주어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름대로 할 만큼 다했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어떨 때 큰 소리 칩니까?

자신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할 때 큰 소리 칩니다.

마태복음19장을 봅시다.

여기에 질문자가 나옵니다.

이 사람의 질문은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입니다.

자신이 무슨 선한 일을 하면 영생을 소유할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이것에 대해 예수님께서 뭐라고 답변하십니까?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분은 한분 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지금 무엇을 질문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질문합니다.

선한 일에 대해 질문하려면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영생과 관련된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답변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개인적인 영생의 욕망을 사용하셔서 자신이 어떤 분이심을 알려 주십니다.

선한분은 오직 한분 밖에 없다고 말씀하신 후에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냥 이 말씀을 하셔도 되지만 선한분은 한분밖에 없음을 언급하신 이유를 아시겠지요.

예수님은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습니다. 반드시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전하시고야 마십니다.

그러자 질문한 사람이 어느계명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렇게 묻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있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은 처음부터 자신은 영생 받은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질문을 예수님께 한 것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이 청년이 뭐라고 답변합니까?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다고 합니다.

대단하지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것을 다 지켰습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이 청년이 거짓말할까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배운 율법기준에 의하면 이 사람은 완벽하게 이 율법들을 지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자신 있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더 합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이정도면 영생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있다면 말해 보세요.

없지요?

그것 봐요 없지 않습니까? 라고 자신만만하게 자신은 영생을 얻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선한분 되신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21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여러분 이 사람이 왜 부자가 되었습니까?

율법을 지켜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신명기28장을 보면 율법을 지키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 받고 그야 말로 복이 거꾸로 쏟아집니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부자 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질문을 한 청년은 율법을 지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즉 영생을 얻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 영생은 그 다음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의 의하면 이 청년은 예수님을 선한 분으로 여겼던 모양입니다.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모르지만.

어찌되었던 하나님이 지금 나타나셔서 말씀하신다 하더라도 나는 그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 정도로 높이 보았습니다. 물론 그 예수님을 그 정도로 높이 보는 자신도 높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어떻게 했습니까?

22절입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렇게 당당하든 사람이 근심하며 가버렸습니다.

이해 됩니까?

제가 지금 말라기 3장을 보면서 이 본문을 보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지금 말라기에 나오는 자들이 꼭 이 청년과 똑 같습니다.

주님을 사모합니다. 간절히 구합니다.

그만큼 자신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한 분의 한 말씀에 근심하며 가버렸습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쉬우니라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자신 만만한 자들은 천국갈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고대하고 기다리는 자들은 천국과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자신을 믿을 만하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천국엔 누가 갈수 있을까요?

부자청년이 간 후 베드로가 말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베드로가 말했다는 것은 다른 제자들도 동일한 생각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28-30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않자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너무나 역설적입니다.

구약 율법에 의하면 계명을 지키면 물질적 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물질을 버린 자가 영생을 상속받는다고 하십니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영생을 얻습니까?

이런 생각을 한 자가 바로 부자 청년이지요.

부자청년이 만일 영생을 얻기 위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로 예수님 좇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말에 이렇게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칭찬하시는 것 같지만 30절 말씀에 의하면 베드로를 칭찬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는 말은 영생이란 결코 너희들이 원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특히 베드로 너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더더욱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20장에서 포도원 주인과 품꾼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일당으로 일할 사람을 찾습니다.

오전8시에 사람들을, 9시에 또 다른 사람들을, 10시에도, 오후5시가 되면 일이 끝나는데 오후4시에도 사람들을 품꾼으로 고용해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다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일당 받을 시간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가장 늦게 와 잠시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부터 일당을 주는데 하루온종일 일한 만큼의 일당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먼저 온자들이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린 그 이상을 받겠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똑같은 품삯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따집니다.

집주인을 원망합니다. 나중 온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십니까?

불만이 가득하죠?

왜 그렇습니까?

당당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적어도 오후4시에 온 일꾼들에 비해 일을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 많은 품삯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누구의 생각입니까?

베드로의 생각입니다.

이러한 사고가 누구와 연결됩니까?

부자 청년입니다.

이런 자들이 누구를 기다립니까?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이 빨리 오시기를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엄청나게 많은 품삯을 주리라 기대합니다. 당연히 영생을 얻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인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내 뜻대로 했다고 합니다.

나중 온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여기에도 선하다는 말이 나오지요?

결국 선한분을 악하게 만든 자들이 누굽니까?

자신이 수고, 노동, 희생을 당연히 보상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이 비유결론에 다시 한 번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말씀을 언급하셨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너무 다릅니다.

천국은 당당하게 기다리는 자들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제 설교에 의하면 천국은 당당히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겸손히 기다리는 자가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아니면 자신은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자가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말라기3장을 보면 주님이 오시면 주님 앞에 감히 설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누가 주님 앞에 설수 있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께서 이들의 죄를 깨끗게 하신답니다.

말라기3장6절에 보면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율법에 근거하면 야곱의 자손들은 소멸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언약으로 인하여 야곱의 자손들이 소멸되지 않습니다.

이유는 언약이 죄를 용서하는 기능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심판의 기능도 동시에 품고 있지요.

심판을 경험하고 죄용서함을 받은 자가 구원을 얻습니다.

이들이 소멸되지 아니하는 야곱의 자손들입니다.

죄인인 주제에 당당하게 주님을 기다렸다고 영생이 주어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역설입니다.

도무지 우리들이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만드십니다.

심판하신다고 하셔놓고 구원하시는 것은 또 뭐냐라고 하실 것 아닙니까?

왜 이럴까요?

그 이유는 주님 마음대로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마음대로 영생 줄자의 죄를 담당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주님과 상관없는 자들은 심판을 하시는 것이지요.

이제 다시 마태복음19장20장으로 가 봅시다.

주님과 상관없는 자들이 무엇을 내세웁니까?

죄용서함을 받지 못한 자들이 무엇을 내세웁니까?

자신들의 행함입니다.

자신들의 헌신입니다. 자신들의 행함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아시겠지요?

겸손도 들어갑니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도 들어갑니다.

율법을 지켰습니다. 헌금했습니다. 봉사했습니다. 전도했습니다. 사랑했습니다가 다 들어갑니다.

이런 자들이 누구를 죽입니까?

주님을 죽입니다.

참으로 이상하지요.

주님을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린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속에 모든 인류가 다 들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이런 자들 중에 깨끗한 자를 만드셨습니다.

주님께 기쁨이 되는 자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깨끗게 된 자와 기쁨이 된 자들은 누구만 자랑해야 할까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이 왜 자꾸 십자가의 피를 강조하고 그 은혜를 말합니까?

구원의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성도는 오직 십자가의 피만을 자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유는 자신이 그렇게 주님을 기다리는 자와 동일한 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주시겠습니까라고 요구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침 8시부터 온 종일 땀 흘려 수고 했으니 당연히 받을 것이 많겠지요라며 선한 주인을 악한 주인으로 만드는 자가 자신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십자가 밖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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