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말라기 강해 6

푸른 섬 2011. 5. 8.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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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도다.

말라기3장13-15

여러분들도 이런 생각해 보았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

도대체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이 무엇에 유익합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헛되지 않습니까?

지금 이런 이야기를 누가 하고 있습니까?

 

수많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하고 있습니다.

눈만 뜨면 말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삶인 자들이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말씀대로 살려고 엄청 노력해 본 사람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직업이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살아도 헛되더라는 겁니다.

왜 헛되다고 말할까요?

 

자신들에게 유익되는 것이 하나도 없더라는 말입니다.

이들의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니 이들의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이 아닙니까?

얼마 전에 오죽하면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습니까?

왜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헛되더라는 겁니다.

아니 뭔가 잡히는 게 있어야 헛되지 않을 것 아닙니까?

아무리 율법 지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해도 자신들의 삶의 모습은 형편없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명령을 지키고 금식하는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이 말씀을 모르는 자들이 아닙니다.

신명기31장16-17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

너무나 이상한 말씀이지요.

 

출애굽해서 광야길을 사십 년 동안 헤매어 다녔습니다.

아직 약속하신 약속의 땅에 첫발도 내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초를 쳐버립니다.

너희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이방신들을 음란이 좇을 것이다.

나와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다.

 

그래서 내가 진노하여 너희들을 버릴 것이다.

내 얼굴을 숨길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것이다.

그럴 때 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다.

미리 각본을 다 짜놓으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듣는 사람 기분 어떨까요?

상당히 기분 나쁘겠지요.

예를 들면 아니가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말합니다.

너 학교 들어가면 꼴찌한다. 너 나쁜 친구 만난다. 그리고 너는 퇴학당한다. 그리고 너는 부모인 나를 원망한다. 끝.

이렇게 말하면 듣는 아들, 딸 어떨까요?

 

아버지 지금 제정신입니까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한술 더 떠십니다.

노래를 지어 불러랍니다.

노래가사가 너무 희한하지요.

 

자신들이 여호와의 언약을 배반하고 재앙당할 것을 ,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들 중에 계시지 않다는 노래를 부릅니다.

아마 인간들이 제정신이라면 이런 노래 부를 인간 없습니다.

빡빡 우길 것입니다.

우린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섬길것입니다라고 맹세하고 맹세할 것이겠지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알고 계십니다.

그들이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이 말씀대로 언약을 배반했고 바벨론 포로로 잡혔갔다가 돌아왔습니다.

물론 성전이 재건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형편이 어떻습니까?

좋지 않지요.

 

그러니 이들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하지요.

신명기 말씀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지요.

돌아 와 보아도 여전히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그들이 상상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다르게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상상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잠자리에 눕기 전에 무엇을 상상하고 눕습니까?

아니면 아침에 일어나 무엇을 상상합니까?

 

좀 더 나은 살림살이 아닙니까?

자식 공부 잘하는 것 아닙니까?

사업잘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의 상황을 보세요.

한번 얻어 터졌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회개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성전도 새로 지었습니다.

그런데 형편이 자신들이 상상하는 바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이정도로 우리들이 열심을 내었으면 우리들이 상상하는 바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셔야 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상상하는 바와 전혀 다르게 현실이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나름대로 말씀에 순종하고 지키고 했다 말입니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입니다.

제가 말라기 설교하면서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자주합니다.

 

그들의 형편에 맞추어 최선을 다했으니 이런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할 것 하지 않고 정말 나쁜 짓만 골라서 했다면 이런 소리 못하지요. 양심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들의 반응을 보면 할 만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와 닿습니까?

별로 와 닿지 않습니까?

아마 이런 사람은 열심히 주님을 섬겨보지 않은 사람일 것입니다.

틀림없습니다.

 

적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주님을 섬겼다면 당연히 이런 소리가 나와야 합니다.

이런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은 자기 마음대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을 하면 여러분들이 또 이상한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열심을 내어라는 말입니까?

 

열심을 내어야지요. 그런데 이 열심히 주님의 은혜로 주어진 열심입니다.

자기 자랑하지 않는 열심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의 열심히 어느 순간 자신의 열심으로 둔갑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형편을 봅니다.

 

그래그래, 주님을 섬기는 헛되구나.

이런 소리가 나와야 합니다.

누구에게 말입니까 성도에게 말입니다.

제가 좀 이상한 소리하지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이 말씀이 우리와 상관없는 말씀이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의 십자가는 이 본문을 통해 증거될 수 가 없어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에 관심이 없어요.

살아도 자기를 위해 살고, 죽어도 자기를 위해 죽어요.

 

그러니 주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는 말이 나올 수가 없어요.

주님을 섬겨보아야 이런 말이 나올 것 아닙니까?

주님을 섬겨보아도 나의 상상하는 바와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여기에서 성도 아닌 자와 성도인자가 갈라지겠지요.

이게 성도로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그러니 이 근처에 못간 사람은 말할 필요가 없어요.

지난주 제가 포도원비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태복음20장 말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말씀 속으로 집어넣어서 지옥보낼자들은 지옥 보내시고 천국 보낼 자들은 천국 보내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 아니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가 동일한 상상을 합니다.

동일한 꿈을 꾸지요.

그 꿈은 여호와의 말씀과 상관없는 꿈입니다.

 

오직 자신의 몸과 관련된 꿈입니다.

그 몸의 확장은 자식이요 남편이요 아내입니다. 그리고 가족들이지요.

아니면 자신이 속한 민족 국가.

 

마가복음7장1-23절을 봅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중 몇이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시비 내용이 무엇인고하면 왜 예수님 당신의 제자는 먹을 때 손을 씻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손을 씻지 않고 먹게 되면 몸이 부정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께서 이사야29장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자신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섬겨보려고 노력했는데 그 노력이 결국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자신들도 자신들의 마음을 몰라요.

얼마나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니 자신들이 몰랐던 자신들의 마음을 예수님이 알려 주십니다.

10-13절에 고르반에 대해 나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했는데 하나님께만 드리면 그만이지 아비 어미께 드릴 필요 없다는 사상이지요.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나님만 잘 섬기면 되지 않습니까?

 

부모에게 드릴 것도 하나님께만 드리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이들 나름대로 큰 결심을 한 것 아닙니까?

오직 하나님 중심.

 

그런데 이런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을 페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화가 얼마나 나겠습니까?

 

자신들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심으로 이들의 하나님 섬김은 오히려 하나님 멸시로 드러났습니다.

입술로는 존경하되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자신들도 자신들의 마음을 모른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들의 마음이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밝히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즉 부정하게 한다. 지옥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더럽다는 말입니다. 부정하다는 말입니다. 다 지옥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름대로 자신의 몸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보려고 깨끗하게 해 보려고, 천국가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애쓰는 자체가 부정하다는 말입니다.

 

이유는 이미 죄 중에 잉태되었고 죄 중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사람자체가 부정하다. 지옥가야 마땅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21-23절을 볼까요.

 

"속에서 독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홀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이런 것이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더러우니 더러운 것이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먹는 것 어떻게 한다고 깨끗게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제가 말라기 말씀을 드리면서 왜 이 본문을 말씀드리는지 아시겠습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지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헛되다라고 합니까 하지 않습니까?

헛되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하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말씀을 지키고 있지요.

 

그런데 누가 헛되다고 해 버립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너희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가짜다.

 

너희들의 행하는 말씀지킴은 헛되다.

너희들은 지옥간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반전이 아닙니까?

자신들은 절대로 헛되다고 말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은 희망에 차 있습니까?

말라기시대의 이스라엘 백성과 수준이 달라요.

더 이상 자신들의 형편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말라기 시대 사람처럼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희망에 차 있습니다.

이들에겐 소망이 있지요.

 

그런데 누가 헛되다고 해 버립니까?

예수님께서 헛되다고 해 버리십니다.

참으로 미칠 노릇 아닙니까?

 

앞서서 제가 성도라면 헛되다라는 말이 나와야 된다고 했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헛되지 않다는 말도 나와야 됩니다.

 

참으로 희망에 가득차 있어야 합니다.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오시면 네가 갖고 있는 소망이 헛되다라고 해 버리십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인간은 무엇이든지 소유해 버립니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도 자신의 소유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고, 십자가 십자가 만을 앞장세우지만 결국 자신의 소유로 이것들을 만들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시면 우리의 헛됨을 선언해 버리시지요.

이렇게 헛됨을 고발당한다면 참으로 복된 자가 아닐까요?

물론 이것으로 끝나버리면 곤란합니다 마는.

 

고발당하고 소망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소망임을 믿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인도함을 받는 자가 성도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한쪽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보았지만 삶의 형편을 볼 때 예수님을 믿는 것은 헛되다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다른 한쪽은 자신의 형편과 상관없이 열심히 주님을 섬깁니다. 이 사람은 결코 헛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확신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는 이 둘 다 죄로 고발해 버립니다.

주님은 이미 사람이 상상하는 바를 압니다.

언제나 자기 편한대로 자기 형편에서 자기 몸 위주로

 상상함을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 중심으로 일을 진행시키십니다.

자기 몸과 형편 위주로 상상하는 죄인을 사용하셔서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성도에겐 이런 일들이 그 몸에서 일어납니다.

 

일어나고 헛되다고 하고, 소망 있다고 하면서 와르르 무너지는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높고 깊은지를 알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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