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말라기 강해 8

푸른 섬 2011. 5. 18. 22:16

분별하리라

말라기3장16-18

사람들을 두 종류로 나눈다.

한쪽은 지옥 보내고 한쪽은 천국 보낸다.

여러분 듣기에 어떻습니까?

기분이 좋습니까 나쁩니까?

기분이 나쁠 수도 있고 좋을 수도 있습니까?

그렇다면 천국가고 지옥 가는 것이 나의 행동과 상관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의 행위와 상관없이 천국가고, 나의 행위와 상관없이 지옥 간다면 어떻겠습니까?

행위라고 하면 행위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으시는 분 있으시죠?

행위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 순종했다는 행위를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 순종하고 지켰기 때문에 천국 간다면 이해가 되겠지요.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존중히 생각할 경우 천국갈 수 있다고 하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래 그 정도면 나도 천국갈 가능성이 많지.

내가 노력하면 천국갈수 있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그런 식으로 이해될 본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여호와를 경외하고 여호와를 존중히 여기는 자는 천국 갑니다.

문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호와를 존중하는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여호와를 경외하고 존중하는 자가 없습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로마서3장9-1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가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에 의거하여 오늘 본문말씀을 보게 되면 여호와를 경외하고 존중하는 자가 이 세상에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다.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지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는 너희는 너희의 행위로, 너희의 열심과 노력으로 여호와의 기념책, 즉 생명책에 기록될 인간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되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릅니다.

그럴 것 같으면 왜 사람에게 말씀을 주셨습니까?

왜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까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 있음을 선언하기 위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라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자체가 너희들은 죄인이라는 선언입니다.

이것도 율법이지요. 이 말씀의 기능은 모든 인간들이 죄 아래 있음을 선언하기 위해 주신 말씀입니다.

성경의 어떤 말씀도 이런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렇게 모든 사람들을 죄 아래 가두어 버립니까?

왜 모든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십니까?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십자가지신 에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기위해서입니다.

참 싱겁지요.

이것 하시려고 이렇게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 버립니까?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렇다면 나의 삶은 어쩌란 말입니까?

내 삶은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자신의 행위와 상관없이 지옥 가는 자는 얼마나 억울합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중요하지 타인의 삶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더욱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주님으로 높임을 받는 일엔 관심이 없지요.

나의 욕망을 따라 살기 바쁜데 어디 예수님 생각합니까?

내 속에서 일어나는 탐심들이 가득하고 그 탐심을 따라가기도 바쁜데 예수님 생각할 겨를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붙일 뿐만 아니라 사람을 두부류로 나눕니다.

한쪽은 천국, 다른 쪽은 지옥갈자로 나누어버립니다.

그것도 자신의 행위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사람들은 좋아라 할 것입니다.

어차피 천국지옥을 주님 홀로 결정하시니 난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겠지요.

이런 사람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야 지옥가야 할 자가 반드시 지옥 감을 드러내는 모습이니 말입니다.

창세기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을 나눕니다.

그런데 나누는 방법이 아주 고약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물로 히브리서11장 4절에 나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믿음을 추적해 보니 그 믿음이 아벨의 것이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믿음이더라 말입니다.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벨에게 믿음을 주셔서 그의 제사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죠. 이것도 하나님의 일방적 조치입니다.

이렇게 되니 당연히 이러한 상황을 맞이한 가인 열 받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행위와 상관없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차별할 수 있는가 말입니다.

이것은 차별의 정도가 아니지요.

자신의 열심을 무시해 버리는 하나님을 도저히 그냥 둘 수 없습니다.

가인자신과 아벨을 비교할 때 자신이 부족한 것 없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일 위치였다는 것은 그 당시에 가인이 훨씬 더 잘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돈도 많고 학벌도 좋고 똑똑하고 권력도 있고 등등 이런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자신의 행위와 상관없이, 자신의 열심과 상관없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니 아벨을 죽여 버립니다.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죽여 버린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둘로 나누시는 작업을 하십니다. 한쪽은 지옥 보내고 한쪽은 천국 보내는 작업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그냥 곱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한쪽은 죽게 만들고 한쪽은 죽이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참 잔인하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들은 이런 하나님 싫어합니다.

잔인한 하나님을 싫어하지요.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을 좋아하지요.

우리 인간들의 본이 될 만한 하나님을 좋아하지요.

그래서 인간들은 이런 잔인한 하나님을 제거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 자리엔 윤리와 도덕을 집어넣습니다.

윤리와 도덕이란 무엇입니까?

사람의 노력 아닙니까? 행위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힘쓰고 애쓰면 천국갈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인간의 반발을 만들어 내십니다.

가인이 품었던 그 적의를 모든 인간들이 품을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어 내십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친히 말입니다.

야곱과 에서도 그렇지요.

태중에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그들이 서로 경쟁할 이유 없습니다.

당연히 에서가 장자가 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니 집안 꼴이 어떻게 됩니까?

두 편으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심술쟁이 하나님 아닙니까?

한 가정을 평화롭게 만들어 주셔도 믿을까 말까한데 한 가족을 두 편으로 나누어버립니다.

두 자식이 싸우는 꼴을 부모가 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 참 볼만한 것입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이런 상황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을 나눕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나누시기 전의 인간들은 어떤 상태인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듯이 인간들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습니다.

불순종했습니다.

이들은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이들은 본래 선악을 아는 지식이 없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이들은 무엇이 착하다, 무엇이 옳다, 무엇이 악하다, 무엇이 그릇되다라는 생각자체가 없어야 하는 자들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후 이들에겐 이 선악에 대한 기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숨었습니다.

그리고 가렸습니다.

이런 행동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저주받은 인간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처음 지음 받은 아담과 하와는 무엇이 선하다, 무엇이 악하다, 무엇이 옳다. 무엇이 그릇되었다는 생각자체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그야 말로 은혜 속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그저 받아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곳에 무엇이 옳다 그릇되었다가 있겠습니까?

심지어 이들은 선악과를 따먹는 일이 옳다 그릇되었다도 모릅니다.

창세기3장을 보면

뱀이 여자에서 찾아와서 이렇게 간사하게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에 대해 여자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이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이들이 죽음을 알까요 모를까요?

모릅니다.

그래서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되풀이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더 놀라운 말을 하지요.

5절에 보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말 후 여자가 그 나무를 보자 어떤 마음이 생겼습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그 실과를 따 먹었습니다.

이런 마음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셨지요.

이들 마음에는 선악기준이 없습니다.

자신들의 행동이 무엇이 선하다 악하다라는 기준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는 사단과의 대화자체가 선악기준으로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나요?

사단의 말과 여자의 말에서 이미 선악이 보이지요?

그게 왜 그런고 하면 이미 우린 선악체계속에 들어와 버렸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악하다 무엇이 선하다라는 기준, 즉 하나님과 같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슨 행동을 할 때 이것은 선하고, 이것은 악하다라는 판단을 한다는 것은 이미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고로 여러분들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하나님과 같이 되었는데 죄인이라고 하니 듣기에 거북합니까 기분좋습니까?

어떤 사람이 선한일을 열심히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지요. 그리고 가급적 악한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그들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처럼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죄인이기 때문에 그들은 선한 일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 선악세계로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지키려는 본성이 있음을 아시고 그에 따라 지키라고 말씀을 주셔서 너희들이 모두 죄 아래 있다는 것을 들추어 내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선악기준이 없는 인간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이 다 지옥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런 와중에 주님께서 어떤 사람은 천국에 어떤 사람은 지옥에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되면 천국가는 사람 지옥 가는 사람이 할 말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상식적으론 없지요. 천국 가는 사람은 그냥 감사할 따름이고 지옥갈 사람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지요.

그런데 천국 가는 사람은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마는 지옥갈 사람은 절대로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천국에 그냥 집어 넣으시고 지옥에 그냥 집어넣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가인과 아벨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인간들이 할 수 있는 행위가 제사였습니다.

가인과 아벨 둘 다 하나님을 알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 둘 모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것은 받으시고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죄인인 인간은 은혜가 무엇인지 몰라요. 또한 저주가 무엇인지도 몰라요.

그래서 현장학습을 시켜주는 것입니다.

그 예로 가인과 아벨사건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벨이 은혜를 받았지요. 그런데 나타나는 현상은 어떻습니까?

가인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저주가 무엇인지 볼까요?

아벨을 죽입니다. 힘 있는 자리에 앉습니다. 지배하는 자리에 앉습니다. 이게 저주입니다.

이해됩니까?

둘 다 이해되지 않지요.

이것 이해되어야 성도인데 말입니다.

왜 사람들은 이러한 은혜와 이러한 저주를 못 받아들일까요?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는 것은 나쁘다. 사는 것이 좋다. 적게 가지는 것은 좋지 않다. 많이 가지는 것이 좋다.

권력을 갖고 싶다. 이런 마음자체가 이미 자신이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간들을 둘로 나누시는 방식은 한가지 밖에 없지요.

은혜라는 것을 주시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왜 둘로 나눕니까?

이미 앞서 말씀드렸지요.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온 천하에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사항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만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즘은 돈 많은가 자랑하려도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마는 이동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밥하게 하려고 자동차 만든 것 아니지요.

사람을 만드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시기 위해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그냥 대충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개입시키셔서,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을 주셔서 성령 받지 못한 자들을 열 받게 만드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성령 받지 못한 자들이 성령 받은 자들을 죽이는 방식으로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받은 자들이 어떠하기에 성령 받지 못한 자들이 미워하고 죽이려고 할까요?

간단합니다.

우린 모두 죄인하고 오직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만왕의 왕이시더라는 것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사람을 그렇게 기분 나쁘게 한다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해도 죄라고 규정해 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착한 일을 해도, 율법을 지켜도, 봉사를 해도 다 죄라고 규정해 버립니다.

사람은 부정되고 오직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만 주님이심을 전하기 때문에 싫은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이유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은혜의 개입입니다.

왜 나의 행위를 무시하느냐 말입니다.

오늘날도 똑 같습니다. 십자가의 피만을 전하니 사람들은 싫습니다.

나의 삶도 좀 인정해 주시오. 나의 수고도 좀 인정해 주시오. 라고 덤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벨이 자신의 죽음으로 십자가지신 예수님을 전했듯이 오늘날도 주님의 백성은 이렇게 미움 받으면서 십자가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게 됩니다.

주님은 꼭 이렇게 반드시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누어서 일을 하십니다.

십자가를 사용해 인간들을 아주 기분 나쁘게 만드시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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