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말라기 강해 9

푸른 섬 2011. 5. 22. 18:24

극렬히 타는 풀무불과 치료하는 광선

말라기4장1-6

모든 주도권을 사람이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사람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 질수 있다고 합니다.

더 근본적으로 따져 보면 성경말씀을 누가 기록했습니까?

사람이 기록했잖아요.

성경말씀자체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기록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성령을 받은 대상이 누구입니까?

사람이지요. 역시 사람이 기록한 성경일 뿐입니다.

그러니 성경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경해석도 얼마든지 사람의 지혜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해석을 할 때 그 중심에는 항상 누가 서 있을까요?

사람이 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조차도 사람 중심으로, 사람을 위한 사랑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 최고라고 합니다.

4장1절에 보면 보라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이 이를 것이라고 합니다.

누가 말씀하십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날에는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심판의 날이 임하는데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를 불로 살라버린답니다.

완전히 다 살라 버린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얼마나 잔인하십니까?

사실 우리가 알듯이 교만한 자, 악을 행하는 자를 다 사른다고 하신다면 여기에 해당사항 없는 사람 있을까요?

모든 사람이 교만한 자요 악을 행하는 자라고 누가 선언합니까?

하나님께서 선언해 버리십니다.

인간들이 인정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상관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인간들은 풀무불에 다 타버려야 하는 인생들입니다.

물론 죄인의 근거가 막연하게 죄인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율법을 근거로 교만하다 악하다라고 하시지요,

지금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2절에서는 묘한 반전이 있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자에게 왜 치료하는 광선이 필요합니까?

2절을 제대로 풀어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은 본래 풀무불에 타야 되는 자들이다. 그런데 이런 자들에게 의로운 해가 떠올라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여서 의롭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뛸 것을 말씀하십니다.

제가 어릴 때에는 외양간도 쉽게 보고 송아지도 쉽게 보았습니다.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가 어떻게 뛰는지 알지요.

여기 있는 우리 어린이들은 잘 모르겠지요.

예를 들면 우리 어린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이나 사탕, 초콜릿을 준다면 정신을 못 차리죠.

그와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얼마나 기쁜지 자기 통제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지요.

풀무불에 타야 할 인간이 오히려 심판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4절에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을 피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누가 이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느냐 말입니다.

5절을 봅시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를 미리 보내신답니다.

보내서서 하는 일이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돌이키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고요.

풀무불 같은 날을 맞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엘리야의 말을 들으면 저주를 피할 수 있다는 말씀 아닙니까?

그런데 선지 엘리야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자녀들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킨답니다.

마태복음 11장10-15절을 봅시다.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 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사람이니라”

예수님께서 오리라한 엘리야가 누구라고 하십니까?

세례요한이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3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어떻게 합니까?

7절-12절을 보면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세례요한의 말에 의하면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과 일치하지요.

곧 임박한 진노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지요.

이미 도끼에 나무 뿌리에 놓였다고 합니다. 열매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진다고 합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말씀이 곧바로 세례요한으로 이어졌지요.

그런데 그 다음을 한번 보세요.

세례요한 뒤에 오시는 분이 어떤 일을 하신답니까?

심판하신다지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답니다.

그리고 키를 들고 알곡은 곡간에,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운답니다.

이 일을 누가 합니까?

예수님이 하십니다.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려고 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이지요.

문제는 알곡과 쭉정이를 누가 나누느냐 말입니다.

세례요한의 말에 의하면 모두 다 심판의 대상입니다.

임박한 진노를 받을 대상입니다.

그런데 누가 알곡으로 인정받을까요?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순종하면 될까요?

분명 말라기에서는 선지 엘리야가 와서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이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이 이 일을 해야 하지요.

따라서 세례요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진노를 피할 수 있지요.

그런데 세례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누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한다고 합니까?

바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 그렇게 한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세례요한이 분명 말라기4장에 예언된 선지 엘리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말라기 4장 말씀을 이루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세례요한의 사역은 예수님의 일에 포함되어 버렸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참으로 오리라 한 선지 엘리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셨습니까?

십자가의 피로 하셨습니다.

그냥 회개하면 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자녀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자녀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아버지인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율법을 기억하고, 회개하면 될 문제가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것은 단지 자녀의 마음만 돌이킬 뿐이지요. 물론 겉으로 보기에만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회개했다. 돌이켰다.

심판을 피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하며 가르치지요.

그러나 의로운 해는 누구에게만 떠오릅니까?

예수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실 때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극렬한 풀무 불을 피할 수 있습니다.

제가 설교 서론에서 사람이 중심이 된 성경해석을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중심에서 오늘 같은 설교를 들으면 무슨 생각하겠습니다.

무슨 신화 같은 이야기를 하느냐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뭔데 사람을 구원하고 지옥 보내느냐 말입니까?

예수라는 분은 좋은 분이에요.

사람을 사랑한 분이지요.

당신같이 성경해석하면 안되지요.

왜 그런지 아시오.

알아듣는 말을 해야 알아들을 것 아니요. 이렇게 반박할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알아듣는 말. 즉 사람이 이해하고 받아 들일 수 있는 이야기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으로서 지옥 보내고 천국 보내십니다.

물론 천국 가는 자도 주님이 자신의 피로 치료해 주셨기 때문에 구원받아 천국백성이 됩니다.

사람들은 심판을 싫어합니다.

풀무불은 그냥 이 땅에서 착하게 살아라고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절간에 가도 이런 그림들이 있잖아요. 종교라면 다 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성경도 마찬가지이겠지 생각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간은 모두 첫째 아담 안에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비슷하게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에덴동산도 알고 화염검도 알고, 죽음도 알아요. 물론 죽음 그 후도 알지요.

물론 모든 것들이 짝퉁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도 알아요. 우상 하나님.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상 예수를 믿어요.

그래서 어디에 살고 있든 성경말씀과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단지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라고 일축해버립니다.

그저 옛날 옛적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마치 백성공주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베드로 후서 3장 3-13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한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좀 길지요.

지금이 말세입니다.

말세가 되면 반드시 나타나는 자들이 있습니다. 기롱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합니다. 그리고 조롱하면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여당당입니까?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것 같지만 사실 부정하는 말이지요. 꼭 창조론자들 같습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한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없다고 합니다.

이들이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믿기는 믿어요. 그런데 주의 강림하심을 안 믿어요.

이유가 뭘까요?

심판이 없어야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거든요.

그런데 주님은 왜 아직 오시지 않나요.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를 대하여 오래참으사 다 멸망치 않고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도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남은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정반대로 생각하지요.

끝내버리려면 빨리 끝내버리지.

아니면 강림 없다. 심판 없다.

이 둘 중 아닙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중심이지요. 주님의 마음, 주님의 뜻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질 것입니다.

주님의 강림하심으로 풀무 불 심판이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성도는 새 하늘과 새 땅속으로 들어갑니다.

다르게 말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성도 속으로 밀려오지요.

말라기 선지자의 말씀이 우리가 볼 때 아주 이상하게 끝나는 것 같지요?

그런데 말씀이 그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연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주의 강림하심이 없다는 자들.

이들은 자신의 정욕을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설교 서론에서 사람들은 성경을 자신들 중심으로 해석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의 강림조차도 없다고 해 버립니다.

물론 없다고는 하지 않지요.

다만 언젠가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곧 주의 강림하심을 믿지 않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말씀에 관심 없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생계, 생존에만 관심 있습니다.

자기 자식, 가족에만 관심이 있지요.

돈을 좀 많이 버니 여가 즐기기 바쁘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오히려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오래 참으심에 대해 감사하는 자세로 살 것입니다.

이런 두 부류가 나타나는 자체가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강렬하게 전하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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