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사사기 강해 20

푸른 섬 2012. 5. 13. 13:52

사사기 강해 20 딤나삼손

삼손이 블레셋 여자를 좋아함






음성


사사기13:24-14:20

삼손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나실인입니다.

나실인은 구별된 자입니다. 거룩히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나실인 삼손이 그 자신을 거룩히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일을 기대할 것입니다.

특히 삼손이 태어난 시기, 사사 시대의 부패한 상황, 우상숭배를 하며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던 것을 떠올린 다면 삼손이 어떠해야 할까요?

타의 본이 되는 모범이 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생각 하지 않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나실인으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부패한 시대에, 음란한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을 부정하는 시대에 그야 말로 빛으로 소금으로 역할 하는 삼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오늘날 교회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한 삶을 살고 싶지요. 성령 충만하면 어떤 삶이 될 것 같습니까?

아마 백이면 백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그러면 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어떤 삶을 말합니까 라고 질문하면, 율법을 다 지키는 사람.

율법을 다 지킨다면 어떤 삶이 됩니까 라고 물으면 성인군자. 물론 성인군자라고 하지는 않겠지요.

왜냐하면 공자, 맹자, 석가모니 같은 것들과는 달라야 하니까요.

그러나 결국 정말 인간다운, 사람다운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으로 예수님을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용가치로 예수님을 대합니다. 자기 본능을 치켜 세워주는 예수님, 성령님,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보면 믿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행하는 신앙생활이 되어 버렸습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니까 자기 코드에 딱 맞아 떨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행함을 흉내 내려고 발악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예수님을 전합니다.

행함을 흉내 내라고 야고보서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라고 그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말씀이 야고보서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나오는 핵심이 믿음이라는 단어 아닙니까?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어떠한 일을 일으키는 지를 보세요.

물론 분명 땅에서 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일로서 말씀하시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믿음을 받은 자의 삶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만을 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렸습니다.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를 길로 나가게 했습니다.

둘 다 자신을 부인하는 모습이지요. 아브라함은 가정, 아버지 됨을 부인했고, 기생 라함은 민족, 국가를 부인했습니다.

정말 독특한 예이지요. 가정과 민족 국가는 우리가 살아갈 때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믿음이라는 것이 활동하게 되니 가정도, 민족도 부인하게 됩니다.

이것은 믿음의 내용, 즉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시는 예수님이 만유의 주님이 되심을, 그 주심이 자신들을 구원하심을 전하는 행위가 됩니다.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제대로 전하는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신약시대를 사는 모든 성도에게는 수시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아브라함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이루려고 행함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도 낳지 않았습니까?

기생 라합도 자기가 사는 여리고 성에 빌어 붙어 생명을 유지했지 않습니까?

이것이 겹쳐져야 믿음이라는 말이 성립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야고보서를 읽게 되면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돌아가셨는지가 분명해 집니다. 또한 그 분이 주님이심을 더 밝히 보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야고보서를 읽게 되면 나는 믿음 없는 자로 드러나고 오직 주님 되신 예수님만이 항상 그 믿음을 나에게 주심을 알게 됩니다.

책망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겠습니다.

야고보서4장13-17절입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죄 지은 자는 어디로 갑니까? 지옥가야지요.

그런데 이 말씀에 해당사항 없는 사람 있나요?

저는 주의 뜻이면 이것 저것을 하리라고 하는 사람있나요?

간혹 이런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여기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없어요. 장사하는 사람이 내일을 계획하지 않는 사람 있나요?

이게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장사하는 사람이 내일 없다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린 눈만 뜨면 허탄한 자랑하지 않습니까?

돈 자랑, 자식자랑, 남편 자랑, 아내 자랑, 가족 자랑등등. 안개를 자랑하며 사는 우리들 아닙니까?

그래서 카카오 스토리에 보면 다 자랑질입니다. 자식 자랑, 자기 얼굴 자랑 등등...

그러니 우린 죄인이고 지옥가야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상한 심령, 애통하는 심령이 될 수밖에 없어요.

이것도 물론 가끔 이렇게 설교를 들을 때나 그렇지요.

그런데 이 말씀이 우리에게 해당사항 있을 때가 일어나요.

그러면 이것은 어떤 상황인가요?

이것도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니 사도바울이 모든 것을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십자가 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바울의 고백이 아니라 성도의 고백이지요.

자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삼손이 태어 났습니다.

13장24절을 보면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25절에서는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다음 14장에서는 어떤 내용이 전개 되어야 합니까?

여호와의 신이 감동하셨으니 우리가 기대하는 바가 펼쳐져야 하겠지요.

그런데 상당히 실망 스럽습니다.

여호와의 신에게 감동된 삼손이 행한 첫 번째 행위를 봅시다.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딸 중 한 여자를 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해 달라고 부모에게 요청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나실인이 지금 부모님께 블레셋 여인과 결혼시켜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면 부모가 뭐라고 할까요?

달 알지요. 그러면 안된다라고 나오겠지요. 들은게 있잖아요. 그 엄마도 나실인이 되었잖아요. 그러니 나실인이니 더더욱 블레셋 딸과 결혼은 안 된다고 하겠지요.

그러자 삼손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 오소서 라고 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떠오르는 것이 있지요. 사사기12장9절할 때 말씀드렸지요.

신명기7장3절에서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니를 삼지 말 것은”

이 말씀을 삼손도 알고 있고 그 부모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삼손이 그 여자를 좋아해요.

그래서 결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4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고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함이었으나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거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이 번역이 문제가 있어요.

“그러나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것이 주에게서 나왔음을 알지 못하였고 또 그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지배하였으므로 그분께서 블레셋 사람들을 칠 기회를 찾고 있음을 알지 못하였더라”

개역성경에서는 삼손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려고 억지 번역을 한 것이지요.

사실 삼손은 자기가 하고싶은대로 좋아하는 대로 , 마음가는대로 블레셋 여인을 좋아하여 결혼하려고 한 것입니다. 물론 이 배후에는 여호와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칠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지요.

그러나 삼손은 삼손 자신이 기분 내키는 대로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려고 한 것입니다.

부모라고 알겠습니까? 몰라요. 참 이상하지요. 여호와의 신이 임한 사람이 블레셋 여인을 좋아한다. 그리고 결혼하려고 한다. 사사기를 보면서 여호와의 신에 대한 이해가 좀 많이 달라지지요.

그러니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여호와의 신은 마귀입니다.

율법에 불순종하여 딤나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딤나 포도원에서 어린 사자가 삼손 앞에서 소리 지릅니다.

이 사건을 왜 일으키신지는 우리가 이미 성경을 다 읽었기 때문에 알겠지요.

6절입니다.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 같이 찢었으나 그는 그 행한 일을 부모에게도 고하지 아니하였고

부모와 함께 갔는데 부모는 이 장면을 못 본모양입니다. 아니면 먼저 딤나 여자 집에 들어갔던지. 어찌되었든지 삼손만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7절을 봅시다.

그가 내려가서 그 여자와 말하며 그를 기뻐하였더라.

여자랑 대화를 해 보니 너무 마음에 든 거예요.

삼손이 결혼하기로 마음먹었겠죠.

그리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모양입니다. 이 내용은 없어요. 그러나 8절에 얼마 후라는 말씀 속에서 이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삼손이 여자를 취하려고 딤나로 내려가는 중입니다. 결혼식을 할 모양입니다.

그러던 중 이전에 죽인 어린 사자가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죽은 사자가 어떻게 되었는가 보는데 사자의 몸에 벌떼와 꿀이 있었습니다.

우리 성경은 좀 심심하게 번역해 놓았지요.

보라. 라는 말이 있어요. 보라 사자의 사체에 벌떼와 꿀이 있다 라고 읽으면 더 극적이지요.

왜 보라는 말이 있을까요?

생태계 법칙에 의하면 죽은 시체에는 벌이 모이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에는 얼마 후라는 말을 상당한 시일이 경과하여라고 주석하면서 그래서 사자 뼈만 앙상하게 남은 곳에 벌이 꿀을 모아두었다고 해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린사자를 염소새끼 찢음 같이 찢었다는 말씀도 문제가 생겨요. 그냥 죽은 사자 사체에 벌떼와 꿀이 있었던 것입니다.

손으로 꿀을 취하여 걸어가면서 먹습니다. 또한 그 부모님께도 드렸습니다. 그러나 꿀이 어디서 났는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결혼식 때 써 먹으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드디어 삼손이 결혼 잔치를 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하는 풍속대로 잔치를 열었습니다. 나실인 별것 없지요. 삼손은 그냥 자신이 사는 대로 살 뿐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보고 삼십 명을 데려다가 동무를 삼아 삼손과 함께 하게 했습니다.

삼손을 딱 보니까 들러리가 삼십 명은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삼손이 이들에게 수수께기를 냅니다. 자신 만만해 하지요.

잔치하는 칠 일안에 수수께끼를 풀어 삼손에게 고하면 베옷 삼십별과 겉옷 삼십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만일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너희들이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주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이 제안에 수수께끼를 내어 우리로 듣게 하라고 합니다. 이것도 당시 결혼식 풍속중 하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수수께끼와 상품이 걸려지는게 아니겠습니까?

어찌되었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우리야 쉽지요. 답을 아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수수께끼는 블레셋 사람들이 절대로 풀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풀면 안 되는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블레셋 사람을 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아내를 협박합니다. 네 남편을 꾀어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리라고 합니다. 뿐 만 아니라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취하고자 하여 우리를 청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냐 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삼손의 아내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남편을 설득해야지요. 여자의 가장 강한 무기가 무엇입니까? 눈물 아닙니까?

그것도 칠일동안 울면서 삼손을 괴롭힙니다.

넘어가지 않을 남편 있나요?

수수께끼를 풀어 아내에게 알려 주었고 아내는 자기 민족에게 고하였습니다.

18절을 봅시다.

“제 칠일 해지가 전에 성읍 사람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무엇이 꿀보다 달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한지라 삼손이 그들에게 대답하되 너희가 내 암송아지를 밭갈지 아니하였더면 나의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하니라”

그런데 19절을 봅시다.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크게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곳 사람 삼십 명을 쳐 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아비 집으로 올라갔고”

말씀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임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일 아닙니까?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임하니 삼손이 아스글론에 가서 사람 삼십 명을 쳐 죽입니다. 그리고 옷을 전리품으로 갖고 와서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스글론도 블레셋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삼손이 심히 노하여 아비 집으로 돌아갔다는 말씀을 볼 때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이 한 짓에 대해 굉장히 화가 많이 났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스글론에 가서 화풀이를 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배후에 누가 조종했습니까? 여호와의 신이 조종했습니다.

말씀을 보면 삼손이 뭔가 우리가 기대했던 특별한 것이 있나요?

힘만 잔뜩 세었지 자기 아내의 눈물에 졌잖아요.

삼손은 자신기분 내키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삼손을 여호와께서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 삼십 명을 죽이게 하셨습니다.

엄청 노한 상태로 말입니다.

삼손은 딤나로 내려갈 때 어린 사자를 만나게 하시고 그곳에 벌과 꿀을 두신 것도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부모도 삼손도 왜 블레셋 여자를 좋아하고 그와 결혼하려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냥 결혼 풍속대로 잔치하고 수수께끼 내고 즐겁게 보내는 중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사용하셔서 블레셋을 치고 계셨습니다.

삼손은 자신이 블레셋을 치는 사람인지도 알지 못해요.

지극히 사적인 일들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야고보서를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그냥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기분 내키는대로 내가 좋아하는 대로, 당기는 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그렇게 살아가는 자에게 치고 들어옵니다.

그렇게 살아가게 하는 것은 주님의 피공로를 전하기 위해서 그렇게 살게 하셨다고 치고 들어옵니다.

주의 뜻이면 이것저것도 할 것이라는 말씀도 우리에게 치고 들어옵니다.

오직 내 이익만 관심 갖고 사는 우리에게. 그래서 믿음의 내용, 즉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전하게 하십니다.

성도는 삼손처럼 사용되어지는 자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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