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사사기강해 21

푸른 섬 2012. 5. 21. 13:34

사사기 강해 21

엔학고레





음성설교


사사기15장1-20

삼손의 분노가 좀 가라앉은 모양입니다.

얼마 후에 아내를 찾아 갔습니다.

그런데 장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장인이 말합니다.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 알고 그를 네 친구에게 주었노라 그의 동생이 그보다 더 아름답지 아니하냐 청하노니 너는 그를 대신하여 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라”

아내가 수수께끼의 비밀을 자기 동족들에게 알림으로 말미암아 삼손의 분노가 극에 달했었습니다.

그러니 아내를 데려 가지도 않고 버려두고 분노하여 혼자 가 버리지 않았습니까?

이게 장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삼손의 아내를 삼손의 친구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아마 결혼식에 들러리로 왔던 사람에게 주었던 모양입니다.

그러자 삼손이 뭐라고 합니까?

3절입니다.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하고”

이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지난번에 삼손이 당했지요. 아내 때문에. 그러니 자신이 고생을 죽도록 했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해요.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 싸움을 하면 힘이 하나도 안 들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마치 만화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삼손은 그 때의 원한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은 블레셋 사람들을 해칠 기회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이 배후에는 여호와께서 삼손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는 구원자임을 말씀하신 배경이 있지요.

삼손도 그것을 알까요? 알고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사건의 진행을 보면 알고 있다고 말하기가 상당히 곤란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삼손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다 삼손의 계획적인 행동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건의 진행은 상당히 우발적이지요. 뿐만 아니라 장인이 자신의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과 상관없이 블레셋 사람을 치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삼손 자신도 얼마나 훌륭한 사람으로 드러나게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삼손이라고 우리와 다를까요?

그런데 죄인이 어디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늘 기억하고 있나요?

삼손 같으면 기억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일의 진행을 보면 기억하지 않습니다.

물론 삼손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지요.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삼손은 자신의 개인적 원한으로 블레셋 사람들에게 엄청난 손해를 끼칩니다. 특히 그 아내를 데려간 사람이 그 때 들러리로 온 삼십 명 중 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여우 삼백 마리를 산채로 잡았습니다. 대단하지요. 여우 한 마리도 그냥 잡기 힘든데 삼백마리나. 그리고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가지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홰에 불을 붙이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밭으로 몰아들입니다. 역시 여호와의 신이 임했던 것이지요.

곡식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포도원과 감람나무들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여우 삼백 마리가 불을 지른다 생각해 보세요. 여우가 통제됩니까? 자기 마음대로 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많은 곡식과 곡식단, 포도원, 감람나무들을 불살랐겠습니까?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이 이 짓을 누가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블레셋 사람들이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니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빼앗아 그의 친구에게 준 까닭이라 하였더라.

제 말이 맞지요. 개인적이 복수입니다. 그 사실을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삼손의 장인과 그의 아내 되었던 사람을 불살랐습니다.

이 부분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삼손의 아내나 장인 모두 블레셋 사람이지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게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이 본문을 보면서야 이런 사실을 알 수 있지요.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알았을까요?

몰랐습니다.

그런 일은 어느 곳에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 아닙니까?

자기 민족에서 해를 끼친 자를 죽였다. 불살랐다. 이게 무슨 여호와의 구원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죽음은 곧 여호와 하나님께서 삼손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행동이 됩니다. 물론 삼손은 모르지요.

이 일로 인해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장인과 그 아내를 불살라 죽인 것에 대해 원수를 갚고 말겠다고 합니다.

여기에 무슨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까?

개인적 원한입니다.

삼손은 자신의 아내가 다른 사람에게 간 것이 장인이나 자신의 아내 문제로 보지 않았습니다.

지난 번 사건과 관련지어 블레셋 사람들의 문제로 보았지요.

그러니 지금 삼손은 장인과 아내의 원수를 꼭 갚고 말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크게 쳐서 죽였습니다.

몇 명을 죽였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닥치는 대로 보이는 대로 쳐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에담 바위에 머물렀습니다. 쉬고 있었겠죠. 제가 말씀드렸지요.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고 피곤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이것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이 유대에 올라와 진을 쳤습니다. 레이라는 곳에 진을 친 모양입니다.

숫자가 장난이 아닙니다.

그러나 유다 사람들이 너희들이 어찌하여 올라와서 우리를 치느냐고 묻습니다.

이 말뜻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습니까?

우리가 무슨 잘못했느냐? 너희들 지배를 잘 받고 있지 않느냐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왜 치러 올라 왔느냐?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말합니다. 삼손을 결박하여 삼손이 자신들에게 행한 대로 삼손에게 행하겠다고 합니다.

삼손을 때려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삼손을 잡으러 갑니다.

중간이야기가 빠졌지요.

유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삼손 그 놈을 잡아 올 테니 제발 우리를 치지 마세요.

블레셋 사람들이 허락을 했겠지요.

그래서 유다사람 삼천 명이 삼손을 잡으러 갑니다.

여호와의 구원에 대해서 유다사람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사용하셔서 이들을 구원하게 계신 중입니다.

에담바위 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말합니다.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지금 누구를 원망합니까?

삼손을 원망하지요.

이런 장면 어디서 보았지요.

모세가 애굽에가서 이스라엘백성들을 구원하려고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말이잖아요.

원망이 나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어요. 우리들 생각에 그렇지 않나요?

이런 자들이 어떻게 구원받나요.

그러나 여호와께서 오히려 이런 자들을 삼손을 통해 구원하십니다.

삼손이 뭐라고 합니까? 원수 갚았다고 하지요.

그러나 유다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삼손 잘했어요 잘했어 합니까?

삼손이 당한 일에 대해 관심이 없어요. 이들은 오직 자신들만 살면 됩니다.

결국 삼손이 이들 손에 잡혀 줍니다.

여호와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자신들을 구원하는 자를 잡아 죽음에 넘겨주고 있습니다.

삼손이 레히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소리 지르며 삼손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팔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 들고 그것으로 천명을 죽였습니다.

삼손이 왜 이들을 죽였습니까?

삼손은 자신은 살려고 이들을 죽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고 이들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삼손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지요.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명을 죽였도다”

그리고 그곳 이름을 짓습니다. 라맛레히.

무슨 뜻인고 하면 턱뼈의 산이라는 뜻입니다. 턱뼈로 블레셋 사람 천명을 죽여 산을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시체 산을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심히 목이 말랐습니다.

제가 이미 말씀드렸지요.

우리 생각에는 여호와의 영이 임하면 목이 안 말라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이 말도 우린 부정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큰 구원이라는 표현은 삼손 개인에게 해당되는 표현 아닙니다.

삼손이 이 구원을 이스라엘의 구원으로 인식하고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목말라 죽을 것 같으니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이런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기본적이 부르짖음이지요.

할례 받지 못 한 자들에 손에 떨어지겠나이다라고 하지요.

그러면 왜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 여인을 좋아했나요?

이런 죄인이 삼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어 물이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삼손이 그것을 먹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했습니다.

그래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습니다. 엔학고레란 부르짖은 자의 샘이라는 뜻이지요.

여기까지가 오늘 우리들이 보는 사건의 내용입니다.

삼손은 분명 사명을 받고 태어났지요. 그런데 그 사명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하는 가운데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지요.

물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싶은 마음밖에 없습니다. 여호와께로부터의 구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렇게 관심 없는 자들을 여호와께서 삼손을 보내셔서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구원자, 사사 삼손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본받을 만합니까?

어떤 목사가 이렇게 설교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삼손이 목이 심히 말랐지요. 왜 목이 심히 말랐습니까?

블레셋 사람 천명을 죽였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우리들도 주님의 일을 하다보면 목이 마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르짖으면 엔학고레, 즉 부르짖은 자의 샘이 터질 것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이 과연 이런 생각을 지지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삼손은 단지 자신이 살고 싶어서 블레셋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으니 여호와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물론 기도도 일품이지요. 내가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죽게 되겠다고 기도하지요.

꼭 누구 기도 같습니다.

자기가 살고 싶어 기도하는 우리 모습 같지 않습니까?

그러니 앞서 예를 든 그런 목사처럼 오늘 본문을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했다. 목이 말라 죽을 때까지 했다가 나오겠지요.

이번에 제가 멀리 다녀왔습니다.

주일 설교를 이년 정도되는 분량을 하고 왔습니다.

다 듣고 난 뒤에 어떤 한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오직 전적인 주님의 은혜이지만 그 다음은 우리가 선한 행위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모든 것을 주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말씀을 보면서 설교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십자가지신 주님의 능력이 미치는 곳은 구원밖에 못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 후는 내가 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합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주장을 할까요?

상급 때문이랍니다. 지금 많은 설교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다른 곳으로 나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 남아 열심히 복음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고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희생하고 봉상하는 것에 대한 상급은 얼마나 크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탕자 비유를 말씀드렸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이 장자가 되고 저들이 탕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입니다.

그 다음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기약이 없지요.

믿음의 사람 삼손을 우리들이 지금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사기에서는 사사지만 히브리서 11장에 근거하여보면 삼손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삼손을 보면서 그의 믿음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삼손의 믿음이 있습니까?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삼손을 몰아가고 끌고 가십니까?

삼손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삼손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십자가지시는 예수님을 전하고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은 자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성도가 그렇지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라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성도 자신은 날마다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삼손이 살아가는 발자국 마다 삼손의 죄는 더 깊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십자가 사랑을 더욱더 깊어집니다.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주님께서 하셨고 나는 죄인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삼손 정도 되면 자신이 뭔가 했다고 할 만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가 행했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그렇게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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