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사사기 강해 16

푸른 섬 2012. 5. 8. 00:01

사사기강해16 입다-무남독녀

입다-무남독녀의 죽음





음성설교


사사기10장17-11장40

17절을 보면 그 때에 라는 말이 나옵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 극적으로 이렇게 표현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땅에서 일어나는 일중에 어떤 것도 주님께서 하시지 않으시는 일이 없습니다.

마태복음10장29-30절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도 세신바 되었나니”

참새 한 마리 죽는 것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셔야 가능합니다.

얼마 전에 제가 여기 앞 공원에서 산책을 하는데 축구장 그물에 걸려 죽은 새를 보았습니다.

그 새의 죽음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죽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보려고 하는 본문의 시작이 그렇습니다. 기록자가 극적으로 말하려고 접속사를 집어넣은 것이 아닙니다.

그때 에 라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마침 그때에 라고 표현해도 됩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했다고 부르짖었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은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옵소서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주께서라는 용어를 사용했지요. 이스라엘 백성의 사고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주도권을 넘긴 상태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를 건져주옵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가운데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셨습니다. 바로 이때가 17절에 나오는 그때입니다.

암몬자손이 모여서 길르앗에 진을 쳤습니다. 암몬자손들을 롯의 후손들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지요. 소돔성에 거할 때 아브라함으로 인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지금 그들이 누구의 원수가 되었습니까? 이스라엘의 원수, 아브라함 자손의 원수가 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도 미스바에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누가 대장이 될 것인가?

그래서 이들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가장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가 싸우는 사람, 싸움을 시작하는 사람을 자신들의 대장으로 삼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11장으로 넘어 갑니다. 1-3절은 입다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므낫세 지파에 속했는데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입다입니다.

우리말 번역이 재미 있지요.

기생이 주체가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맞아요.

그런데 길르앗의 아내가 있었고 그녀도 아들들을 낳았습니다.

문제는 이 아들들이 자라자 입다를 쫓아내 버렸습니다. 이유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유산 다툼을 미리 막았습니다.

돈이 미친 아들들이지요. 재산이 눈이 휙 돌아가 버린 아들들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항상 피가 발린 언약궤 뚜껑, 즉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중심으로 성경을 읽으시면 됩니다. 이렇게 되면 길르앗의 아들들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재빨리 눈치 챌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아버지 길르앗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자 입다가 돕땅에 거주했습니다. 돕땅은 미스바 동북쪽입니다. 그곳에 거하니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합니다. 잡류라는 표현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정말 무가치한 인간들, 없어져도 될 인간들을 의미합니다. 입다가 그러했죠.

입다는 무가치한 인간들과 함께 모여 삽니다. 길르앗 사람들이 볼 때에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입니다.

얼마 후 암몬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할 때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땅에 갑니다.

돕땅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무가치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 아닙니까?

그곳에 왜 갑니까? 입다를 모시러 갑니다. 지금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니 당신이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어 달라고합니다.

입다가 뭐라고 합니까?

7절입니다.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가 왔느냐

입다를 길르앗의 아들들이 쫓아낼 때 길르앗의 장로들도 모두가 절대적으로 지지를 했다는 말입니다.

입다가 이렇게 말하니 길르앗 모든 주님의 머리, 대장으로 모시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입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9절“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 주시면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

그러자 여호와께서 입다 당신과 우리사이의 증인이라하면서 입다를 자신들의 머리와 장관으로 삼았습니다.

입다가 길르앗의 장관이 되었다는 것은 길르앗 사람들은 무가치한 인한 그 이하라는 말이 되겠지요.

성경은 지금 이것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자신들을 건져달라고 기도한 자들의 현 모습을 지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었습니다. 입다가 믿음이 좋아서 아뢰었는지 아니면 다른 의미인지는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어찌 되었던 입다는 싸움을 상당히 잘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무가치한 자들이 모였으니 그들이 뭘 했겠습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조폭들 아니겠습니까?

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들을 보내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니라고 하지요.

여기에서 입다의 말을 주목해 보세요. 이 땅이 누구 땅이라 합니까? 내 땅이라 합니다.

지금 입다는 왕 행세를 하고 있어요.

그러자 암몬 왕이 이 땅은 원래 자기의 땅이니 순순히 좋은 말할 때 돌려달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입다가 어떻게 지금의 땅을 차지했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성경 박사입니다. 잡류로 살아가는 입다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들에게 지금의 땅을 주셨는지를 이렇게 잘 아는 것을 보면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도 잘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쫓아내시면 그것을 우리가 차지하리라 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앞에 보면 네 신 그모스가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한 것을 네가 차지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하지요.

여기에 빗대에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쫓아내시면 그것을 우리가 차지하리라고 말합니다. 전쟁이 이제는 신과 신의 전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2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 사이에 판결 하시옵소서.

그러나 암몬 자손의 왕은 입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29절을 봅시다.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는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지 않았다는 말이 되지요.

그러면 지금까지 입다의 말은 다 무엇이 됩니까?

자기 말이 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대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니 입다가 대단하니 훌륭하니 이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됩니다.

여호와의 영이 절묘하게 임하시지요. 그런데 입다가 무슨 말을 합니까?

30절입니다.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여호와의 영이 왜 이렇게 활동하실까요? 암몬자손에게로 전쟁하러 나가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영이 임했는데 왜 이런 소리를 할까요?

우린 이런 생각하지요. 여호와의 영이 임하면 제대로 된 소리만 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영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마음을 그대로 들추어냅니다.

입다가 생각하는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여호와 하나님입니까?

불쌍히 여겨주셔서 구원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다른 여호와 하나님입니까?

입다는 자신이 뭔가 바칠 수 있는 존재라 생각하고 있지요.

여호와께서 암몬자손을 입다손에 넘겨주셨습니다.

암몬 자손이 항복했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누가 승리했습니까?

입다가 승리했습니다.

누가 보아도 입다의 승리입니다.

물론 입다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사이를 심판하실 것을 말했지만 그것은 그야 말로 입다의 말일 뿐입니다.

전쟁승리를 너무나 간결하게 기록해 놓았지요.

기드온의 경우는 전쟁의 과정을 아주 길게 기록해 놓았지요.

그 이유가 다 있습니다.

전쟁에 승리하여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 올 때 였습니다.

이미 길르앗은 입다에게 집도 주고 장관대우, 대장 대우를 완벽해 했습니다.

입다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아버지 입다를 영접합니다. 그런데 그 딸은 입다의 무남독녀입니다.

우리 딸 같지요.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입다가 평소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자기가 입을 함부로 놀려 이런 문제가 발생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딸을 탓하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조폭답게 한 벌 내 뱉은 말을 꼭 지킵니다.

그런데 딸은 뭐라고 합니까?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니다”

딸도 오직 아버지 생각 뿐입니다.

정말 이상하지요. 암몬 자손이 어떻게 아버지의 대적, 입다의 대적이 됩니까?

지금 입다의 위치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요.

결국 입다는 딸을 자신이 서원한 대로 행했습니다.

그리고 1차결론을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고 맺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왜 이런 식으로 입다를 몰고 갔습니까?

여기에서 여호와의 영을 빼버려도 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입다의 행동만이 사람들의 눈에 보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기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셨다고 하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준다. 그러나 그 구원이라는 것이 죄인을 그냥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입다가 너희들의 구원자다. 입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 구원의 바탕에는 무남독녀 딸의 희생이 담겨 있다. 물론 이 딸도 입다와 다르지 않습니다.

누구 때문에. 너희들의 구원자 입다 때문에.

입다는 자기가 잘나서 ,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편이 되어 주셔서 자신이 이스라엘을 암몬자손의 손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암몬자손과의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전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대한 불쌍히 여겨 주심에 대한 전쟁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을 입다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자신을 위한 전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누가 죽습니까? 자신의 딸이 죽습니다.

딸의 이름도 나오지 않습니다. 정말 이상하지요. 웬만하면 이름이 기록될 터인데 왜 입다의 딸은 무남독녀 외에는 나오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의도를 가지시고 이렇게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름 없는 자의 죽음, 무남독녀의 죽음이라는 말씀으로 입다와 이스라엘에게 지금 여호와의 구원이 어떤 구원인지를 알려주시고 계십니다. 지금 여호와의 심정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이렇게 몰고 가십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 입다의 죄악의 그 바닥을 노출시키고야 마십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높여버리십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영이 하시는 일입니다.

요한계시록7장14절을 보면 흰옷입은 자들이 나옵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지난번에 히브리서11장에서 바락을 말씀드렸습니다.

히브리서11장32절을 보면 입다도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입다가 여러분 보시기에 과연 믿음의 사람입니까?

도대체 입다의 믿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우리들이 입다의 행적 대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에브라임 지파를 멸하는 것은 다음 주 보겠지만, 그것과 함께 보더라도 입다가 믿음의 사람임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을 암몬의 자손에서 구원했다는 것으로 볼수 있습니까?

그게 믿음으로 볼 수 있습니까?

교회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 믿음에 대해 오해를 합니다. 성경을 보면서 믿음의 증거물들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들이 포착할 수 있는 것들을 끌어 모읍니다.

기도라든지, 아니면 전도, 열심, 등등을 말입니다.

그러면 입다에게서는 어떤 믿음의 모습을 끄집어 낼수 있을까요?

저들이 말하는 믿음의 삶이란 곧 삶을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내뱉은 말을 지킨 입다를 본받아야 할까요?

지금 입다가 그렇게 한 것을 하나님 뜻에 합당한 것입니까? 이것 갖고 많은 사람들이 논쟁을 하지요. 진짜 딸을 죽였다,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성경에는 죽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입다 당시 종교적 상황, 인신제물제사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지요. 역사적으로 인신제물역사는 많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아들 외에는 받지 않습니다. 그러니 딸을 여호와께 돌렸다는 것은 입다의 행위일 뿐입니다. 물론 입다의 행위를 통해 딸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전하고 있지요.

이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과 같은 구조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 경외의 긍정적 측면, 믿음의 긍정적 측면을 보여줍니다. 입다는 하나님경외의 부정적 측면을 보여 줍니다.

만일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믿음만이 있다면 모든 사람들은 아브라함처럼 긍정적 하나님 경외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결국 자기 몸에서 나오는 행위를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입다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런 욕망들을 일체 거부해 버립니다. 믿음이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자신의 희생으로 주시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계시록에 큰 환난 가운데서 나온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이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입다를 이 말씀에 넣어 봅시다. 어떤 사람은 주장합니다.

입다는 구약인물이고 그래서 십사만 사천에 들어가는 사람(계7:4)이라고. 이것은 말이 안 되지요. 성경 뒤를 읽어보면 셀 수 없는 큰 무리(7:9)라고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라고도 표현하고 ,계19: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에서 또 어떤 사람은 옳은 행실에 중점을 두어 또 믿음의 행위를 끄집어. 물론 이들이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위를 언급하지만 또 헛다리짚고 있지요.

믿음의 행위는 그야 말로 믿음의 행위이지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희생으로 구원해주신 그 삶 전체가 믿음의 행위가 됩니다.

입다의 삶 전체가 믿음의 행위이지요.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는 것을 강조하심으로 말미암아 입다의 삶 속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죽으심이, 그 피가 입다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음을 또한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 전체가 믿음의 행위이듯이.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는 것은 반드시 행위를 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삶을 담고 있습니까 있지 않습니까?

입다의 믿음도 그렇지요.

사람들은 오해 합니다. 믿음이라고 하면 삶이 없다고. 이 말을 하는 사람도 제정신이 아닌 사람입니다.

행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밥 먹고, 자식 키우고, 돈 벌고, 헌금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설교하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짜증내고, 다정히 대하고, 참고, 기다리고, 별별 모습이 사람에게서 그냥 넘쳐흘러 나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믿음이요 다른 한 사람은 믿음의 삶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누가 믿음의 삶입니까?

그거야 간단하지요. 입다처럼 십자가지신 예수님을 전하는 자가 성령 받은 자이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십자가의 피를 자랑합니다. 입다는 물론 구약사람이지요.

우리가 성령 받은 자로서 입다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라면 모든 삶을 부정하고 십자가만 자랑할 것입니다. 삶을 부정한다는 말은 삶이 없다는 말이 아니지요. 삶이 없는 인간이 어디 있습니다.

사람들이 제 설교를 들으면 이런 이야기를 해야. 어떻게 살아란 말입니까?

한쪽에서는 너무 완벽하게 살아라로 들리는 모양입니다.

다른 한 쪽에서는 마음대로 살아라고 들리는 모양입니다.

입다 보세요. 어떻게 살았습니까?

인간은 완벽하게 살수가 없어요. 자기 기준에 완변할 뿐이고, 소수의 타인기준에 완벽해 보일 뿐이지요.

입다처럼 사시면 됩니다. 달리 표현할까요? 성령 충만으로 사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러면 십자가만 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입다의 행동이 지 마음대로 살았습니까 아니면 여호와의 영에 이끌리어 살았습니까? 분간이 안가요.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사람 입다.

성도란 이런 축복을 받은 자입니다. 쓸데없는 인간. 필요치 않는 인간, 조폭처럼 사는 인간, 완전 자기 마음대로 사는 인간인데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구원해 주셨습니다. 무엇하라고. 구원해 주셨습니까?

어린양의 피로 옷 씻었음을 자랑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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