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사사기 강해 17 에브라임

푸른 섬 2012. 4. 9. 17:42

사사기강해 17

에브라임




음성

사사기12장1-7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와 싸웁니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 아닙니까?

사사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찾아 왔습니다.

사사기8장1절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 지라”

에브라임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에브라임 사람들은 뭔가 특권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창세기48장을 보면 야곱은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자신의 아들이라 말합니다. 르우벤과 시므온 처럼 야곱의 것이 될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에브라임과 므낫세 후의 자녀들은 요셉의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을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전능한 하나님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셨음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귀속시켰습니다.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창48:4) 는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고백하는 차원입니다.

그리고 이들 두 아들에게 축복을 합니다. 요셉의 아들로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로 축복을 합니다.

요셉은 눈이 보이지 않은 아버지를 도와 아버지 오른손으로 장자인 형 므낫세, 왼손엔 차자인 동생 에브라임의 머리를 갖다 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오른손으로는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왼손으로는 장자인 므낫세의 머리에 얹었습니다. 이것을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그러고는 요셉을 축복합니다. 물론 실제로는 에브라임이 므낫세를 축복한 것이지요.

요셉은 축복을 곱빼기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차자인 에브라임 장자의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19절을 봅시다.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므낫세도 크게 되지만 에브라임은 더 크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33장으로 가면 13절부터17절입니다.

“요셉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원하건대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에 저장한 물과 태양이 결실하게 하는 선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선물과 옛 산의 좋은 산물과 영원한 작은 언덕의 선물과 땅의 선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 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의 형제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그는 첫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민족들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곧 에브라임의 자손은 만만이요 므낫세의 자손은 천천이로다”

에브라임과 므낫세은 가나안 땅의 4분의 1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르우벤이 받아야 하는 장자권도 요셉이 받았습니다.

물론 차자인 에브라임이 받았지요.

16절을 보면 “가시 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의 형제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뿐만 아니라 17절에 “그는 첫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민족들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곧 에브라임의 자손은 만만이요 므낫세의 자존은 천천이리로다”

이 정도 되면 에브라임이 큰 소리 칠 만하지 않습니까?

장자권을 갖고 있는 에브라임을 왜 무시하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에브라임의 끝물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라고 에브라임을 달랬던 것입니다. 기드온의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또 닥친 것입니다.

이제는 입다에게 와서 따집니다.

12장1절을 봅시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

왜 이 말이 나왔을까요?

에브라임은 어떠하다 했습니까?

첫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고 그 뿔이 들소의 뿔같다고 했지요.

장자권도 가지고 있고 또한 힘도 대단합니다. 이들이 그냥 허풍을 치는 것이 아니라 진짜 힘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힘이 있는데, 적들을 물리칠 수 있는데 이들은 가만히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기드온을 잠시 도와주긴 했습니다 마는.

입다가 뭐라고 말합니까? 2,3절입니다.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 나는 너희가 도와주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주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 내게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더라”

에브라임은 누구와 싸워야 합니까?

자기 백성을 괴롭힌 미디안이나 암몬 같은 자들과 싸워야 하지요. 그런데 지금 누구와 싸우려고 합니까? 사사 입다와 싸우려고 합니다.

왜 이런 마음이 생겼을까요?

이들에게 내린 축복때문입니다.

야곱이 내린 축복, 모세가 내린 축복, 그 축복이 이들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축복이나 모세가 야곱의 축복을 이어 받아 내린 축복이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없어요.

그러면 왜 이런 일이 발생합니까?

말씀에 대한 오해이지요. 축복이라는 것이 에브라임 자신들을 위해 주신 축복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에브라임 지파를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브라임 지파는 자신들의 지위라고 할까요? 형제들 중에 구별된 자로서 축복을 받았다는 의식 때문에 기드온 때와 같이 지금도 이런 행동을 합니다.

입다가 에브라임 지파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에브라임 지파는 입다를 암몬자손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을 보면 입다가 상당히 전쟁에서 고전했던 모양입니다. 결국 에브라임이 도와주지 않음을 보고 입다는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건너가 암몬 자손을 쳤습니다.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지만 여호와께서 암몬 자손을 입다의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에브라임 자손들이 암몬과의 전쟁에 입다의 도움요청을 거절해 놓고 이제 와서 또 큰 소리 칩니다. 자신들을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에브라임이 입다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기드온 때와는 많이 다르지요.

기드온때 잠잠히 물러난 것이 상당히 분했던 모양입니다.

이제는 가만 있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이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결국 입다는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습니다. 그 이유는 에브라임 사람들이 길르앗 사람들을 조롱했습니다.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표현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입다가 길르앗 사람들로부터 쫓겨나 돕 땅에 가서 아무런 가치 없는 인간으로 취급받았지요.

그런데 에브라임이 길르앗을 보는 시각도 그런 시각입니다.

사실 길르앗은 므낫세 지파에 속했습니다. 에브라임도 그것을 알겠지요. 그러면 왜 이런 말을 할까요?

비꼬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싸움을 하니 에브라임사람들이 상대가 안 됩니다. 도망칩니다.

길르앗 사람이 먼저 요단강 나루턱을 장악하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를 죽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사사기7장24,25절을 봅시다.

“기드온이 사자들을 보내서 에브라임 온 산지로 두루 다니게 하여 이르기를 내려와서 미디안을 치고 그들을 앞질러 벧 바라와 요단강에 이르는 수로를 점령하라 하매 이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다 모여 벧 바라와 요단 강에 이르는 수로를 점령하고 또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오렙은 오렙 바위에서 스엡은 스엡 포도주 틀에서 죽이고 미디안을 추격하였고 오렙과 스엡의 머리를 요단 강 건너편에서 기드온에게 가져 왔더라”

제가 이 본문을 보자고 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에브라임은 요단강에 이르는 수로를 점령해서 적장들을 사로 잡아 죽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사기3장 28절을 보면 사사 에훗이 모압을 칠 때에도 모압 맞은 편 요단 강 나루를

장악하여 모압사람 약 만 명을 죽였습니다.

물론 요단강 나루 위치가 어떠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에브라임의 역할이었지요.

그런데 지금 그 에브라임 사람들이 도망치다 요단강 나루턱에서 잡혀 죽습니다.

이곳이 에브라임 사람들이 요단강을 건널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누가 에브라임 사람들인지 알겠습니까? 모두가 다 야곱의 자손이니 생김새로 알아보지 못하지요.

그래서 발음을 이용하여 에브라임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려 냅니다.

쉽볼렛이라 말하라고 하면 에브라임 사람들은 십볼렛 이라고 발음합니다.

마치 경상도 사람이 쌀 이라고 하면 살이라고 발음하는 것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때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얼마입니까? 사만 이천 명입니다.

왜 이 숫자를 기록했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들이 민수기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민수기 1장33절을 보면 에브라임 지파에서 계수된 자가 사만 오백 명입니다.

그리고 사십년이 지나 세어 보니 삼만 이천 오백명입니다. 민수기26장37절입니다.

왜 숫자가 중요할까요?

창세기15장5절을 보면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이 말씀 때문입니다. 숫자가 줄었다는 말은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았다는 것입니까? 오히려 저주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사기에서 몇 명이 죽습니까?

사만 이천 명. 약속의 땅에 들어온 자들보다 더 많이 죽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약속의 땅에 들어 와서 오히려 더 많이 죽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가 어떤 지파입니까? 야곱의 아들들 중에 뽑혀 머리에 축복을 받은 지파 아닙니까?

그런 지파가 지금 이런 꼴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들은 싸움을 해야 할 때 싸움을 해야 하는데 누구와 싸움을 했습니까?

이스라엘과 싸움을 합니다.

시편78편을 한번 찾아 봅시다.

9-11절입니다.

“에브라임 자손은 무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율법 준행을 거절하며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과 그들에게 보이신 그의 기이한 일을 잊었도다”

에브라임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내리고 있습니다. 물론 에브라임은 야곱자손의 대표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고,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의 대표자로 에브라임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67절을 보면 “또 요셉의 장막을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가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며 그의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강 같이 지으셨도다”

시편 78편에서 어떻게 에브라임지파가 버림을 받고 유다지파가 택함을 받았는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에브라임 지파가 전쟁에서 물러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들은 분명 무기를 갖추고 활을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전쟁에 이들은 도망가 버렸습니다.

야곱의 형제들 중 장자로 삼으신 이유를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대접받고 싶은 마음.

이런 자들을 주님께서 그들이 조롱하고 비웃은 길르앗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마치 자신들의 대적이 죽임을 당하듯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요한복음8장39-41절을 한번 봅시다.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대화가 놀랍지 않습니까?

앞서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해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아버지와 유대인의 아버지를 나누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나온 대답이 방금 읽은 본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고 하지요. 이 말은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남의 종이 된 적도 없다. 우리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한 말의 뜻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너희들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하는 나를 왜 죽이려고 하는가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 유대인을 본격적으로 공격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에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더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너희들은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비는 마귀고, 너는 마귀에게서 낳고, 아비의 욕심대로 행하고자 한다고 하시고, 결국 나를 살인할 것이고 , 나오는 말은 다 거짓말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보기에 심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다 살인자고, 마귀새끼이고, 마귀의 욕심대로 행하는 자고, 거짓말 하는 자입니다.

에브라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왜 그들이 하나님의 원수가 죽어야 하는 자리에서 자신들이 사만 이천 명이 죽어야 했습니까?

그 이유를 요한복음8장에서 예수님께서 설명하고 계십니다.

분명히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마귀의 자식입니다.

에브라임이 분명 장자권을 받았지만 이런 식의 사고를 하는 자는 가나안 땅에 살 자격이 없습니다.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에브라임처럼 사고하지 않았나요?

사고 했어요. 그런데 입다는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고 에브라임은 왜 죽어야 합니까?

인간 구원으로 성경을 보면 성경이 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이렇게 하셨다 저렇게 하셨다가 되지요.

모든 것을 인간구원입장에서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이해하니 성경이 도무지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사로이 성경을 푸는 행위입니다. 베드로후서2장20절에 보면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사로인 푼 자들의 예가 나오는데, 이들의 성경해석은 탐심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합니다.

탐심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자기를 위한 탐심이지요.

그러나 성령을 받게 되면 여호와께서 일하시는 것이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즉 유월절 어린양의 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전하기 위해 자신이 이용되고 있음을 압니다.

에브라임은 구약지파로서 인간이 갖고 있는 본성,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위주로 해석하는 자의 모델을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때 유대인들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설교를 했습니까?

탐심입니다. 자기들 위주입니다.

예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들 중심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머물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마귀의 새끼임이 드러났습니다.

모두가 다 에브라임과 같은 사고방식을 하는 죄인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택한자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예수님을 자신들의 탐욕대로 대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로 이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개인 탐욕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입다처럼 마음껏 사용되어지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전하기 위해.

그러나 성령 없는 자들은 말씀을 자신의 탐욕을 위해 사용하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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